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흑막과 프라이팬2021.11.08.
“메이아야! 안 되느니라!”
“으아……! 읍.”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내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크, 큰일 날 뻔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낮 내내 나를 괴롭혔던 파랑새, 테리투스가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
“무기를 내려놓거라! 지금 살아 있는 인간을 죽이려고 하는 게냐!”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좀 해요! 누가 듣겠어요!”
내가 쌍둥이들을 어떻게 달래서 재웠는데!
“어차피 내 목소리는 다른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아, 그래요?”
“그래. 감히 누가 함부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느냐.”
아아, 괜히 식겁했잖아. 안도의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럼 무시해도 되겠구나.'
나는 더 이상 테리투스에게 대꾸를 하지 않고 라크하에게 다가갔다. 나를 공격하려는 순간 바로 대처하려면 지켜보고 있어야겠지?
“안 된다!”
뭘 하지도 않았는데 테리투스가 날아와 라크하의 몸 위에 앉아 나를 말렸다. 새의 모습을 한 주제에 테리투스의 자태는 쓸데없이 고고했다.
“제가 뭔 짓을 하려는 줄 알고요.”
“프라이팬으로 죽일 생각이지 않느냐! 살기가 느껴진다, 느껴져!”
“죽이려고 준비한 거 아니에요.”
내가 살려고 준비한 거지.
“네가 그걸로 온 힘을 다해 내려친다면 죽을 게다.”
흑막이 고작 프라이팬으로 죽는다고요? 나는 팔짱을 낀 채 눈가를 좁혔다.
“그럴 일 없으니까. 말리지 마요. 저 오늘 탈출한 거 봤죠? 정말 살고 싶단 말이에요.”
“왜 그리 삶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행동만은 말리고 싶구나. 누구나 각자의 운명이 있는 법이야.”
어쩐지 보면 볼수록 더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하는 것 같네. 특히 방금 전에 한 말은 내게 심히 와닿았다.
“그러니 너도 얼른 다시 신전에 돌아가서…….”
“제 운명대로 살라고요?”
“그렇지.”
1년 뒤에 죽을 운명대로?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절대 그럴 순 없었다. 더욱 의욕이 불타오른다.
“제가 그 운명이란 거 한 번 바꿔보죠.”
"내가 졌다, 졌어!”
내가 프라이팬을 고쳐 잡자, 테리투스는 아연실색하며 퍼드득 날갯짓을 했다.
“신전에 돌아가라고 재촉하지도, 네 운명대로 살라고도 하지 않을 테니, 일단 그 무시무시한 것 좀 내려놓거라.”
“그럼 제가 죽을 텐데요?”
“절대 죽지 않도록 내가 책임지겠다!”
그쪽이 어떻게 책임지려고? 의심 어린 눈으로 테리투스를 바라보았다. 테리투스가 가슴팍을 쭉 내밀더니 날개를 그 위로 올렸다.
“테리투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좋아요.”
신이 직접 이름을 걸 정도라면, 믿을 만하지. 나는 그제야 경계심을 풀고 뒤로 물러나 앉아 프라이팬을 내려뒀다.
'그런데 테리투스가 왜 이렇게까지 말리는 거지?'
신전에서 탈출할 때도 잔소리는 심하긴 했다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 테리투스를 향해 물었다.
“라크하를 제법 아끼시나 봐요?”
“없어선 안 될 존재란다.”
저기요, 이 사람 흑막인데요? 소설의 내용을 아는 나로선 굉장히 당황스러운 대답이었다. 흑막이 없으면, 레이나와 키네스의 관계가 농밀해지지 않아서? 혹은 내가 읽지 않았던 외전에 숨겨진 내용이 있었나?
“……그렇군요.”
납득이 되진 않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그렇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라크하가 깨어나서 나를 살려주기만 한다면, 그대로 작별을 고할 거니까. *** 어느새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테리투스는 메이아가 잠들고 나서야 다시 창문가로 날아가 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이아가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하기론 굉장히 순하고, 수줍음이 많으며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유약하던 모습이 가엾어서 다른 인간들보다 좀 더 신체 능력을 강화시켜주기도 했다. 25살. 어차피 그때가 되면 제 품으로 올 아이였으니까.
“내가 잠시 잠들어 있던 사이 많이 변했구나.”
굉장히 저돌적이고 삶의 목표가 뚜렷한 아이로.
“예지몽을 꾼 영향이려나.”
차원을 관리하는 신, 포르투나가 점지해준 꿈이 무척 충격적이었나 보다.
‘쯧, 그냥 지켜보기만 해달라고 했었는데 참견까지 할 줄이야.’
