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흑막의 동생들이 협박한다2021.11.05.
운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계단에 떨어져 죽질 않나, 소설 속에서 인간 제물로 다시 태어나질 않나, 탈출하자마자 흑막을 만나질 않나. 남들은 여주인공 혹은 적어도 귀족으로 태어나서 하하 호호, 거리며 산다는데. 나는 신에게 농락당하며 목숨을 건 질주나 하고 있다.
‘……이게 인생이냐.’
그뿐이랴? 서브 남주이자 흑막인 아인티아 공작, 라크하. 그리고 아인티아의 쌍둥이 악동 남매, 아이샤와 델카인. 설상가상으로 소설 속 흑막과 얽혀 버렸다. 이렇게나 기구한 인생이라니.
“오, 오빠! 죽었어? 눈 좀 떠봐!”
“아이샤, 이미 죽은 형이 눈을 뜰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돼! 오빠가 죽을 리가 없어!”
“하지만 우리가 불러도 일어나지 않는 게 더 말이 안 되는걸.”
쌍둥이들은 라크하 주변에 둘러앉아 토론의 장을 펼치고 있었다. 확실히 흑막의 핏줄이라 그런지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그럼…… 정말 오빠가 죽었다는 거야?”
“……나도 인정하기 싫지만, 그런 것 같아.”
“오, 오빠아……흑.”
쌍둥이들은 불러도 눈을 뜨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로 사망 선고를 내렸다.
‘이걸…… 어쩌면 좋지?’
내가 9~11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을 다독여주지 않을 정도로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저기…… 얘들아?”
내 부름에 아이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먹을 말아 쥔 채 나를 죽일 듯이 쏘아보는 눈빛이 자못 살벌했다. 닭똥 같은 눈물이 아이샤의 뽀얀 뺨을 타고 흐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네가…… 네가 오빠를 죽였지.”
뒤이어 델카인의 중얼거림도 따라왔다.
“형이 사제들은 하나같이 전부 악랄하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사실이었어.”
“델카인, 저 여자가 사제야?”
“응, 아마도. 형이 여길 돌아다닐 사람은 사제밖에 없다고 했거든.”
“그럼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네. 악랄한 사제라면, 오빠를 죽인 게 확실할 테니까.”
아이샤의 주변에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잠깐, 아이샤도 흑마법을 쓸 줄 알아? 라크하만 쓸 줄 아는 게 아니라?’
여하튼 이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자, 잠시! 잠시만!”
내가 신전을 어떻게 탈출했는데! 여기서 인생을 하직할 순 없었다.
“미안하지만 얘들아, 그……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오해는 무슨 오해야! 우리는 그냥 조용히 샤키르의 꽃만 찾아서 갈 생각이었는데 너 때문에 오빠가 죽은 건 변함없어!”
“그런다고 우리가 속아 넘어갈 것 같아?”
목청 큰 쌍둥이들 덕분에 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러다간 나를 찾던 사제들에게 들킬지도 몰랐다.
“죽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목소리를 낮추는 게 어떨까?”
“죽었다니까!”
“맞아! 죽었다고!”
……이 정도면 그냥 죽길 바라는 거 아니야? 나를 죽일 합리적인 이유를 찾고 싶다거나. 마음속에서 의심의 싹이 솟아오르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아이샤, 죽여.”
“좋아.”
델카인의 지시와 함께 별안간 아이샤를 감돌던 기운이 거세졌다.
‘안 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내가 살릴게! 살리면 되잖아!”
“거짓말 치지 마!”
아이샤의 기세는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델카인은 작은 변화를 보였다.
“……잠깐 아이샤.”
“이제 와서 말릴 생각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 저 사제가 한 말,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어.”
“뭐?”
델카인이 말리자 아이샤의 주변으로 일렁이던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걷혔다.
‘나, 나이스 델카인!’
얼마나 긴장했던 건지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무슨 소리야 델카인, 사제가 어떻게 오빠를 살려.”
“어른이잖아.”
“뭐?”
“형이 그랬어. 어른은 살면서 딱 한 번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역시 흑막답게 아이들에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키우던 푸이리를 형이 살려주면서 그랬어.”
“그런데 다시 살아난 푸이리는 이상해졌는걸. 이제 밥도 안 먹고.”
