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별 외전 5 또 하나의 행복 (88/92)


특별 외전 5 또 하나의 행복
2023.02.02.


현서는 거듭 감탄하다가 문득 그가 입혀주는 옷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잠옷이 조금 야시시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요?”

“응. 기분 탓이야.”

“하하…….”

“난 이 옷이 좋더라.”

그건 다름 아닌 슬립이었다.


“네네, 취향 잘 알겠네요.”

도하는 피식 웃으며 침대 곁 협탁 위에 있는 스탠드를 켰고 방불은 껐다. 은은한 불빛만이 방 안을 비추게 되자 분위기는 더욱 아늑해졌다.


“아까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여기 이렇게 누워 있었는데 다시 여기 이러고 누워 있게 되었네요.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오빠가 알아서 들고 다니면서 깨끗해졌어.”

“돌아누워 봐, 안마해줄게.”

“하하, 안마까지.”

도하는 현서의 목부터 어깨까지 차례로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온몸을 그에게 맡긴 채 현서는 그 시간을 만끽했다. 곳곳이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손길이 제법이었다.


“피로가 다 풀린 거 같아요.”

안마가 끝난 후 천장을 보고 누운 현서가 말했다. 기분 좋게 웃고 있는 현서 곁에 앉아 있던 도하는 그녀의 옆에 누웠다.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그는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현서는 아까보다 훨씬 또랑또랑해진 눈동자로 도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럼 우리 뜨밤도 보낼 수 있는 거야?”

“네?”

현서는 갑자기 전개되는 방향이 바뀌자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예뻐, 이현서.”

아내를 내려다보고 있던 도하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콧등을 슬쩍 쓸어내리며 내뱉었다.

남편이 던진 달콤한 말에 현서는 해제된 듯이 웃고 말았다.


“웃으면 더 예뻐.”

“하하…….”

능청스러운 말투에 진심이 묻어나고 있다는 걸 현서는 알 수 있었다. 행복감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른다.


“너무 예뻐, 내 여자.”

그가 말하는 내 여자라는 말이 듣기 좋았다. 현서는 밀려드는 행복한 감정을 이기지 못할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녀가 먼저 한 팔을 뻗어 천천히 도하의 목을 당겼다. 입술이 닿자 곧장 뜨거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현서가 그에게 말했다.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 뜨밤을 안 보낼 순 없죠, 당연히…….”

현서는 그의 귓가에 입술을 더 가까이 대며 촉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아줘요.”

도하는 그 말에 더는 인내할 수 없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돌진했다.

이후 부부의 침대는 달아올랐다. 부드럽고 간지럽게 시작된 스킨십은 점점 더 격렬해져 갔다.


 

.
.
.

격정이 휩쓸고 간 침대 위에는 사랑의 여운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와 마주 보고 있었다.


“오늘은 잘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잘 자. 너 잠들 때까지 이렇게 보고 있을게.”

“설레네요.”

“자장가 불러줄까?”

“정말?”

현서의 눈빛에 화색이 돌았다.

자장가라니. 채도하가 그런 걸 불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씩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 한 도하는 주저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Goodnight, my angel. Time to close your eyes. And save these questions for another day…….”(Billy Joel, 1993) (잘 자, 나의 천사. 눈을 감을 시간이야. 질문들은 다른 날을 위해 아껴둬.)

현서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세상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야…….”

“I think I know what you've been asking me. I think you know what I've been trying to say…….” (네가 무엇을 내게 물으려 했는지 알 것 같아. 내가 무얼 말하려 했는지 너도 알 거야.)

현서는 감성에 젖은 눈빛으로 도하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댔다.


“역시 우리 도하 오빠는 뭐든지 잘한다니까…….”

도하의 저음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불러주는 자장가는 정말 감미로웠다.


“I promised I would never leave you.” (너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역시 가사가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 현서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내려 눈을 감았다.

평온하고 평온한, 극도로 행복한 밤이었다.

***



“맛없어?”

“응? 아니에요, 맛없는 건…….”

도하는 의아한 눈으로 현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침 식사로 먹는 중이었던 수프와 샐러드와 빵 모두 맛이 훌륭했다. 그런데 현서는 영 즐기지를 못하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 시간이라도 늘 생기 있던 평소 현서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럼 입맛이 없어?”

“하……. 그러네요.”

“몸이 안 좋은가? 왜 그러지?”

도하는 금세 염려스러운 표정이 되자 도현도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보았다.


“엄마, 아파?”

“아니야, 도현아. 엄마 괜찮아.”

“컨디션 안 좋으면 연차 내고 쉬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러나 현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두 사람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화장대 앞에서 출근할 준비를 거의 마친 현서는 마지막으로 향수를 집었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칙, 하고 한번 뿌리는 순간 그녀는 미간을 확 구기고 말았다.


“정말 컨디션이 안 좋은가. 향이 왜 이렇게 어지럽지?”

몇 년째 써온 향수인데도 오늘은 좀 몸이 받지 않는 느낌이었다.


“도현아, 엄마 다녀올게.”

요즘 한창 바쁜 도하는 30분 전에 이미 출근길에 나섰고 지금은 현서만 현관을 떠나며 도현에게 손짓했다.


“응, 엄마 이따가 만나!”

