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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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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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인연
2023.02.16.
“어? 엄마! 지아 사진이 왜 저기 있어?”
액자 속 사진을 보며 반갑게 외치는 지아를 보며 현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왈칵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진정시킨 그녀는 이윽고 어린 딸에게 말해주었다.
“으응, 지아야. 꼭 지아처럼 생겼지?”
“응!”
해맑게 외치는 아이를 보며 현서는 아이의 뺨에 얼굴을 맞댔다.
“우리 지아랑 참 많이 닮았지만 저건 지아가 아니야.”
“그럼 누구야?”
“지아의 언니야.”
“아아! 언니구나?”
사실 주변 사람들이 현서의 가족 앞에서 서하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워낙 아픈 이야기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엄마 현서가 분명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은 들려준 적이 있었고 오빠 도현도 가끔은 언급을 했었기에 어린 지아도 자연스레 언니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응. 여기 서하 언니가 있어.”
“그렇구나아.”
아직 죽음의 개념을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 지아는 그저 언니의 사진을 보며 안다는 듯이 반색을 보일 뿐이었다.
“언니는 여기 살아? 지금은 어디 갔어?”
언니가 먼 곳에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던 아이였다. 현서가 목이 메는 듯 망설이자 곁에 서 있던 도하가 지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언니는 하늘로 떠났어.”
아빠가 해주는 말에 지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떠났어? 그럼 못 봐?”
“지금은 못 봐. 그렇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면, 언젠가 우리도 언니랑 만날 수 있을 거야.”
“응. 근데 언니인데 왜 지아보다 작아? 아기같이 생겼어.”
“지아보다 어릴 때 하늘로 떠나서 그래.”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도하 역시 울컥 가슴이 아렸다.
천사 같던 어린 아가, 서하. 자식에게서 오는 모든 첫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던 아이. 이제는 이렇게 서늘한 납골묘에 안치되어 있는 그의 첫 딸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언니가 떠난 날이야.”
“정말?”
작년에도 왔었는데 어려서 기억을 금방 잊은 모양이다.
“응. 지아도 이제 네 살이니까 언니한테 의젓하게 인사 건네볼까?”
언니의 모습은 사진뿐인데 인사를 건네라니 지아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오빠가 먼저 할게.”
그런 동생의 얼굴을 본 도현이 빙긋 웃으며 먼저 보여주었다.
“서하 누나, 안녕? 올해도 내가 왔어. 우리 가족은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 누나도 행복한 곳에서 편히 잘 쉬고 있지? ”
이내 도현은 지아를 돌아보며 상냥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면 돼, 지아야.”
지아는 꽃리스 속에 둘러싸인 언니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와 닮은 언니의 주변에는 자신 역시 평소에 좋아하던 캐릭터의 스티커들이 붙어 있었다.
“언니, 안녕? 난 지아라고 해.”
오빠가 하니 지아도 따라 인사를 건넸다.
“언니도 뽀로로 좋아하는구나? 나도 엄청 좋아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서가 조금 웃었다. 귀여운 막내 덕분에 올해는 이 슬픈 날에도 눈물이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았다.
도하도 애정이 그득히 담긴 눈길로 지아를 바라보다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하와 놀랄 정도로 똑 닮은 지아가 이제는 발음도 제법 정확해져선 서하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과 눈을 잠시 맞추던 현서는 곧 서하 곁에 나란히 안치된 친정엄마를 보았다.
“얘들아, 외할머니께도 인사하자.”
“할머니, 저 왔어요. 지아 많이 컸죠?”
도현은 저도 많이 컸으면서 꼭 어른 같은 말투로 외할머니에게 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빙긋 웃던 도하도 혜수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님, 오랜만에 와서 죄송해요. 작년에 올해는 더 행복해진 우리 가족 보여드리겠다고 약속드렸었는데 그 약속은 지킨 것 같아요.”
현서 역시 그리운 엄마를 향해 입을 떼며 특별히 중요한 소식을 전했다.
“엄마. 엄마가 아꼈던 사위가 곧 진성의 회장이 돼요. 엄마도 거기서 축하해줘요.”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누구보다 그가 잘 되길 바라셨던 분이었는데.
현서의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도하도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채도하 응원하기라면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을 만큼 열심이었던 혜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처음엔 좀 바빠지겠지만 현서에게 소홀히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내와 아이들이 어떤 것보다도 먼저니까요.”
현서는 고개를 돌려 남편을 잠잠히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남편은 그녀의 엄마와 했던 약속을 여전히 철저히 잘 지키고 있었다.
도하도 현서의 얼굴을 마주 보며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혜수 앞에서 다시 한번 가족을 평생 잘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
“몇 년 전 진성을 떠날 당시만 해도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돌아왔을 때 저를 믿고 여전히 반겨주신 여러분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현서는 진솔하게 취임사를 읊고 있는 도하의 말에 감회가 새로웠다. 어릴 적부터 곁에서 그를 지켜보았던 그녀의 머릿속에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이 스쳐 지나갔다.
“심려 끼쳐 드렸던 모든 시간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며 더불어 저를 기다려주셨던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십 대 입사 시절부터 뜨거운 감자였던 채도하가 드디어 진성의 총수가 되는 날이었다.
그와 조금 떨어진 채로 앉아 홀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현서는 코끝이 찡해오는 걸 느꼈다.
