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2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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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2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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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2 꿈
2023.01.23.
아이의 목소리를 도하도 들을 수 있었다. 그 함성이 기폭제가 되어 도하는 발에 부스터를 달았다.
그리고 결승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결국 도하는 유준의 아빠도 따돌릴 수 있었다.
“와아아아! 우리 아빠가 1등이다! 우리 아빠 최고!”
마지막 대미는 도하의 드라마틱한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야! 김유준! 봤지? 우리 아빠가 1등이다!”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강조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도현은 유준 앞에서 의기양양했다. 유준은 억울한 얼굴로 내내 씩씩댔다.
종합 점수로도 도현의 팀의 승리였다. 그날의 MVP상도 있었는데 마지막 인간 부스터의 인상적인 모습 덕에 도하가 받았다.
선물을 한가득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 식구는 레스토랑에 들러 기분 좋게 외식을 하며 하루를 기념했다.
“엄마! 아빠 운동 진짜 잘하는 거 같아!”
도현은 좀처럼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높아져서 계속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나 아빠 없다고 놀렸던 유준이 아빠 이겨서 너무 좋아!”
“그렇게 좋아?”
도하가 커다란 손으로 도현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물었다.
“응! 아빠 다음 운동회에도 꼭 나와야 해요!”
벌써부터 1년을 앞서가는 도현을 보며 현서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내년 일까지 약속받는 거야?”
“다음에도 아빠가 또 1등 많이 했으면 좋겠어.”
현서는 도현이 귀여워서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큰 기대를 할까 봐 지레 짚고 넘어가려 했다.
“그렇지만 도현아. 아빠는 내년에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몰라. 엄마가 전에 말해줬잖아. 도현이 아빠는 다른 평범한 아빠들이랑 좀 다른 일을 한다고. 시간을 쉽게 뺄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괜찮아, 현서야. 적어도 우리 도현이한테는 그냥 평범한 아빠가 되어주고 싶어.”
도하는 너무 쉽게 그런 말을 던졌다. 현서는 그 말에 마음이 울려 잠시 말문이 막혀 있었다.
“그래 줄 수 있겠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줄 거야.”
서하가 떠나고 얼마나 많은 후회와 미련이 남았는지 모른다. 그토록 짧은 삶을 살다간 딸아이에게 못다 해준 것들만 생각났다.
좀 더 함께해줄걸, 그때도 이때도…….
그런 바보 같은 생각들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현서는 뭉클해진 기분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도현이한테 아빠가 생기니까 너무 좋네요.”
***
아비 없는 놈. 근본도 모르는 놈.
엄마의 성을 가지고 산다는 건 주변의 피곤한 시선 또한 감내해야만 하는 삶을 의미했다.
엄마는 늘 네 아빠는 대기업 회장님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믿지 않아 코웃음만 쳤고, 도하 역시 친부를 본 적도 없었으므로 어미의 말을 순순히 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채도하에게 이현서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이현서는 빛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시절부터도 그녀는 빛이었을 것이다.
태생부터 암울했던 그의 삶을 비추어 길을 보여주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있도록 그를 이끌어왔던 빛이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인생은 이현서를 알기 전과 알고 난 후로 나눌 수 있었다.
일생 중 처음 고독을 느꼈던 때가 언제였을까. 아마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릴 적일 것이다.
그래서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는 유년 시절 기억 속 도하는 대부분 고독했다.
그날도 알람이 울렸다. 도하는 또 혼자서 눈을 떴다.
엄마가 깨우는 소리가 아닌 알람 소리에 잠을 깨는 건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집 안이 온통 조용했다. 기척이 없는 걸 보면 저 혼자 있거나 아니면 엄마가 자고 있거나 둘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도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껌뻑이며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에 가보았다. 역시 어제 모습 그대로였다. 난장판인 방의 꼴이 그대로.
밤늦게 들어온다던 엄마는 결국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상황이 좋을 리는 없었으니까. 열이면 열 다 싫었으니까.
엄마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왜 또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알기가 두렵다는 게 더 가까웠지만. 언제 한 번은 엄마 대신 어떤 남자가 전화를 받아서 당황한 적도 있었고.
어차피 이런 아침 시간에는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했다.
학교 가기 전에 무어라도 먹기 위해 부엌으로 발길을 돌렸다.
밥솥에 밥이 남아 있을 것이다. 3일 전에 스스로 밥을 지어두었었다.
엄마가 거의 들어오지 않아 혼자서만 먹다 보니 천천히 줄어들곤 한다. 보온 밥솥에 오래 있을수록 밥은 점점 맛없어져 갔다.
이제 더 적은 양의 밥을 지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밥솥을 열려 할 때,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의 진동이 울렸다.
엄만가?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전화기 화면을 보았다. 그러나 이내 일말의 기대감은 바스러졌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을 뿐이었다.
누구지?
실망스러운 내색을 숨기지도 못하던 어린 소년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명랑한 목소리에 소년은 눈썹을 슬쩍 올렸다.
-나 옆집 현서야.
“아…….”
아, 옆집에 이사 온 그 애 엄마의 번호였구나.
어제 그 애의 첫 등하교를 도와주었을 때 그 애 엄마가 전화번호를 물었었다.
