4. 흑막이 나를 고용하려 한다2021.11.12.
묘한 보라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내 얼굴을 훑었다. 이대로 숨이 막혀 기절하지 않을까, 싶을 때 즈음. 라크하의 불그스름한 입술이 열렸다.
“잠을 무척 잘 잔 얼굴이군.”
“하하, 네. 좋은 아침이죠?”
“누가 보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인 줄 알겠어.”
양심이 콕콕 찔렸다. 그래, 아무리 실수라지만 내가 머리채를 잡은 건 사실이니까.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어제 있었던 일은…… 죄송해요.”
“무슨 일?”
라크하가 입매를 틀어 올려 웃었다.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직접 내가 한 일을 토로했다.
“머리채를 잡고 바닥으로 내쳤던 일이요.”
“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정말 죄송해요. 실수였어요.”
“두 번 실수했다간 사람 한 명을 그대로 저승으로 보내겠어.”
틀린 말이 아니라서 할 말이 없네. 나는 어떠한 대꾸 없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입을 다물었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싸늘한 시선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사과할 일은 그걸로 끝인가?”
그렇다고 해야 하는데……. 자연스레 라크하가 들고 있는 프라이팬으로 시선이 향했다. 저것만은 절대 말할 수 없어. 어떻게 한 번 더 머리를 내리칠 생각을 했다고 내 입으로 얘기하겠는가.
‘그냥…… 방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욕구가 물씬 올라오던 그때.
“뭐야, 오늘 아침도 수프야?”
“으으, 지겨워……. 얼른 집에 가고 싶다.”
시끌벅적한 쌍둥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악랄한 사제. 아직 안 갔네?”
아이샤가 나를 발견하곤 말을 걸어왔다. 퉁명스럽고 짜증어린 아이샤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좋은 아침이야, 아이샤.”
“누가 아침 인사해 달래? 왜 아직 안 갔냐고 물은 거잖아.”
반갑다는 거 취소다. 저 얄미운 꼬맹이 같으니라고. 무어라 하고 싶지만, 꾹 눌러냈다. 덕분에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긴 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 가려고. 아, 그래! 지금 가면 되겠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라크하를 지나쳐 대문으로 걸어가려 했다. 누가 나를 부르지만 않았어도.
“사제.”
익히 듣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럼 남은 사람은 라크하 아인티아, 단 한 명뿐. 나는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삐그덕대며 뒤를 돌아봤다.
“……저 말이에요?”
“그대를 제외하곤 이곳에 사제가 있나?”
저도 사제가 아닌데요. 마음 같아선 그의 질문에 토를 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입가에 어색하게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네, 저밖에 없죠.”
라크하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더니 프라이팬을 내밀었다.
“받아.”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프라이팬을 내려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꾀죄죄했던 프라이팬이 고운 자태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마치, 누가 박박 닦기라도 한 것처럼.
“요리를 할 생각이 아니었나? 더럽기에 닦아놨다만.”
“……네? 닦았다고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프라이팬을 열심히 닦는 흑막이라.
‘상상이 안 되잖아.’
얼이 빠진 나를 향해 라크하가 몸을 숙였다.
“물론 식중독으로 애들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유감이야.”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식중독? 애들을 죽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이번엔 모른 척 넘어가 주겠지만, 다음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뭘 모른 척 넘어가 주고, 다음은 왜 기약한단 말인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고…….”
라크하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입매를 느슨하게 휜 그가 여유로운 얼굴로 내게 프라이팬을 내밀었다.
“자, 받아.”
그래. 뭐가 됐든 순순히 무기를 준다는데, 일단 받아야지. 얼떨떨한 얼굴로 프라이팬을 받았다. 라크하는 요리용 화덕을 가리켰다.
“요리는 저기서 하면 돼.”
아아…… 나를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구나.
“네…….”
나는 얼결에 요리용 화덕 앞에 섰다. 감자, 당근, 양파. 화덕 주변에는 딱 세 가지 야채만 있었다.
‘이걸로 요리를 하라고?’
흘깃 뒤를 돌아보자, 아이샤와 델카인이 시큰둥한 얼굴로 수프를 휘적거리고 있었다.
‘……빈약한 재료로 애들을 만족시킬 만한 요리를 하면 살려준다는 뜻이었나?’
나는 내 육 년간의 자취 경력을 머릿속에 되새겨 보았다. 생각해내. 생각해내야 해. 나름 머리를 쥐어짠 보람이 있었다. 머릿속에 섬광이 번뜩 스치고 지나갔으니까.
“그래, 이거다.”
이 메뉴라면, 쌍둥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반쯤 확신에 찬 나는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 내가 생각해 낸 요리는 감자볶음이었다.
“이게 뭐야?”
탁자에 올려진 감자볶음에 흥미를 보이는 델카인과 달리.
“웩, 채소밖에 없잖아. 난 채소 싫어. 맛없을 것 같아.”
아이샤는 질색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먹어보지도 않고, 맛없을 것 같다니. 살면서 감자볶음을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자신감을 갖고 아이샤에게 권했다.
“아이샤가 생각하는 채소 맛이랑 다를 거야.”
일단 잡숴봐. 하지만 아이샤는 보통 똥고집이 아니었다.
“채소가 채소지!”
“……그럼 델카인만 먹어 볼래?”
“응.”
델카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감자볶음을 집으려던 찰나.
“잠깐. 내가 먼저 먹어보지.”
라크하가 접시를 채가더니 내가 만든 감자볶음을 매섭게 주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스며든 건 경계심이었다. 감자볶음에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한 경계심.
‘내가 어떻게 만드는지 뻔히 봤으면서.’
따가운 시선에 요리하는 내내 뒤통수에 구멍이 뚫리는 줄 알았다.
