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흑막을 기절시켰다2021.11.01.
세상만사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내 인생은 잔뜩 꼬이다 못해 진흙탕을 구르고 있었다.
‘그저 얇고 길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한낱 소설 속 엑스트라인 나에겐 그것조차 큰 욕심이었던 걸까. 나는 지금 내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괘, 괜찮으세요?”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내가 흑막, 라크하 아인티아 공작을 기절시켰으니까. 내 손으로, 직접. 훗날 여주인공을 감금하고 마물 떼를 끌고 와 황실을 공격하는 무시무시한 악역을 말이다.
‘……망했어! 망했다고!’
이런 걸 보고 사망 플래그가 꽂혔다고 하는 거려나. 그렇게나 살고 싶으면 라크하가 눈을 뜨기 전에 도망가면 되지 않냐고? 물론 나도 그러려고 했다.
“오, 오빠! 죽었어? 눈 좀 떠 봐!”
흑막의 여동생, 아이샤 아인티아.
“아이샤, 이미 죽은 형이 눈을 뜰 리가 없잖아.”
흑막의 남동생, 델카인 아인티아. 아인티아의 악동들이라고 불리는 두 명의 쌍둥이 동생들만 없었어도. 섬뜩한 두 쌍의 보라색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네가…… 네가 오빠를 죽였지.”
“형이 사제들은 하나같이 전부 악랄하니 조심하라고 했는데 사실이었어.”
살기 어린 시선에 뙤약볕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얼굴이 따가웠다.
“미안하지만 얘들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는 무슨 오해야! 너 때문에 오빠가 죽은 건 변함없어!”
“악랄한 사제 같으니라고. 그런다고 우리가 속아 넘어갈 것 같아?”
아니, 안 죽었다니까? 이때부터였다. 내가 이 아이들의 시터가 되고,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알려주자면……. 그래, 대략 반 시간 전으로 돌아가면 된다. ***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생을 마감한 나는 다른 사람의 몸으로 눈을 떴다. 그런 나를 향해 누군가가,
“메이아 님, 준비되셨습니까?”
메이아라고 불렀다.
"……저요?"
"네,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잠시, 잠시만요.”
메이아? 뭔가 익숙한 이름인데…….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으니. <샤키르의 꽃> 바로, 내가 죽기 직전까지 읽고 있었던 소설이었다. 설마…… 내가 <샤키르의 꽃>의 엑스트라 '메이아'라고?
"……말도 안 돼."
꿈을 꾸는 건가? 하지만 모든 게 생생했다. 제단 위로 세워진 푸른 눈의 늑대 동상. 눈이 부실만큼 새하얀 사제복과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제들의 시선들까지. 나는 내게 처음 말을 건 사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 지금 뭘 하려고 했었던 거죠?"
믿기지 않는 상황에 목소리가 떨렸다. 내 질문에 사제는 뭘 그런 걸 묻냐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축복을 내리기 전에 기도실에서 기도를 드리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축복이요?"
"네, 오늘 메이아 님께서 능력을 각성하셨으니까요."
정말 그 ‘메이아’란 말이야……? 원작에서는 이날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황제 키네스는 메이아가 각성한 날 축복의 의식을 받았다.] 어떤 능력을 각성한 건지 소설 속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하다. 축복을 내린 메이아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는 사실 하나는. 그리고 약 1년 뒤. [메이아는 키네스를 구원해 주기 위해 모든 힘을 건네주고 영원한 잠에 들었다.] 그렇다. 메이아는 남주인공인 황제 '키네스'를 위해 존재하는 엑스트라였다. 영원히 잠든다니 말이야 좋지.
'그냥 죽는 거잖아.'
비록 원해서 얻은 새로운 삶은 아니지만, 또다시 비참하게 죽고 싶진 않았다.
"저…… 고백할 게 있어요."
"메이아 님, 죄송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얘기예요.”
이래도 안 들을 거야? 그제야 사제는 내게 관심을 보였다.
"……뭡니까?"
나는 주변을 쓱 돌아보며 비밀 얘기를 하듯 속삭였다.
"사실 제 능력은 각성하지 않았어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장본인이 능력이 각성하지 않았다는데 어쩌겠어? 무조건 잡아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큰 오산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작게 심호흡을 한 사제가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연신 또렷했던 사제의 눈에 힘이 풀렸다. 뭐지? 의아하던 찰나. 사제가 고개를 빠르게 내젓더니 황급히 내 손을 놓았다.
"……아뇨, 각성하신 게 맞습니다."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확인한 건데? 무어라 하고 싶지만, 사제는 단호했다.
“그러니 제단 앞으로 가시면 됩니다.”
"지금……이요?"
"네, 신의 딸로서 언제나 우아함과 고귀함을 잊지 마시길."
“저, 저기요!”
애타게 불러봤지만, 사제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휙 돌아섰다.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제단 앞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제단 앞에 선 나는 사제들의 눈치를 보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신, 테리투스 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기도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 뒤이어 사제들이 읊는 주문 같은 기도문이 들려왔다.
