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1 미니 올림픽
(84/92)
특별 외전 1 미니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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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외전 1 미니 올림픽
2023.01.19.
“다음 달에 도현이 운동회 있네.”
저녁 식사 시간에 유치원의 공지를 보던 현서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파스타를 호로록 먹던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맞아. 우리 유치원 미니 올림픽 해!”
파스타 면발을 포크로 돌리던 도하는 손을 멈추고 현서와 도현을 보았다.
현서는 도현을 잠시 곰곰이 바라보다가 핸드폰으로 빠르게 스케쥴을 확인했다.
“도현아, 엄마가 올해도 어떻게든 시간 내볼게.”
“응!”
도현은 기쁘게 대답하더니 곧 도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빠는?”
해맑은 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를 보고 현서가 조금 민망해하며 달래려 했다.
“도현아, 아빠는 요즘 너무 바빠서―”
“―우리 도현이 운동회인데 아빠도 당연히 가야지.”
그런데 도하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아, 정말?”
도현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지만 현서는 영 미심쩍은 얼굴로 도하에게 속삭였다.
“괜찮겠어요? 지키기 어려우면 지금 약속 안 해도 돼요, 오빠.”
“꼭 가야지. 올해는 우리 도현이랑 운동회에서 좋은 추억 만들어야지.”
도하가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둘의 대화를 들은 도현은 한술 더 떠 어리광을 부렸다.
“아빠 꼭 와야 해요! 다섯 살 때는 나만 아빠가 운동회 안 와서 슬펐단 말이야.”
그때를 떠올리며 정말로 슬픈 듯한 표정으로 도현이 말하자 도하의 얼굴에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비쳤다.
그 표정을 살핀 현서가 얼른 끼어들었다.
“에이, 도현아, 무슨 너만 아빠가 안 와. 너 말고도 아빠 안 온 아이들 좀 있긴 했지.”
“아니야! 없었어!”
아빠가 참석한 아이들이 많아 부러웠는지 그러지 않았던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잘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다.
“미안해, 도현아. 아빠는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야.”
“정말? 아빠 꼭 약속하는 거예요?”
“응. 약속할게.”
화기애애한 부자의 곁에서 현서만 염려스러운 얼굴로 중얼대고 있었다.
“못 오면 어쩌려고…….”
도하가 요새 엄청 바쁘기 때문이다. 그가 복귀한 이래 채 회장님께서 이제는 정말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에게 일을 넘기고 계셨다.
“걱정하지 마, 현서야. 하루쯤 회사 안 간다고 지구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어머, 정말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내일은 없을 것처럼 일하던 채도하 맞아요? 언제 이렇게 변했지?”
현서는 새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웃고 말았다. 도하도 그 말은 부정할 수가 없어서 멋쩍게 웃어넘기기만 했다.
“아빠, 유준이 아빠 운동 진짜 잘해!”
도현은 벌써부터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유준이 아빠? 음……. 요주의 인물이군. 잘 견제해야겠어.”
아이의 말에 도하도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두 남자의 얼굴을 보던 현서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거렸다.
“둘이 똑같네. 하긴. 도현이 승부욕이 누굴 닮았겠어.”
도하는 아내의 말에 자잘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옆에 앉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도현이 물었다.
“아빠! 아빠는 운동 잘해요?”
도하는 아이의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씩 입가를 올렸다.
“도현아. 아빠가…… 운동을 좀 잘해.”
“와아, 진짜?”
눈이 휘둥그레진 도현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현서가 옆에서 쿡쿡 웃으며 거들었다.
“진짜야, 도현아. 아빠는 어릴 적부터 늘 운동을 잘했어. 아무래도 아빠는 못 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정말? 아빠! 그럼 아빠 달리기도 잘해?”
그 말에 도하의 입꼬리가 또 한 번 씩 올라갔다.
“도현아……. 아빠가 달리기는 특히 잘해…….”
“우와! 신난다!”
도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현이 외쳤다. 현서는 따라 웃다가 내심 걱정도 되어 은근히 아이에게 말했다.
“도현아, 아빠가 꼭 1등 하지 않더라도 실망하면 안 돼?”
“응, 걱정하지 마, 엄마. 나는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아. 열심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댔어.”
“오, 우리 도현이 멋지다!”
과연 그 말처럼 실망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의 똘똘한 말이 귀여워 현서는 그 뺨에 입을 맞추었다.
***
대망의 미니 올림픽 날이 왔다. 널따란 야외 운동장에서 이루어진 대회였다.
날씨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시끌시끌 떠들고 있었다.
“아빠! 쟤가 유준이야.”
도현이 손가락으로 한 아이를 가리키며 도하에게 속삭였다. 도하는 도현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아, 저 아이야?”
그 아이 곁에는 오늘도 아빠가 서 있었다. 도하는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탄탄한 몸을 보니 과연 운동 꽤나 할 것처럼 보이는 인상이긴 했다.
“흠……. 마침 우리랑 다른 팀이네.”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도하에게 도현이 투덜거리면서 고자질을 늘어놓았다.
“쟤가 다섯 살 때 나보고 아빠도 없는 애라고 놀렸어. 자기 아빠는 달리기 1등 했다고 자랑하면서.”
아이가 하는 말인데도 막상 그런 말을 듣자 도하는 생각보다 울컥, 하고 감정이 솟구쳤다.
“치, 쟤는 나보다 달리기도 느리면서 아빠 자랑만 했어.”
“그랬어?”
“응. 오늘도 난 쟤를 이길 거야!”
“이기는 것보다 열심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응. 알아. 그래도 이기고도 싶어.”
결의를 다지는 아이를 보며 도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곁에 함께 서 있던 현서는 아빠와 아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도현의 말대로 작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도하가 그렇게 다 버리고 해외로 떠난 뒤여서 앞으로도 볼 수 없을 줄 알고 어찌나 쓸쓸했던가.