우리 흑막님, 동생들이 키우던 애완동물을 흑마법으로 살리셨구나. 하지만 아이샤와 델카인은 아직 라크하가 한 말을 믿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나 순수한 애들인 줄은 몰랐다. 소설 속에서는 쌍둥이들이 레이나를 악랄하게 괴롭히는 장면만 나왔으니까.
“어쨌든 형이 살아날 수 있다는 거잖아.”
……안 죽었다니까. 하지만 내 말을 믿을 리가 없겠지. 괜히 말꼬리를 잡힐 수도 있으니 나는 계속 입을 다물었다. 고민하는 듯 가만히 있던 아이샤는 조금 뒤, 맹랑한 눈으로 나를 보며 라크하를 가리켰다.
“악랄한 사제, 우리 오빠 살려.”
“그래, 물론이지. 내가 꼭 살려줄게.”
“못 살리면…….”
말끝을 흐린 아이샤가 고사리같이 작은 손으로 제 목을 그었다.
“너도 죽을 줄 알아.”
살벌하기도 하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일단 자리를 옮길까?”
아무래도 라크하가 깨어나는 데 조금 오래 걸릴 것 같거든. 나는 속으로 라크하가 제발 식물인간이 되지 않았길 빌고 빌어야 했다.
*** 쌍둥이들과 함께 겨우 라크하를 부축해서 작은 오두막집까지 데려오는 건 좋았다. 문제는 침대에 눕힐 힘이 없다는 거지.
‘히, 힘들어 죽겠네!’
라크하의 키가 워낙 큰 탓에 여기까지 부축해서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뭐 하는 거야…… 사제……! 이대로 둘 건 아니……지?!”
“빠…… 빨리 눕혀!”
쌍둥이들도 힘든지 숨을 헥헥 몰아쉬며 내게 소리쳤다. 뭐 이리 성격이 급하담.
“후우……하. 조금……만 쉬었다가 하는 건 어떨까?”
“그, 그럴까?”
“아이샤! 악랄한 사제한테 넘어가지 마! 형을 맨바닥에 둘 셈이야?”
아쉽다. 델카인만 아니었다면 넘어왔을 텐데. 결국 나는 군말 없이 마지막 힘을 다해 라크하를 침대 위로 올렸다.
“후우.”
차라리 생긴 것처럼 연약한 몸이었으면 좋았을걸. 메이아의 신체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힘이 제법 셌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던 때였다.
“자, 이제 오빠를 살려!”
한 번 나에게 넘어갈 뻔한 탓인지 아이샤의 눈빛이 한결 더 매서웠다.
“얘들아……. 이러다 내가 죽을지도 몰라.”
“그래도 살려!”
아이샤가 고집 어린 목소리로 한 번 더 빽 소리를 질렀다. 반면 델카인은 눈가를 좁히며 아이샤를 슬쩍 말렸다.
“아니야, 아이샤. 재촉했다가 살리지도 못하고 죽으면 곤란하잖아.”
“……그런가?”
아이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델카인의 말을 은근히 잘 듣는 것 같았다. 잠깐, 이거…….
‘델카인만 잘 회유시키면 자연스럽게 아이샤까지 다룰 수 있겠는데?’
“델카인, 저 사제가 웃는 것 좀 봐. 악랄해!”
“내가 잘못 말했네. 멀쩡한가 봐. 살리라고 재촉해도 되겠다.”
이런, 실수했다. 나도 모르게 지은 음흉한 미소를 재빨리 지웠다. 하지만 이미 쌍둥이들의 표정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괜히 머쓱해지네.
“그래, 지금 살려볼게. 대신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
“형은 혼자 푸이리를 살렸어.”
“라크…… 아니, 너희 형은 능력이 뛰어나서 그래.”
남주인공과도 맞먹는 엄청난 흑마법사거든. 쌍둥이들은 내 속도 모르고 라크하의 칭찬에 헤실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눈치를 흘깃 보더니 헛기침을 해댔다.
“형을 살리기 위해선 뭐가 필요한데?”
“내가 특별히 도와줄게! 말만 해.”
경계심이 가득할 땐 언제고, 역시 애들은 애들인가 보네. 나는 속으로 웃으며, 둘을 향해 물었다.