'어쩌지? 정말 이대로 키네스에게 축복을 내려줘야 해?'
그리고 1년 동안 끙끙 앓다가 죽어야 한다고?
“……그럴 순 없어.”
이전 생도 어처구니없이 죽어서 억울해 죽겠는데. 나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이번 생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말 거다. 그러기 위해선…….
‘신전을 탈출해야겠지.’
지금만큼 도망치기 좋은 타이밍은 없었다. 기도 시간이어서 그런지 문 주변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마침 내가 입고 있는 의복도 일반 사제들과 달리 하늘하늘한 치마로 되어 있었다.
‘좋아, 도망칠 수 있겠어.’
빠르게 상황을 스캔한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눈치채기 전, 곧장 문을 향해 내달렸다.
“메이아 님!”
“메, 메이아 님! 어디 가십니까!”
저마다 경악에 찬 음성과 함께 나를 따라오는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불편한 의복 탓에 그들은 느렸다. 무척.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나는 환히 웃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원작의 굴레와 운명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소설 <샤키르의 꽃>에서 인간 제물 ‘메이아’로 빙의한 내가 살아남기 위한 첫 탈출 시도였다.
*** 탈출구를 찾는 것까지는 수월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하필 외부에 있던 경비병들이 내 얼굴을 알 줄이야.
"메이아 님! 멈추십시오!"
내가 미쳤다고 멈추겠어?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발을 놀려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필사적으로 신전 외부와 이어진 숲속을 달렸다. 하지만 옆에서 힘이 빠지도록 잔소리를 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파랑새로 현신한 신, 테리투스였다.
"메이아야, 능력이 각성하자마자 도망치면 내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겠느냐. 얼른 신전으로 돌아가거라."
테리투스는 내가 신전을 벗어나자마자 나타났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반갑구나. 메이아야, 이제 능력이 각성했으니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구나. 이 몸은 신, 테리투스이니라.
저 자그마한 파랑새가 저를 신이라고 소개할 줄이야.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포르투나에게 맡기고 잠든 몇 년 사이 삐뚤어졌구나. 기운도 많이 달라졌고. 이게 인간들의 사춘기인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다 큰 성인한테 뭔 사춘기람. 그렇게 헛소리는 계속됐다.
"물론 살면서 가출도 해보고 그러는 거지.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눈살이 절로 구겨졌다. 하지만 테리투스는 내 표정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가출이 아니라 산책을 하러 나온 거였느냐? 음, 의외구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산책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특이한 취향이 생긴 모양이구나."
뭐? 산책? 특이한 취향? 끝까지 무시해 보려고 했는데 더 이상 못 참겠다.
"그냥 사라지든가 조용히 좀 해요!”
안 그래도 힘든데 정신 사나워 죽겠으니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이대로 잡히지 않을까 싶을 때 즈음. 뒤에서 따라오는 수많은 발걸음 소리가 멎었다. 그제야 나는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멈춰 섰다.
"후우, 따돌렸……."
아니,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소설 속에서 '따돌렸나?', '처치했나?', '죽었나?'라고 말하는 순간 반대의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하, 힘들어 죽겠네."
나는 숨을 고르며 나무에 등을 기대 풀썩 앉았다.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메이아야,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전에서 나온다고 해서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으냐?”
포르르 날아온 테리투스가 내 어깨에 앉으며 물었다. 조용히 하라고 외칠 힘도 없다.
"1년 뒤에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오호라.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당연히……!”
잠깐. 설마 테리투스는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것도, 내가 진짜 메이아가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 거야?
"포르투나가 알려줬느냐? 아니지. 이제야 너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포르투나가 누구지? 테리투스는 소설 속에서 종종 언급되어서 알고 있었다. 물론 이상한 성격을 지닌 신이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지만.
“메이아야?”
테리투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채근했다.
'일단은 내가 원래 메이아가 아니라는 걸 숨기자.'
그게 어떠한 변수도 없는 방법일 것 같았다.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흐음.”
“제가 예지몽을 잘 꾸거든요. 최근에 꾸는 꿈이 족족 맞더라고요.”
도르륵, 눈을 다른 곳으로 굴리며 대답했다. 내가 신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될 줄이야. 심장이 떨렸다. 다행히 테리투스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쯧. 포르투나가 수를 썼나 보군."
혀를 차며 '포르투나'라는 이를 탓할 뿐.
“정정해 주마. 정확히 말하면 죽는 게 아니라 영원한 잠에 드는 거란다.”
"도대체 뭐가 다른 건데요?”
“육체가 잠들어 네가 내 곁에 오는 게지.”
“……그게 죽는 거잖아요.”
신이라는 작자는 사고방식이 어떻게 굴러가는 거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럼 영원한 잠에 드는 게 아니라면 신전으로 돌아가겠느냐?"
"얼마나 잠들어 있으면 되는데요?"
"음…… 100년?"
저기요,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건가요? 너무 쉽게 말해서 100년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알았다.
"저 안 불쌍해요?"