이제는 진성의 꼭대기에 서 있는 수장이었다.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어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진 채 혼자 서 있는 그 모습이 왠지 고독해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그 곁에서 삶을 함께하더라도 그 모든 무게를 온전히 함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을 알기에 더욱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여러분의 마음에 꼭 보답하여 좋은 기업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하지만 진성에서 누구보다도 저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채도하였다. 채도하보다 더 진성을 아끼는 사람도 없었고, 채도하보다 더 진성을 탁월하게 이끌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현서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는 부담감이 크겠지만 부담감보다 기쁨이 더 클 것이란 걸. 이것이 그에게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그는 진성의 회장으로서의 삶을 기껍게 받을 것이며 또 아주 잘 해낼 것이다.
비록 고독해 보였지만 저 자리에서 그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현서의 눈에 어느 때보다도 멋져 보였다,
현서는 이토록 신뢰할 수 있는 멋진 남자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게 새삼 흐뭇해서 은근히 입가가 올라갔다.
그의 반려로서, 또 진성의 임직원으로서 그를 평생 격려할 것이다.
취임사가 끝나자 수많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나왔다. 현서는 밝게 미소지으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응원을 담아 그를 향해 박수를 건넸다.
***
“엄마,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지아가 맑고 커다란 두 눈으로 현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으음, 가보면 알아!”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영화관 건물에 들어섰다. 현서는 지아에게 깜짝 선물을 주듯이 장소와 제목을 아직 말해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도하와 도현도 현서와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어어? 여기 영화관이야?”
관객석이 보이게 되어서야 지아는 장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응. 지아야, 앉자.”
가족 모두가 착석하자 갑자기 불이 꺼졌다.
“음? 벌써 시작하나?”
그런데 아직 조금 이르다고 생각이 들어 현서가 의아함에 고개를 들 때였다. 그 순간 화면에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 나왔다.
바로 현서 자신의 아기 시절 모습이었다. 놀란 현서의 눈동자에는 바뀐 화면이 비치고 있었다.
웃음을 감추지 못한 현서는 도하의 얼굴과 화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도하는 말없이 환하게 미소만 지었다. 화면에는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녀의 모습들이 차례로 담기고 있었다.
오늘은 다름 아닌 현서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마침 주말이어서 오늘 오후엔 아이들과 애니메이션을 관람하고 이어서 현서를 위한 생일 파티를 하기 위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두었다고 도하에게 전해 들었었다.
그런데 이 영화관조차……. 아이들이 아니라 나를 위한 거였다니.
“어쩐지 영화관에 다른 사람도 없고 불이 일찍 꺼지더라니…….”
그렇게 화면 속에서 현서의 어린 시절이 지나던 중이었다. 어느 순간 도하의 어린 모습이 불쑥 함께 나왔다. 현서와 찍은 사진이었다.
현서는 새삼 뭉클했다. 그때부터는 간간히 도하가 등장했다. 현서가 자랄 때마다 도하도 자라고 있었다.
어린이에서 학생으로, 또 어른으로.
그러다 두 사람의 결혼사진이 나왔다. 이미 아는 히스토리인데도 어린 시절을 지나 결국엔 둘이 맺어진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니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아보니 그와의 인연이 참 깊었다. 생각해보면 매 순간이 운명 같았다.
이어진 화면 속에는 서하도 나왔고 이후에는 도현의 신생아 시절도 나왔다. 화면 한구석에는 함께하지 못해 미안했던 시절이라는 멘트가 적혀 있었다.
어느덧 현서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잠시 아들과 둘이었던 사진들을 지나 도하까지 셋이 나온 영상이 보였고 또 지아가 나타나 넷이 보였다.
인연이 인연을 낳아 이어지는 관계들도 모두 운명이었다. 채도하와 결혼했기에 태어날 수 있었던 서하와 도현과 지아. 아이들이 제게 온 것도 귀한 운명이었다.
현서가 감격의 눈물로 젖은 얼굴을 닦고 있을 무렵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 모습의 도하와 아이들의 모습이 영상에 나왔다. 도현이 카메라를 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먼저 외쳤다.
[엄마, 생신 축하해요!]
[엄마, 추카해!]
[현서야, 태어나줘서 고마워. 사랑해.]
지아와 도하도 차례로 축하 멘트를 남기며 모든 영상이 끝이 났다.
이내 화면이 꺼지고 관내에 불이 켜지자 셋의 노랫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아.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생일 축하합니다!”
남편 도하의 손에는 커다란 생일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레터링으로 현서의 이름이 장식된 예쁜 케이크였다.
“다 같이 불자.”
넷이 다 함께 호, 하고 불며 촛불을 껐다.
“다들 고마워. 나만을 위한 상영도 고맙고.”
현서는 감성에 한껏 젖어 웃었다.
“마음에 들어?”
생각보다도 더 행복해 보이는 현서를 보며 도하가 뿌듯함을 이기지 못해 물었다. 현서는 애틋함을 띤 눈빛으로 도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남자, 내 아이들의 아빠, 내 사람. 고마워요. 오빠는 오늘도 너무 멋져요. 최고야.”
도하는 그녀의 말에 그녀만큼이나 감격에 겨워 말없이 현서를 끌어안았다.
“우아아, 엄마아빠 껴안았다아!”
아이들은 까르르 투명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현서는 웃으며 아이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내 강아지들도!”
그러자 도현과 지아가 후딱 달려들었다. 그렇게 가족이 서로를 꼭 껴안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현서는 영화관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가족 모두 사랑해! 우리 앞으로도 행복하자!”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 순간이 너무도 소중했다. 그리고 이렇게 소중한 순간들로 채워질 미래도 기대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행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