그런데 이렇게 셋이 함께 와 있는 모습이라니.
바쁜 일정을 다 제치고 하루를 비워둔 도하는 평범한 여느 아이들의 아빠처럼 아이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현서는 그 모습에 새삼 감격이 차올랐다.
그리고 저 평범할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도 다소 튀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도하에게 시선이 꽂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단순히 작년에 안 왔다가 왔다고 해서 받을 만한 시선과는 달랐다. 특히 여자들의 시선이 많은 걸 보면 말이다.
“후…….”
뭐, 따지고 보면 현서에게도 그리 낯선 경험은 아니었다. 학창시절부터도 이랬으니까. 도하와 같이 다닐 때면 어디서든 여자들의 시선 세례를 받곤 했다.
“야! 김유준! 오늘은 우리 아빠도 왔다!”
어느새 도현은 옆줄에 서 있던 유준을 보며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유준은 조그만 눈을 들어 도현의 아빠 도하를 보았다. 그러더니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우리 아빠가 운동 더 잘하게 생겼는데?”
“우리 아빠도 잘한댔거든?”
아이 둘은 티격태격하고 부모들은 말리는 사이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두 팀으로 나뉘어서 하는 대결은 만만치 않았다.
도현의 세 식구는 초장부터 열정을 불살랐다. 그러나 도하와 현서뿐 아니라 모든 엄마·아빠들이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몸이 크고 아이들보다 뻣뻣한 아빠들의 림보 대회가 열렸다. 키가 큰 아빠에게 불리할까 봐 도현은 미리부터 걱정했다.
현서 역시 도하가 운동을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림보를 하는 건 본 적이 없었기에 내심 긴장을 하고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유연하기까지 했다.
“와아! 아빠 잘한다요!”
유준의 아빠도 덩치에 비해 꽤 유연해서 오래도록 살아남았으나 도하의 몸이 더 잘 휜 덕분에 아빠들의 림보는 도현의 팀이 이겼다.
아이들의 줄다리기는 상대팀에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아이가 있었는데 보이는 대로 힘도 장사여서 도현의 팀이 끌려가고 말았다.
실망하는 도현을 보며 다음 순서인 엄마들의 줄다리기를 할 때는 현서도 손바닥이 벌겋게 불이 나도록 당겼다.
“엄마! 파이팅!”
그렇게 현서는 젖먹던 힘을 다했고, 엄마들의 줄다리기는 도현의 바람대로 도현과 현서의 팀이 이겼다.
그리고 이어진 아빠들의 줄다리기가 가장 열띤 분위기였다.
도하는 오랜만에 뜨겁게 피가 끓는 걸 느꼈다. 이런 종류의 치열함, 정말 오랜만이었다.
결과는 도하의 리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팀의 압승이었다.
“우리가 이겼다아!”
도현은 다른 아이들보다도 유독 좋아했다. 어린이집 시절부터 이렇게 아빠가 참여한 운동회는 그동안 없었기에 더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도하는 아빠들의 경기에서는 도현에게 순조롭게 승리를 안겨주고 있었다.
그러나 온 가족 댄스 겨루기에서는 관절이 마모되도록 광란의 몸짓을 보여준 유준의 가족이 있던 상대팀이 압도적인 점수로 이기고 말았다.
“실망하지 마, 도현아. 아직 남았으니까.”
엎치락뒤치락하던 점수 덕에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다.
“응, 아빠! 우리 꼭 많이 이겨요!”
이후 아이들의 짧은 트랙 달리기가 이어졌다.
도현은 아이치고 상당히 세련된 자세로 달렸다. 저렇게 전력 질주하는 아들의 모습은 처음 본 도하는 괜스레 뿌듯해져선 입꼬리가 내내 내려오질 않았다.
“우리 도현이 잘한다!”
부부는 아이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응원을 했다. 이번에도 같은 조에 유준이가 있었다.
도현은 작년처럼 또다시 유준보다 앞서 달렸고, 그 조에서 1등으로 들어오는 데에 성공했다.
“나 1등했다아!”
“잘했어, 도현아.”
마지막 경기는 반별 아빠들의 계주였다. 아이들의 운동회인데도 막바지에 이르자 도하뿐 아니라 아빠들 모두가 전투력에 불타는 듯했다.
도하는 풀잎반 채도현이라는 커다란 이름표를 가슴에 붙인 채 대기하고 있었다. 작년만 해도 도현과 현서는 이도현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자연스레 채도현이 되었다.
도하는 마침 마지막 주자였다. 부담이 컸지만 잘만 하면 도현에게 드라마틱한 모습을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기에 도하는 매우 진지했다.
이윽고 계주가 시작되었다. 운동장을 울리는 가족들의 열띤 응원과 함께 아빠들은 열심히 달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도하와 같은 반 아빠 중 바로 앞 주자에게서 배턴을 떨어뜨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앞 주자는 서둘러 달렸지만 방금까지 2등이었던 풀잎반은 3등이 되었다. 그리고 도하에게 오기까지 그 격차는 더 벌어져 갔다.
그러나 곧 배턴을 이어받은 도하는 허투루 달리지 않았다.
“아빠! 더 빨리!”
얼마 달리지 않아 도하는 앞 주자를 따돌렸다. 막상 아빠가 누군가를 앞지르는 모습을 보니 도현은 입이 딱 벌어졌다.
“우와, 우와! 아빠! 우리 아빠 진짜 빠르다!”
그의 앞에는 유준이 아빠가 1등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리 쉽게 좁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빠! 빨리! 더 빨리! 비행기보다 더 빨리!”
도현은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러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아이가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에 현서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