덕분에 오랜만에 메이아를 봤을 때 꽤 당황스러웠다. 운명의 흐름을 벗어나 방황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본래 운명대로 흘러가도록 유인까지 해 보았으나 쉽지 않았다.
‘무척 불안정해 보였지.’
메이아를 중심으로 감싸고 있는 인연의 실이 무척 엉켜 있었다. 보통 인간들과 달리 잔뜩 꼬여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개중 라크하와 이어진 인연의 실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렇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메이아를 말리긴 했다만.
‘분명 금기의 흑마법을 쓴 인간이렸다.’
테리투스는 라크하를 흘겨보며 혀를 끌끌 찼다.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하구나.”
짐짓 흥미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린 테리투스는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때마침, 침대에 누워 있던 라크하가 눈을 떴다.
“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라크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침대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던 메이아가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으음…….”
그는 메이아를 내려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제 머리채를 잡은 뒤 바닥으로 내친 여자가 분명했다. 지끈. 괜히 머리가 더 아픈 기분이었다.
“……죽일까?”
감히 머리채를 쥐어 잡은 걸 모자라서 바닥으로 던진 여자였다. 보라색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스며들었다. 커다란 손이 메이아의 목으로 향했다. 하지만 목을 옥죄려던 손은 이내 공중에서 멈추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땐 내가 왜 반응을 못 했지?’
부러질 것같이 얇은 목.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색. 연약해 보이는 저 여자의 행동을 제지 못 할 리가 없었다. 라크하는 그 당시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저 여자가 머리를 잡은 순간, 몸이 나른해지면서 힘이 들어가지 않았었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익숙한 감각이었다. 잡아먹을 듯 위협하며 요동치던 흑마법의 오라도. 눈을 감을 때마다 들려오는 울부짖음도. 그를 항상 괴롭히던 것들이 고요해지며 느껴지지도, 들려오지도 않았으니까.
“샤키르의 꽃.”
그래, 샤키르의 꽃의 효능과 비슷한 감각. 라크하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곤 그녀의 손가락 끝에 제 손끝을 대어보았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마음이 진정되며 고요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왜 샤키르의 꽃과 비슷한 효과가 나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분명 저 여자에게 답이 있으리라.
“헤헤.”
때마침 메이아가 잠들어 있다 말고 잠꼬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배짱도 좋군.”
본인이 무슨 상황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고 태연하게 웃다니. 제 머리채를 잡을 때부터 알았지만…….
‘역시 보통 인간이 아니야.’
라크하의 눈 위로 서슬 퍼런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
‘실컷 웃어라. 웃을 수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테니까.’
메이아를 깨우기 위해 망설임 없이 그녀의 어깨를 잡던 때였다. 라크하는 화들짝 놀라며 단 1초의 지체 없이 손을 거뒀다.
“이게…… 무슨…….”
정신이 몽롱해지며 몸이 풀어지는 기분이란. 손끝만 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라크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메이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지은 채 잠들어 있었다. 정말 저 여자 때문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거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라크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이었으니까. 차라리 자신이 잠이 덜 깼다고 하는 게 더 믿음이 가리라.
‘혹은, 후유증이나 머리채를 잡힌 트라우마라든가.’
이런 상태에서 지금 저 여자를 깨워봤자 좋을 건 없다고 결론 내렸다. 라크하는 드물게 회피를 택했다.
‘먼저 쌍둥이들이 괜찮은지 살펴보고 와야겠군.’
그대로 방을 나가려던 때였다. 침대 밑에 살짝 튀어나온 물건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뭐지?’
그는 눈가를 좁히며 침대 아래를 살펴보았다.
“프라이팬……?”
프라이팬이 왜 여기 있는 거지? 프라이팬을 들어 올린 라크하가 미간을 와작 찌푸렸다.
"윽."
먼지와 이물질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메이아가 호신용 무기로 가져다 둔 것이지만. 그 사실을 라크하가 알 리가 없었다.
'아이샤와 델카인이 장난을 쳤나 보군.'
그는 프라이팬을 주방에 갖다 놓은 뒤, 쌍둥이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쌍둥이들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누구야.”
날 선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형태를 띤 검은 기운이 날아왔다. 라크하는 몸을 살짝 틀어 가뿐히 공격을 피했다. 그러곤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샤, 내가 상대를 확인하고 공격하라 했을 텐데.”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는 아이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빠?”
“대신 대처하는 능력이나, 순발력은 좋았으니 칭찬해 주마.”
아이샤에게 라크하의 칭찬이 들릴 리가 없었다. 아이샤는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잠들어 있는 델카인을 흔들어 깨웠다.
“델카인, 델카인! 일어나 봐! 라크하 오빠가 살아났어."
“으음……. 뭐?”