“독 안 탔어요.”
“누가 독을 탔다고 했나?”
“그냥, 그렇다고요.”
워낙 경계하시길래. 라크하는 그제야 감자볶음을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 한 번, 두 번.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씹고 나서야 삼킨 그는 한 번 더 감자볶음을 집었다. 그렇게 몇 번을 집어먹었을까.
“형?”
델카인의 부름에 라크하는 포크질을 멈추었다.
“……먹을 만하네.”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델카인에게 감자볶음이 담긴 접시를 건네주었다. 라크하가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다행이다. 맛있었나 보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아인티아 공작가에서 최고의 요리를 대접받고 자라 입맛도 높을 텐데. 역시 명불허전, 대중 음식인 감자볶음이다.
“어? 엄청 맛있어!”
델카인이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영혼 없이 한 말은 아니었는지 델카인은 수프를 제쳐놓고 감자볶음을 먹기 시작했다.
‘원해서 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잘 먹어주니 은근히 뿌듯하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델카인을 지켜보았다.
‘잘 먹어서 다행이다.’
그때, 아이샤가 살며시 질문을 던졌다.
“……델카인, 그렇게 맛있어?”
“응, 먹어볼래?”
델카인은 딱 한 입 정도 남은 감자볶음을 아이샤에게 권했다. 아이샤는 채소가 싫다고 외쳤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모른 척해 줘야겠지?’
나는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달그락. 수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지금쯤 먹었을 텐데.’
나는 딴청을 부리던 걸 멈추고 아이샤를 바라봤다.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샤의 눈빛에 반항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사제.”
매번 붙이던 ‘악랄한’은 어디 갔데?
“응?”
탕! 고개를 번쩍 든 아이샤는 탁자를 두 손으로 내리치며 박력 있게 외쳤다.
“너, 내가 고용할게! 우리 집으로 와!”
일순간 어렸을 때 보던 해적 만화가 오버랩되었다. ‘너, 내 동료가 되어라!’라고 외치는 그 만화 말이다. *** 아이샤가 파격적인 발언을 한 후. 라크하는 나를 따로 밖으로 불렀다.
“음식에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약을 탔나?”
독에 이어 이젠 약이냐…….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이샤는 함부로 사람을 곁에 두지 않아.”
감자볶음이 그렇게나 맛있었나 보지. 혹은, 싫어했던 채소의 새로운 매력을 알게 해줘서 좋았다든가. 그러나 아직 목숨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게 말할 배짱이 되지 않았다.
“……그런가요? 저는 처음 알았어요.”
“그대가 무슨 술수를 쓴 게 아닌 이상, 아이샤가 그럴 일은 없어."
“저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궁금하면 아이샤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왜 굳이 나한테 묻는 건지 모르겠다. 라크하의 보라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수상하군. 공작가로 따라와 줘야겠어.”
그것만은 안 돼! 소설 속 주요 인물들과 엮인다고 해도, 라크하만은 절대 안 된다. 언제 나를 죽이려고 할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젓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지?”
“그게…….”
잘못 대처했다간, 영락없이 싸늘한 시체 꼴이 될 터.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황급히 변명거리를 떠올렸다.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요.”
“아인티아 공작가로 데려와도 돼. 동생들이 몇 살이지?”
“아, 그리고 제가 향수병이 심해요.”
“일주일에 한 번, 그대를 고향으로 데리고 가면 되나?”
이게 아닌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나를 데려갈 심산인 게 틀림없었다.
“남편! 남편도 있어요! 질투가 엄청 센 남편이요.”
“…….”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표정에 소름이 돋았다.
“사제는 결혼을 못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사실 사제가 아니라서요.”
“여기서 새하얀 의복을 입고 돌아다닐 사람이 사제 말고 더 있나?”
흠결 하나 없는 얼굴이 갸우뚱 기울어졌다. 내가 하는 말들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듯했다. 나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제가 이 옷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이거 엄청 편해요!”
나는 이리저리 몸을 양옆으로 돌리며 라크하에게 옷을 자랑했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게 몸을 돌렸던 탓일까. 찌익. 신축성 하나 없는 옆구리가 터지고 말았다.
“…….”
“…….”
의도치 않게 흐르는 정적.
‘타이밍도 참 거지같지.’
어제 숲을 달리며, 옷이 해진 게 틀림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옆구리를 가렸다.
“하하, 이, 이게 왜 찢어지지? 정말 편한데.”
“……그대는 그런 옷을 편하다고 하는군. 취향이 참 독특해.”
“그러게요…….”
무리수를 뒀구나. 나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크하의 취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과 동생들은 어디 있지?”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저희 집이거든요.”
“얼마나 가야 하는데?”
“……한 시간 정도?”
한 시간이면 걸어가기에 꽤 먼 거리였다. 결국, 라크하가 지금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거지. 그러나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바로 그가 이쪽 지리에 빠삭하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북쪽은 온통 산이야.”
“……서쪽이었던가.”
“서쪽도 마찬가지야.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마을이 위치한 곳은 동쪽이지.”
젠장. 망했다. 지지리도 운이 없는 내가 동서남북, 정확히 1/4 확률을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와 엮이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든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아야 했다.
“아, 맞아요. 동쪽이에요! 제가 방향 감각이 떨어져서 잊고 있었네요.”
“사실 남쪽이야.”
“…….”
망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지금까지 한 말이 전부 거짓말이었군.”
라크하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하필 바로 뒤로 문이 있는 탓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도망,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 적색경보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나는 빠르게 이리저리 눈을 굴려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는 이 세계의 흑막, ‘라크하 아인티아’였다.
“어딜 도망가려고?”
더욱 가까이 다가온 라크하가 매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그의 눈동자가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처럼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