자신의 번호를 받은 직후 그분이 전화를 걸어 번호를 남겨주었었지만 곧바로 저장하려다가 손을 주춤했었다.
옆집이라고 적으려던 손은 망설이다가 그만두었다. 그래 봐야 뭐 얼마나 걸 일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인 오늘, 그것도 그분의 딸이 엄마 전화기로 이렇게 전화를 건 것이다.
-오빠, 혹시 자고 있었어? 엄마가 지금 반찬 가져다줘도 괜찮냐고 하시는데.
“지금 일어났어. 그럼 10분만 있다가 와줄래?”
-응!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도 도하는 혼자서 어색함에 젖어 있었다,
몇 번 얼굴도 못 봤는데 반찬을 가져다주신다니. 어색하다 못해 불편한 감도 있었지만, 왜인지 거절하게 되진 않았다.
10분을 벌어둔 건 빠르게 씻고 나서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서둘러 욕실에 가서 물을 맞던 도하는 현서라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엄마를 따라 떡을 들고서 이 집에 찾아온 여자애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도.
그때 여자애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그 애는 퍽 인상적이었다.
새까만 눈망울도 인상적이었고 그 까만 눈망울이 그를 내내 올려다보고 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 모든 걸 인상적이게 해주었던 건 무엇보다도 그 애의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였던 것 같다.
유난히 밝은 표정 덕이었다. 그래서 그를 보던 눈빛에도 온기가 어려 있었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서도 호의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덕에 그 짧은 첫 만남이 이렇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어제 등하교를 함께할 때도 이 동네와 학교를 잘 아는 도하보다 이 모든 게 낯설 아이가 훨씬 더 많은 말을 했다.
계속 그 특유의 밝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면서 재잘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하는 그 애의 그런 밝은 얼굴을 오래 볼 수가 없었다.
연신 그를 쳐다보던 그 애의 맑은 목소리만 귓가에서 울렸을 뿐, 도하는 앞만 보고 걸었다.
아마도 처음 보는 것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 밝음이나 맑음이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것이어서.
방금 그 애의 전화 목소리도 끝까지 경쾌한 목소리였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가 옷을 입고 기다리자 곧 초인종이 울렸다.
막상 볼 생각을 하니 더 서먹해진 기분에 휩싸였지만 문을 열어주었다.
“오빠, 안녕?”
“도하 잘 잤니?”
문밖에는 서먹함이란 전혀 모르는 듯한 표정의 두 사람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네.”
모녀의 밝은 미소에도 도하는 굳어진 얼굴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불편하고 어색했다.
지나치게 스스럼없고 호의적인 옆집 아줌마도 그랬지만 저런 분에게 자란 딸은 특히 더 불편했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도 괴리감을 느꼈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신과는 너무도 다르게 자랐을 그 아이에게서.
“엄마 계시니?”
“아니요…….”
“안 계셔?”
“네.”
아이가 있는 집에 이른 아침부터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건 부끄럽기도 해서 더욱이 불편했다.
“음……. 그럼 도하야. 이건 넣어두고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아침 먹자.”
“…….”
집으로 초대하기까지 하니 서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도 도하는 또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구랑 가까이 어울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결국 얼떨결에 책가방을 챙겨가지고 따라나섰다.
옆집에 들어선 도하는 평소 남에게 관심 없던 그답지 않게 집 안을 은근히 둘러보았다.
전에 살던 사람은 초대한 적이 없어서 옆집은 외관만 잘 알았지 내부는 처음 보는 곳이었다.
창가마다 화분이 많이 있어서 초록이 많이 보이는 집이었다. 따뜻한 색의 커튼과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주인을 꼭 닮은 것처럼 보였다.
“어서 먹자, 도하야. 현서야, 오빠 수저 챙겨줘.”
“네! 오빠, 앉아.”
현서가 안내해준 대로 앉은 도하는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미역국이 올려지고 있었다.
보기에도 정갈하고 예쁘게 생긴 찬들은 깔끔한 그릇 위에 담겨 있었다.
“오빠, 우리 엄마 이거 진짜 잘하셔. 먹어 봐.”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현서가 찬 그릇 하나를 그에게 가까이 밀어주며 말했다. 거기에는 노릇노릇한 동그랑땡이 담겨 있었다.
해맑게 권하는 현서의 눈빛을 바라보다가 눈을 내린 도하는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들어 동그랑땡을 하나 집었다. 한 입 깨물었더니 따끈한 육즙이 터져 나왔다.
“맛있지, 오빠?”
현서의 물음에 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동그랑땡이었다.
“응…….”
“오빠 많이 먹어.”
해사하게 웃는 현서의 모습도 입안의 동그랑땡의 맛도 가슴을 간질거리게 했다. 낯설어서 불편한 듯한데도 거부하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의 연속이었다.
옆집 모녀는 그렇게 도하의 삶에 스스럼없이 발을 들였다. 그들이 스며들며 그의 무채색 같던 인생에도 하나씩 색이 입혀져 갔다.
하나하나 다채로운 색이 쌓이고 쌓여 여러 가지 추억들을 남겨주었다. 좋은 기억은 전부 현서와 함께한 것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물론 누구에게도 곁을 줘본 적은 없었던 도하였기에 아이치고 쉽게 마음을 열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 불편하고 어색했던 것들에 길들여지기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