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4 사랑할 수 있는 네가 있어서
(87/92)
특별 외전 4 사랑할 수 있는 네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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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4 사랑할 수 있는 네가 있어서
2023.01.30.
하지만 해외에 나가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유럽 곳곳에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지내는 어느 곳에서든 술병이 나뒹굴었다.
먹어도 음식은 맛을 잃었고, 보고 있어도 눈에 보이는 것들은 빛을 잃었다. 무엇에도 감흥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하루는 유난히 깊고 깊은 늪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우스운 건 거기서 나오고 싶지가 않았다.
그저 계속 늪 속에 빠져 그렇게 슬퍼하고 싶었다.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
일어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죽으면 슬픔은 없을 테니까.
‘오빠.’
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밝게 웃던 예전의 모습이었다.
미안해, 현서야.
깨우지 말아 줘. 더는 내게 일어나라고 하지 마.
내가 깨어나도 너와 도현이에게 다가갈 수가 없는데.
“오빠!”
일순 도하는 눈을 번쩍 떴다.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눈동자를 돌려보니 옆에서 현서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빠, 괜찮아요?”
도하는 멍한 눈으로 현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안 좋은 꿈 꿨어요? 힘들어 보여서…….”
“…….”
기나긴 악몽 속에서 허우적대가 깨어난 것 같았다.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었다.
현서의 청아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도하는 그녀를 제 품 속으로 휙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현서는 다 안다는 듯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순순히 기대었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를 차분한 손길로 토닥거렸다.
현서의 온기가 몸에 전해져오자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아무도 없는 시꺼먼 늪 속에 빠져들어 익사할 것 같던 그 느낌이 현실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현서의 맑은 눈망울과 상냥하게 그를 토닥이는 이 손길이 현실이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 행복을 다시 찾아서.
“현서야…….”
“응.”
“네가 아니었으면 난 제대로 된 인간이 되지 못했을 것 같아.”
“설마요.”
“너에게 받은 사랑 덕분에 나도 이렇게 너랑 도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인간이 된 것 같아.”
그 말에 현서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났다. 세상 시름을 잊게 하는 청량한 미소였다.
도하가 그녀에게 물었다.
“현서야. 행복해?”
이제는 감히 물을 수 있었다. 그녀가 대답해줄 것 같아서.
“응. 나는 요즘 오빠 덕분에 매일매일 행복해요.”
도하는 손을 들어 현서의 뺨을 쓸었다. 그리고 현서를 닮은 미소를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사랑할 수 있는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다시 부부. 두 번째 결혼 생활.
행복에 확신이 있는, 즐거움에 겨운 나날들이었다.
***
“우와! 아빠가 오늘 일찍 왔다!”
“응. 오늘은 일찍 올 수 있었어.”
“아빠! 나랑 놀아줘요!”
“그럴까? 그럼 저녁 먹기 전까지 아빠랑 정원에서 놀자!”
“예에에!”
도현이 환호를 내질렀다.
“아빠 옷만 갈아입고 나가자.”
도하는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수납장을 열어 전에 사두었던 물건들을 꺼냈다.
“아빠는 전부터 도현이랑 함께 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아들이 태어난다면 함께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상투적이지만 캐치볼도 그중 하나였다.
집은 크게 개조되었다. 한때 도하의 집이었던 옆집까지 이제는 한 집이 되어 있었다.
옆집 사는 사이였던 여자와 남자가 하나가 되었듯이 두 사람의 옛집도 하나가 되었다.
담을 부수고 도하가 살던 집을 허물어서 도현이 놀기 좋도록 뜰을 넓혔다.
잔디를 깔고 주변을 화단으로 만들어 알록달록 꽃들을 심자 예쁜 정원이 되었다.
“아빠! 나한테 공 던져봐요!”
“알았어. 도현아, 아빠가 천천히 던질게, 한번 잘 잡아봐!”
“응!”
도현은 도하를 닮았는지 운동신경이 좋았다. 금세 터득하여 공을 잡고 또 던졌다.
“우리 도현이, 금방 배우네?”
“아빠랑 노니까 진짜 재밌다!”
도하는 요즘 틈이 나는 대로 이 작은 정원에서 도현과 함께 놀았다.
예전에는 골프 약속도 많았지만 이제는 확 줄었다. 주말에는 대부분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평일에도 지나치게 일을 늘리려 하지 않았다.
.
.
.
컴컴한 거실은 조용했다. 도현이 방금 잠들자 도하는 거실로 나와서 혼자 소파에 앉았다.
“현서가 많이 늦네…….”
요즘 SH에 일이 많다. 바쁘긴 해도 순조로운 모양이었다. 현서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운영을 잘해주고 있었다.
생각하니 흐뭇해서 잔잔히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전화기 진동이 울려서 보니 마침 현서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이제 끝났어?”
-네. 너무 늦었죠. 오빠는 오늘 모처럼 일찍 퇴근했는데 같이 저녁 식사도 못 했네…….
도하도 요새 일이 많은데 오늘은 저녁 일정이 거래처 사정으로 취소되어 일찍 왔더랬다.
“도현이가 아빠 일찍 와서 좋았대. 너 너무 피곤하겠다.”
-지금 운전 중이에요. 15분이면 도착할 거예요.
“그래, 조심히 와.”
전화를 끊고 난 도하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15분 후 삑삑 버튼 눌리는 소리가 났고, 도어락이 풀렸다.
도하는 현관 앞으로 가서 퇴근하는 아내를 맞았다.
“어서 와.”
아내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웃어주었다.
“도현이는 자요?”