“우선 여긴 누구 집이야?”
아인티아 공작가의 아이들이 이런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지낼 리는 없고. 누군가의 집을 갈취한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아이샤는 내가 주제와 다른 내용을 꺼내자마자 곧바로 아르릉거렸다.
‘……사나운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보는 기분이네.’
그나마 차분한 델카인이 아이샤를 말리며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여긴, 샤키르의 꽃을 구하려고 형이 임시로 마련한 집이야.”
샤키르의 꽃. ‘샤키르’라는 여인이 발견한 꽃이라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여러 효능이 있지만 진정제 효과가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력으로 상태가 불안정한 황제, 키네스가 주로 사용하는 꽃이기도 했고.
‘그나저나 아인티아 공작가에서는 왜 샤키르의 꽃을 구하려는 거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아이샤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면, 다들 여기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겠네. 자, 델카인. 너는 수건이랑 대야에 물을 담아와 줘.”
“응, 알았어.”
델카인이 문을 열고 나갔다. 자리에 혼자 남은 아이샤는 날이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왜 나한테는 안 시켜?”
“아, 이제 시킬 일이 없거든.”
무엇보다 시키면 무어라 할까 봐 안 시켰지. 사실 수건과 물을 준비해 달라고 한 것도, 형식상 시킨 일이었다. 간호하는 티도 내고 겸사겸사 흑막님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주려고.
“오빠를 살리는 데 이렇게나 성의가 없다고?”
아이샤가 가자미눈을 뜬 채 쏘아붙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
아니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라크하가 깨어났을 때 날 죽이려고 할 수도 있잖아.’
적어도 날 죽이려 할 때 대처할 무기가 필요했다. 나는 아이샤를 향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사실 아이샤, 너한테 따로 시킬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뭔데?”
뭔 수작질을 하려는 거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이샤는 생각보다 관심을 보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집에 프라이팬 있니?”
그게 은근히 호신용 무기로 쓰기 딱 좋거든. 아이샤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뭐? 프라이팬이 왜 필요해?”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 뭐더라, 푸…… 뭐시기를…….”
“푸이리.”
“그래, 아이샤의 오빠가 푸이리를 살려줬었다며? 내가 볼 땐, 살리는 방법을 델카인만 본 것 같은데 맞아?”
기껏 머리를 굴렸는데 아니라고 하면 억장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맞아. 나는 어른이 되면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나는 지금부터 라크하의 이야기를 응용해 먹을 생각이다.
“사실 어른들은 한 생명을 살리려면 신성한 의식이 필요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려니 입안이 바짝 말랐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의식에는 사람마다 필요한 물건이 다른데, 음…… 나 같은 경우는 프라이팬이거든.”
“정말이야?”
“응, 원래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비밀인데 아이샤한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이건 델카인도 모를 걸?”
제발 속아 넘어가 주기를! 다행히 이번만큼은 내 바람이 이루어졌다. 미심쩍은 표정이긴 하나 아이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다행이다. 나는 아이샤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한결 마음이 놓이며 자연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 아이샤.”
“지금 갖고 오면 되지?”
“응. 꼭 델카인 몰래 가져와야 해.”
“물론이지.”
후다닥. 단언한 아이샤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앙증맞은 뒷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고 나서야 나는 몸에 힘을 뺐다.
“후.”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몸이 찌뿌둥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프라이팬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쩌지?’
나를 죽이려 드는 라크하를 기적적으로 기절시킨다 하더라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깨어나는 순간 또다시 날 죽이려 들 텐데.’
물론 고작 프라이팬으로 흑막을 기절시키는 게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괜찮아. 할 수 있어.”
이미 한 번 기절시켜봤잖아. 나는 나를 옥죄는 불안감을 애써 눌러냈다. *** 쌍둥이 남매들이 잠든 늦은 밤. 라크하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다.
"후……."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방을 돌아보았다. 사람 한 명이 충분히 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창문이 유독 눈에 띄었다.
‘뭔가…… 도망가기 딱 좋아 보이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밖은 달빛을 제외하곤, 빛 한 줌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죽이려고 한다면, 이걸로 내려찍고 도망치는 거야.”
나는 프라이팬을 손에 쥔 채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