"불쌍하지. 난 내가 관할하는 모든 아이들을 사랑한단다.”
“그래도 제르디아 제국 황제를 제일 편애하겠죠.”
“내 능력의 일부를 지니고 있는 아이에게 마음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는? 신전에선 신의 딸이라고 불리던데? 억울한 내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테리투스는 연신 황제를 동정하기 바빴다.
“지금쯤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게다. 인간의 몸으로 신의 영역에 한 발짝 들어섰으니.”
“자업자득이죠. 신력을 쓰면 쓸수록 잠에 들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썼으니까요.”
“인간들은 살다 보면 피치 못한 일이라는 게 생기기도 하지 않느냐. 그저 그랬던 게지.”
이 정도면 부당한 편애라며 소리쳐도 되지 않을까?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아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저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도망치는 건데. 어쩔 수 없네요. 다른 사람을 찾으셔야겠어요.”
“뭐, 뭐라……?”
“혹시 모르잖아요. 어딘가에 톡 건들기만 해도 황제의 잠을 재워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이를테면, ‘레이나 아드리엔’, <샤키르의 꽃>의 여주인공님 말이다. 하지만 테리투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네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단다. 모두 임시방편일 뿐이지.”
"저는 제가 희생하면서까지 축복을 내려주고 싶지 않다니까요."
“그럼 앞으로는 되도록 신력을 쓰지 말라 주의를 줄 테니 이번 한 번만 축복을 내리는 건…….”
“싫어요.”
어림도 없지.
‘흑막이 있는 한 키네스는 신력을 쓸 수밖에 없다고.’
흑막 ‘라크하 아인티아’. 후에 그가 여주인공을 가지겠다고 납치와 감금, 테러까지 저지를 테니까. 할 얘기도 끝났고, 이제 충분히 휴식도 취했으니 다시 움직여보려던 때였다.
“메, 메이아야!”
다급히 나를 부른 테리투스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럴 마음 없으니까 이만 가요.”
“아니, 이대로는 못 간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이거지?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렇지! 어서 다시 신전으로…….”
“목숨에 위협을 느끼면 가겠지.”
내가 신전에서 도망친 것처럼 말이야. 나는 테리투스를 향해 위협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요리조리 날쌔게 내 손을 피해 다녔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테리투스와 실랑이를 벌였을까.
“느리구나. 느려. 누가 보면 거북이인 줄 알겠구나. 그래서 이 몸에 닿기라도 할 수 있겠느냐."
테리투스가 저를 잡기 위해 애쓰는 나를 보며 비웃었다. 저거 신 맞아? 열이 받다 못해 뒤통수가 뻐근했다. 끝내 금이 가 있던 내 멘탈은 와장창 부서지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신 같으니라고!”
내가 어떻게든 잡고 만다.
“이리 안 와요?!”
"어디 한번 잡아 보거라!"
숨을 몰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던 때였다. 부스럭 부스럭. 멀지 않은 풀숲 위로 무언가가 움직였다.
"옳지, 저기 있구나."
내가 모를 줄 알고? 씩 웃은 나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가 풀숲 위를 움켜잡았다.
"잡았다!"
"윽!"
윽?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내가 뭘 잡은 거지?’
나는 느릿하게 눈을 껌뻑이며 내 손에 잡혀 있는 걸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사이 엉켜 있는 결 좋은 새카만 머리카락. 의도치 않게 처음 보는 사람의 머리채를 잡은 나는 속으로 욕을 뱉어냈다. 그때였다.
"흠, 이상한 걸 잡고 있구나. 이런 걸 보고 머리채를 잡는다고 하던가?"
"으아악!"
바로 귀 옆에서 들려온 테리투스의 음성에 깜짝 놀란 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잡고 있던 걸 바닥으로 내쳤다. 쿵! 남자의 머리가 바닥과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헉!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몸을 숙여 남자를 향해 물었다.
"괘, 괜찮으세요?"
"……."
답이 없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탈출하자마자 살인마로 낙인찍힐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심장이 쿵쿵 뛰었다.
"테, 테리투스 님……?”
-짹짹! 하지만 돌아오는 건 이미 신이 떠난 파랑새의 활기찬 지저귐뿐. 엄연히 공범이면서 위급한 순간에 도주했단 말이야?
'저런 것도 신이라고……!'
나는 마지막까지 테리투스를 욕하며 쓰러진 남자 앞에 쭈그려 앉았다. 오뚝한 코앞에 손가락을 대어 보니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살아 있긴 한데…….”
불길한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왔다.
‘만약에 뇌진탕으로 식물인간이 되면 어쩌지?’
엎친 데 덮친 격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이쪽에는 꽃이 없어!”
"사제 놈들이 구하기 전에 우리가…… 라, 라크하 형!"
라크하? 나는 그제야 기절해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마 위를 덮고 있는 비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 남자다운 턱선과 날렵한 콧대. 눈을 감고 있지만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미형의 사내였다. 하지만 내 입은 다른 의미로 천천히 벌어졌다.
“설마…… 라크하 아인티아?”
소설 속 흑막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