“응. 30분 전에 잠들었어.”
“수고했어요.”
터덜터덜 들어온 현서는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가방만 대충 화장대에 올려두고 침대 위로 엎어져 너부러졌다.
“아아……. 피곤하다. 하루가 너무 길었어.”
“고생했어.”
“그래도 오늘 알찬 하루였어요. 공들이던 거래도 텄으니까.”
“그러게. 주말에 축하 파티하자.”
안 그래도 낮에 현서에게서 소식을 전해 듣고 도하가 더 기뻐했었다. 비록 현서에게 넘겼지만 그가 만든 브랜드였으니 여전히 다른 어떤 것보다 애정이 있었다.
현서는 침대에 눌어붙은 채로 눈을 감고 헤실거리며 웃었다.
“나 잘하고 있죠?”
“완전. 우리 이 대표님이 나보다 더 SH를 잘 이끌고 있지.”
현서는 좋아서 작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아……. 오늘은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네요.”
“어서 자.”
“씻고 자야 하는데.”
“내가 씻겨줄게.”
“와우, 친절하셔라.”
현서는 가볍게 받아쳤지만 도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물 받아놨어.”
“정말요?”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던 현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하는 엎어져 있던 현서를 뒤집고는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맨 위에서부터 풀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며 그를 올려다보던 현서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왠지 몽글몽글했다. 조금은 야릇한 거 같기도 하고.
채도하, 이 사람 이러다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겠지?
가만히 내버려 두는 사이 상의와 하의가 다 벗겨졌다. 그러자 도하는 두 팔을 현서의 어깨와 다리 사이에 넣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더니 정말 욕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지긋한 눈길을 보며 현서도 씩 웃었다.
욕실 문이 열려서 보니 하얀 김이 부옇게 차 있는 욕실 내부가 보였다. 도하는 욕조에 현서를 걸터앉히고 남은 옷가지들까지 벗는 걸 도와주었다.
현서가 아이처럼 웃는 사이 다시 한번 도하가 그녀를 안아 들고 거품이 가득한 욕조 안에 천천히 넣었다.
따뜻한 물속에 몸이 잠기자 현서는 기분이 좋았다.
“아……. 따끈하다. 온몸이 다 녹는 것 같아.”
“너 피곤하니까 가만히 누워만 있어. 내가 다 씻겨줄게,”
“정말 그래 줄 거예요?”
“응. 맡겨둬.”
현서는 그 말을 믿고 몸을 뒤로 젖히며 기댔다.
눈을 감자 도하가 그녀의 팔부터 들어 샤워볼로 부드럽게 문질러 주는 게 느껴졌다. 은근히 시원하고 좋았다.
남편이 씻겨주는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씻겨주고 있었다. 젠틀한 손길이었지만 구석구석 야무지게도 닦아주었다.
“이제 머리 감겨줄게.”
몸을 씻겨준 다음에는 샤워기에서 솨아아 물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머리칼에 온수가 닿기 시작했다.
“온도 괜찮아?”
세심하게 묻는 질문에 현서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머리칼에 닿는 온도는 최적의 온도였다.
“딱 기분 좋은 온도네요.”
물소리가 멈추었고 상큼한 샴푸향이 풍겨나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은 조심스러우면서도 꼼꼼하게 두피 마사지를 해주었다.
“와……. 힐링 되네.”
현서는 너무 편해서 눈도 뜨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오빠. 이런 거 왜 이렇게 잘해요?”
“마음에 들어?”
“너무 잘하는데?”
“종종 이렇게 나한테 맡겨.”
“편하다……. 나 지금 꼭 신생아가 된 기분이에요.”
귓가에서는 도하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부서졌다. 욕실을 울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좋은 음악처럼 기분 좋게 들렸다.
현서는 노곤했던 온몸이 녹실녹실하게 풀려가는 걸 느꼈다.
도하는 현서의 머리칼을 물로 헹구어주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은은하게 미소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던 그는 얼굴을 내려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현서의 입가가 더욱 올라갔다.
욕조 위에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아내는 오늘도 매우 아름다웠다. 이렇게 도현이 잠든 시간 부부가 오붓하게 있다 보면 도하는 유독 아내가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럴 때면 그녀를 깊이 안고 싶어지기도 한다. 오늘 밤도 아내가 피곤해하지만 않았다면 하나가 되고 싶은데, 지금의 상태를 보니 아무래도 오늘은 무리인 것 같다.
혼자서 잠시 엉큼한 생각을 하다가 만 도하는 욕조 속에 손을 넣어 물을 뺐다. 마지막으로 샤워기로 현서의 몸을 헹구어준 그는 커다란 수건으로 몸과 머리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나가서 춥지 않게 또 다른 커다란 마른 수건으로 현서의 몸을 감싼 도하는 그녀를 또 안아 들고 일어섰다. 현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안방으로 돌아온 도하는 수건에 말려 있는 현서를 그대로 화장대 앞 의자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헤어 드라이어를 잡고 머리칼을 말려주었다.
머리를 다 말린 뒤에는 현서를 침대 위에 눕혀두고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와 입혀주었다.
“풀 서비스네요.”
“그럼, 당연하지. 이왕 하는 거 끝까지 잘 모셔야지.”
“오늘 정말 좋은 하루네요. 원하던 계약도 성공했고 이렇게 남편이 주는 힐링 타임으로 마무리되기까지 완벽한 하루예요.”
도하는 품 안의 아내를 내려다보다가 생각했다. 속엣말이 절로 나왔지만 차마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뜨밤까지 보내야 더 완벽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