“그 악랄한 사제가 오빠를 살렸다고!”
“그래, 내가 살릴 수 있을 거라 했잖아.”
누가 누구를 살렸다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라크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샤, 델카인. 무슨 말이지?”
쌍둥이들이 라크하에게 다가가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았다.
“오빠, 괜찮아? 우리랑 계속 밥 먹어줄 거지?”
“형, 입맛은 있어? 푸이리처럼 된 건 아니지?”
푸이리라면, 델카인의 생일날 선물해 줬던 다람쥐 계열의 마물이었다.
‘죽고 나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기에 살려줬었지.’
흑마법을 써서 말이다. 대신, 움직이기만 할 뿐 무감각한 인형과 같았다. 죽은 생명체를 움직이게 하는 흑마법은 이런저런 위험 요소가 많았다.
‘델카인에게 알려주지 않으려고, 다른 말로 둘러댔던 것 같은데.’
어른은 살면서 딱 한 번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했었던가? 상황 파악이 쉽사리 되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 가득한 쌍둥이들을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밥을 먹겠지.”
“다행이다! 우린 오빠가 푸이리처럼 되는 줄 알고 걱정했어.”
“그런데, 누가 누구를 살렸다고?”
라크하의 질문에 쌍둥이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느릿하게 껌뻑였다.
“악랄한 사제가 형을 살렸지.”
“악랄한 사제라면…… 내 방에 있던 여자?”
“응, 맞아 그 여자야.”
그렇게 내 동생들을 꾀어냈단 말이지. 그 여자가 자신이 죽지도 않았는데,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살리는 척을 했다. 라크하는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어떻게 살리던데?”
“수건이랑 대야에 물을 담아 오라고 했어.”
당당하게 대답하는 델카인에 비해, 아이샤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라크하는 아이샤에게 되물었다.
“아이샤?”
“악랄한 사제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비밀이라고 했는데……."
아이샤는 한참을 쭈뼛거린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를 살리는 신성한 의식을 위해 그 사제가 프라이팬이 필요하댔어.”
“프라이팬이 왜 필요해?”
곁에 있던 델카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이샤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탄성을 터뜨리더니 앙증맞은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쳤다.
“아마 프라이팬을 들고 춤을 추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신성한 의식이라고 했다며?”
쌍둥이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동안. 라크하 역시 프라이팬의 용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프라이팬이라…….'
먼지와 이물질이 잔뜩 쌓인 프라이팬. 그걸로 요리를 해서 먹는다면, 무조건 식중독에 걸릴 터.
‘설마 애들을 죽일 생각이었나?’
그렇다면, 대체 누가 보낸 거지? 라크하는 저와 척을 진 세력들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처음 보는 능력도 그렇고, 그가 알고 있는 세력 중에서 보낸 자객치고는 허술했다. 쉽게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고 잠이나 자고 있지 않던가.
“차라리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걸지도…….”
자신에겐 워낙 적이 많으니.
“뭐라고 했어, 오빠?”
“아니, 아무것도.”
저도 모르게 홀로 중얼거렸던 라크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그 이상한 능력 때문에라도 그냥 보내줄 수는 없었다.
‘당분간 곁에 두고 예의주시해야겠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니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는 걸 느끼며 눈을 천천히 떴다. 눈앞에 보이는 빈 침대. 멍한 눈으로 침대를 바라보던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헉.”
라크하가 깨어난 거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 문득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이미 죽어서 또다시 다른 사람 몸으로 태어난 거라면?’
여긴 그냥 비슷한 방인 거고. 긴장감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방에 비치되어 있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가슴 아래까지 내려오는 백금발에 푸른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 낯설면서도 어느새 익숙해진 외양이었다.
“……아직 메이아의 몸이야.”
이젠 내 몸이 되어 버린 메이아의 몸.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거울에 비친 메이아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라크하는 어디 간 거지?’
라크하의 행방을 탐색하려던 찰나. 꼬르륵,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배고파…….”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가. 허기에 배를 매만지는데 고소한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아침을 먹나?”
방문 밖으로 나갈까 말까 고민되었다. 살아남긴 했다만 라크하를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민이 무색하게도, 꼬르륵. 내 배는 또다시 밥을 달라고 요란하게 울어댔다.
“……일단 나가보자.”
언제까지 방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애써 합리화를 하며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선택을 곧바로 후회했다.
"……."
방문 앞에는 라크하가 서 있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채. 다른 것도 아닌, 한때 그의 머리통을 내려칠 생각으로 준비했던 내 호신용 프라이팬을.
'저, 저게 왜 여기 있어?'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비틀거렸다. 젠장, 이번에야말로 황천길이 보이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