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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3 현실 (86/92)


특별 외전 3 현실
2023.01.26.


현서의 집에는 기분 좋게 하는 것들이 늘 있었다. 첫날의 동그랑땡처럼.

뚝뚝한 자신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진으로 다가오던 이현서를 보며 어느새 그 역시 가끔은 함께 웃는 순간이 생겨나게 되었다.

때로는 현서가 귀여워서, 때로는 현서가 웃겨서, 때로는 현서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웃었다.

자주는 아니어서 현서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도 그에겐 스스로 많이 유해진 것이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산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현서는 저와는 많이 달랐다.

현서의 삶에는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것들이 전부 다 있었다. 현서의 어머니인 혜수가 자신의 엄마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종종 했다.

하지만 현서와 가족이 되는 상상은 좀처럼 되지가 않았다.

현서랑 결혼하면 가족이 된다는 혜수의 농담이 놀라웠다. 그리고 이어 현서 어떠냐고 묻는 혜수의 질문을 도하는 너무도 진지하게 들었다.

정말 현서와 결혼하면 어떨지 진지하게 떠올려본 것이다. 하지만 그 상상이 내 것 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고등학생이었던 한도하는 당시 어리기도 했지만 비단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모의 결혼도 보지 못한 그때의 그에게는 결혼이란 게 무슨 의미인지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그 평범한 일이 그에게는 평범하지가 않은 일이었던 탓이다. 그래서 그는 가벼이 던져진 농담에도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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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서는…… 제 여동생이잖아요.”

그냥 대충 혜수와 현서의 비위를 맞추는 대답을 던지면 그만이었는데 너무 진지한 얼굴로 대꾸해 버렸다.

사실 현서를 여동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도 다른 삶이어서 아무리 친해도 한 가두리 안의 삶으로 섞일 수는 없는 존재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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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이미 자신의 친모 영숙보다도 현서와 혜수 모녀와 더 가까운 유대관계가 되어버렸나 보다.

채 회장 댁으로 들어간 이후 너무 바빠서 어쩔 수 없이 얼굴을 자주 볼 수가 없었는데 그 상실감이 매우 컸다.

멀어져서 불안한 마음에 연락을 틈틈이 한다고 했는데도 결국 현서는 더 멀어져 버렸다. 왜인지 연락을 피하는 것 같았다.

채 회장의 아들이 된 자신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사는 세계가 달라져 버린 걸 인정해야 하는 걸까.

그들 모녀와의 단절은 생각 이상으로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지만, 피하는 그들을 힘들게 할 수는 없었기에 혼자서 상처를 삭여야 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들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채 회장 댁과 진성에 입성한 이후로는 온갖 시끄러운 반응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럴수록 그들이 그리웠다.

사람들이 그의 출신에 대해 수군거린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채 회장의 서자라는 꼬리표, 그의 친모 영숙에 관한 추문.

회장님의 직속 라인 낙하산인 그는 아주 뜨거운 감자였으므로 채 회장은 그가 어서 혼인을 하여 심적 안정을 갖기를 바랐다.

그렇게 친부가 결혼을 종용했을 때 도하는 하는 수 없이 결혼이 주는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와 닿지 않았던 결혼. 그에게는 결혼에 대한 관념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생각해야 할 때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에 도하는 연락도 끊겨버린 이현서를 떠올렸다. 솔직히 이현서만 생각났다.

가족이 되고 싶었지만 정말로 가족이 될 수는 없을 거라 여겼던 이현서가 자꾸만 생각났다.

현서와 결혼할 수 없다면 결혼 따위는 영영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누구와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현서와 연락이 닿지 않거나 현서가 거절하거나 하면 결혼 같은 건 그냥 하지 말아야지 하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다행히 그녀와 연락이 닿아 만날 수 있었고 크게 안도했다.

몇 년 만에 만나 다짜고짜 청혼부터 하는 남자를 그녀가 정말 받아주었을 때는 퍽 감동스러웠다.

그리고 그날 이후, 현서가 조금 달라보였다. 그가 알고 있는 이현서면서도 달랐다.

어른이 된 이현서. 어린 소녀가 아닌 여자가 된 이현서.

그러니까 그녀는 한창 아름다움이 무르익어가는 여자였다. 더구나 이제는 곧 아내가 될 이현서.

그때부터 종종 그녀를 안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충동이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닌 것도 같았다. 어쩌면 전부터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은 오랫동안 억눌렀을 뿐, 그녀에게 이런 은밀한 욕망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남자와 여자가 되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한 이후로 현서를 볼 때마다 온몸이 한없이 타오를 것 같았다.

이제는 내 여자가 된 현서니까 어떤 충동도 욕망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걸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녀와 육체적으로 교감하는 건 상상보다 훨씬 더 근사한 일이었다. 그녀와 몸으로 소통하는 일이 말로 소통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처럼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지도 못하면서도 그랬다. 그녀와 몸이 닿아 있는 순간에는 그녀가 정말 가깝고 완연한 내 거처럼 느껴졌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정말 좋았다. 더 일찍 그녀와 결혼했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 만큼.