도현은 등하교 도우미와 함께 서서 엄마에게 미소를 보냈다. 현서는 허리를 굽혀 도현의 머리와 뺨 등에 뽀뽀를 여러 번 한 뒤에야 문을 나섰다.

***



“대표님,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창백해 보이셔서요.”

“그래요?”

비서가 묻는 말에 현서는 제 얼굴을 괜히 한 번 쓸어내렸다.

눈에 보일 정도로 건강에 적신호라도 생겼나? 사내 건강 검진이 언제지?


“요즘 무리하셨죠. 당분간 쉬엄쉬엄 가셔요.”

“그러게요. 마침 거의 점심 시간 다 되었네요. 마무리하고 나갈까요?”

“예, 대표님.”

연구소장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서로 바쁜 사람들이라 점심도 함께하면서 대화를 하고자 했다.

약속 장소는 어느 고급 중식 레스토랑이었다. 과장과 팀장까지 네 명이 앉아 있었다.

코스요리의 첫 번째 메뉴가 나오기 시작했다. 먹음직스럽게 담긴 유린기가 올려지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을 빛내며 젓가락을 들었다.

현서 역시 젓가락을 들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문득 움찔하던 그녀는 황급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으로 코를 막았다.

미처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요리를 덜어 먹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흡족한 표정으로 맛을 음미하는 얼굴들이었다.


“대표님, 어서 드세요. 이 집 정말 맛있네요.”

“그래요?”

현서는 못 이기는 척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나 몇 번 씹지 않아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흡!”

모두 놀라 쳐다보는 가운데 그녀는 결국 냅킨 여러 장을 들고 일어서서 화장실로 직행했다. 가는 길에 냅킨 위에 입안에 있던 음식을 뱉었고 화장실로 들어간 뒤에는 물로 입안을 헹구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자신이 보기에도 안색이 창백하긴 했다.


“속이 안 좋나…….”

중얼거리는 사이 현서보다 한 살 적은 여자 과장인 이 과장이 화장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아, 네네. 괜찮아요. 미안해요. 맛있게들 먹고 있는데 나 때문에……. 얼른 가서 들어요.”

현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 과장은 물끄러미 현서를 바라보았고 돌연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혹시 셋째 소식 있는 건 아니세요?”

그 질문이 엉뚱하게 여겨져 피식 웃으며 별 대수롭지 않게 에이, 설마, 라고 대꾸하려던 현서는 잠시 벙해졌다.

설마라고 하기엔 채도하……. 좀 많이 들이대긴 했지.

몇 년이나 헤어져 지낼 때 도 닦느라 고생했겠다 싶을 만큼 뜨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말이지 그때 못 한 걸 다 채우기라도 할 속셈인가 싶었다.


“…….”

현서가 멍하게 있자 이 과장이 입을 떡 벌렸다.


“뭐예요, 대표님! 진짜예요?”

“아, 아니? 아니에요! 그런 소식이 있다는 건 아니고.”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는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집에 가서 확인해봐야겠다고 현서는 생각했다.

***

집에 가기까지 기다리기에도 심히 신경이 쓰여서 직원들을 먼저 올려보내고는 편의점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다.


“왜 이렇게 떨리지? 임테기가 처음도 아닌데…….”

현서는 성격 급한 사람처럼 사옥의 1층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옷을 다 추스린 현서는 테스트기에서 눈을 계속 뗄 수가 없었다.

요즘 회사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생리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예정일이 열흘이나 지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가 잠시.

떨리는 눈동자로 임신 테스트기를 응시하고 있던 현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조선 옆에 붉은 선이 하나 더 나타나고 있었다.


“아……. 어엇…….”

진한 두 줄이었다. 그 두 줄을 보는 순간 울컥, 뭉클함이 덮쳐왔다.

아기였다. 아기의 증거인 붉은 줄이 보이고 있었다. 아기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서의 눈에는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 언제 또 우리 아기가 왔지?

바라던 사랑, 바라던 일, 바라던 남자, 바라던 삶. 그녀가 바라던 모든 것이 곁에 머물고 있는 지금, 그녀는 최고로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행복한 때에 또 하나의 행복이 찾아왔다. 행복한 시절에 만난 아기 소식이기에 더욱 감격에 목이 메었다.


“반갑다, 또 하나의 내 아가…….”

첫 임신은 스물다섯 때였다. 설렜지만 어려서 두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한 기분이었다,

둘째 때는 슬픔에 젖은 채 맞아 안타깝고 미안했고 맘껏 기뻐해 주지 못해 더더욱 미안한 마음이었다.

세 번째인 지금, 이제는 오롯이 기뻐해 줄 수가 있었다. 그 사실이 더욱 그녀를 행복감에 흠뻑 젖어 들게 했다.

그녀는 울며 웃고 있었다.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번에도 입덧은 참 빠르기도 하지.”

정신없이 살며 자꾸 생리도 잊다가 끝내 입덧으로 알게 되는 임신.

그나저나 언제 생긴 걸까?

현서는 생리 예정일을 짚어가며 날짜를 대략 따져보았다. 요즘 비교적 생리 주기가 규칙적인 편이었기에 가능했다.

아아, 아마 그날일 거야.

도하가 친절히 목욕시켜주었던 그날. 몽글몽글하고 달콤했던 그날이었다.

유난히 행복했던 그날에 엄마 아빠에게 더한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