그러나 결혼 생활 내내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묻지도 못했다. 혹여라도 그녀가 대답하지 못할까 봐.

자신은 이대로도 좋은데 그녀는 아닐까 봐. 자신이 애초에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놈이 못 되었던 거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늘 밝은 햇살처럼 웃고 늘 의욕적으로 삶을 대하는 그녀니까 이 결혼 생활도 만족하는 걸 거라고 믿고 싶었다.

밤마다 사랑을 나누었으니 아이는 금방 생겼다. 그렇게 서하가 태어났을 때의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식이란 존재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구나.

서하가 사랑스러울수록 제 어미 영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딸 서하에 대한 부정을 깨달을수록 저에 대한 영숙의 모정이 얼마나 부족한지도 함께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잃었다. 그것도 너무도 일찍.

미치지 않기가 어려운 시간이었다.

왜 그 행사를 참여해서. 왜 그 행사에 현서를 데려가서.

현서만 집에 있었어도. 현서가 서하와 함께 있었다면, 지금쯤 서하는 건강하게 살아 있을 텐데.

모든 게 다 자신의 탓 같았다. 그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한동안 꿈속에서 서하가 정말 자주 나왔다. 꿈속에서는 아이가 살아서 아빠를 부르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빠를 안아주었다.

그러다 깨어났을 때 아이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현실이 더욱 지옥 같았다. 다시 잠들어 꿈을 꾸고 싶어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현서의 고통을 어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엄격한 진성가의 맏며느리로 살면서도 늘 햇살처럼 웃고 밝았던 현서의 모습은 당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현서는 처절하게 무너져갔다. 열 살 소녀로 처음 만났던 이래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이현서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딸을 잃고 그토록 세상에 없도록 따스했던 친정엄마도 잃었다.

아이를 사랑하고 남편을 바라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던 현서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내 집 안에서 늘 하던 일을 성실히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꼭 생기가 없는 기계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더이상 남편을 바라봐주지 않았다. 아이의 부재로 인해 부부가 좌절에 빠져있는 와중에 도하는 차가워진 현서를 보며 더욱 불안했다.

그에게 단 한 번도 호의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현서가 변해버린 모습에 위태로움을 느꼈다. 그는 두려웠던 것 같다.

그녀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일 때문에 지방에 가서 이 사달이 났으니 그를 원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만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미움받느니 차라리 시간을 갖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는 시간이었다.

이혼 후 가장 크게 밀려든 감정은 이현서라는 여자에 대한 사랑 감정이었다. 너무 늦어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참으로 우습게도.

그는 결혼 생활이 파경을 맞도록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사라져버린 시간이 무려 3년이나 지속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옅어지기는커녕 더 또렷해지는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끝났다 하는데 그는 새로이 시작하고 있었다. 결론은 하나였으니 다시 만나면 오로지 그녀를 향해 직진만 해야지, 마음먹으며 고통의 시간을 견뎠다.

기적처럼 현서를 다시 만났을 때는 하늘이 그를 아직 돕는다고 여겼지만 짝사랑의 고통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도현이. 보물처럼 찾아온 줄도 모르고 있던 또 하나의 내 아이.

아이의 존재마저 알게 되니 채도하는 세상 무엇도 두려울 게 없었다. 현서와 도현밖에는 보이지 않는 불도저처럼 어떻게든 다시금 한 가정이 되어보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태어나 이보다 더 의욕이 넘칠 수는 없다고 여길 만큼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을 때쯤, 그 모든 의욕이 꺾여버리고 말았다.

서하의 죽음에 알지 못했던 내막이 있었을 줄은. 그것도 아주 잔인한 내막이.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주고자 했던 여자에게 채도하란 남자는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저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남자가 자신이었다.

그랬으니 현서와 아이를 찾기 위한 노력 같은 건 더이상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최대한 그들의 인생에서 멀어지는 게 그들을 돕는 일이었다.

가장 함께하고픈 두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자가 자신이라니.

서하를 잃었을 때의 슬픔을 도현을 얻은 기쁨으로 견디려 했었다. 그런데 그 기쁨은 감히 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인생에서 기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서하를 보내고도 현서와 도현을 위해 일어서려 했던 그는 그럴 필요를 상실하고는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정말 철저히 혼자가 된 만신창이였다. 숨만 붙어 있을 뿐, 산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술은 많이 마셨지만 다른 건 잘 먹지 않아 체중이 줄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회사 사람들도 그를 보며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빠른 정리를 위해 그 꼴로도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홀연히 떠났다. 서하가 좀 크면 함께 여행하기로 했던 유럽에 가장 먼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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