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외전 6. (83/92)


#83. 외전 6.
2023.01.16.



 
오늘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주혁은 이보다 더는 좋지 못할 만큼 최고로 좋은 기분으로 집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찜찜함이 조금은 있었지만, 이렇게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잊기로 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거실로 들어서던 주혁은 거기에 쌓여 있는 캐리어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야, 누가 여행이라도 가나?

안방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주혁은 거실에 소파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혜미를 발견하고는 두 번째로 깜짝 놀랐다.


“나가!”

혜미가 현관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주혁에게 빽 소리쳤다.


“누구? 나?”

혜미의 말에 주혁이 자신을 가리키며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너, 내가 너랑 언젠가는 끝을 낼 줄 알았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쓰레기인 줄은 몰랐다.”

“뭐라고, 내가 쓰레기라고,?”

“그래, 양아치에 쓰레기.”

“이게! 무식한 게, 그러는 넌 잘났고? 나만 쓰레기라고?”

“그래, 자식도 버린 개만도 못한 자식이다.”

돈답게 돈을 쓰고 들어온 주혁은 모처럼 옛날 잘나가던 때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불현듯 쏟아지는 혜미의 말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랐다.


“아주버님이나 좋아해서 꼬리 치던 주제에, 어디서 누굴 보고 쓰레기라고 해?”

주혁이 도끼눈으로 쏘아보며 그 말을 하자 혜미는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져선 말을 얼버무렸다.


“뭐, 뭐? 너 말 다 했어? 무슨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네가 형만 보면 멜로 눈깔 되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뭐라는 거야?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마누라 가방 훔쳐서 팔아먹은 도둑놈이 뭐 잘났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어. 얼른 가방 판 돈이나 당장 내놔.”

술이 들어가 뻔뻔해진 건지 되레 자신에게 화를 내를 남편을 보며 혜미는 더욱 열이 머리를 뚫고 나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주혁은 내내 뻔뻔하기만 했다.


“그게 왜 네 가방이야?”

”그럼 그게 내 거지, 네가 들던 네 거니? 어디서 누구한테 팔고 왔는지는 몰라도, 가방 상태 S급이니까 2천은 훨씬 넘게 받았을 거 아니야. 최소 천만 원이라도 나한테 내놔. 안 내놓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신고해, 내가 내 거 가져간 건데 신고는 무슨. 증거도 없는데 어디서 지랄이야.”

“집에 CCTV 내가 다 확인했어.”

“CCTV고 지랄이고 나 돈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 그리고 그걸 무슨 천만 원이나 줘. 내가 오백도 겨우 사정해서 받았는데.”

“야아!”

주혁이 던진 말에 혜미는 눈이 뒤집혀서는 벌떡 일어났다.


“너 지금 500이라고 했냐? 아니, 진짜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그게 억대를 주고 산 가방인데 고작 오백에 팔아? 너 그러느라고 아린이 픽업도 안 가고 그 돈으로 이렇게 술 냄새 풀풀 나도록 술 처먹고 다닌 거냐? 남은 돈이라도 빨리 다 내놔!”

“돈 없어, 그까짓 오백 술 한 잔 값도 안 되는데, 그게 남았겠냐?”

“…….”

남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던 혜미는 소파 위에 도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 하하…….”

정신 나간 여자처럼 실실 웃던 그녀는 이내 극도로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너하고 진작에 안 살려고 했는데 그래도 아린이 생각해서 참았어. 등신같이 무능해졌어도 아린이 아빠니까. 내가 너네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돈 주지 말라고 했었지? 근데도 내 말 안 듣고 몰래 전재산을 맡기더니 홀랑 사기나 당하고.”

“그래도 막상 엄마한테 이자 나올 땐 너도 좋다고 했잖아.”

주혁은 혜미의 이중적인 모습을 꼬집으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혜미는 죽일 듯이 그를 째려볼 뿐이었다.


“시끄러워! 아무튼, 네 짐 다 싸놨으니까 지금 나가.”

“어, 언제까지 나가 있어?”

주혁은 하는 수 없이 가방을 챙기며 물었다. 혜미의 화가 풀릴 때까지는 잠시 피해 있긴 해야할 것 같았다.


“언제까지는, 영원히지.”

“뭐?”

“이혼하자.”

“야, 혜미야!”

주혁은 기겁을 해서 혜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혼이라니. 그게 또 무슨 말이야.”

어느새 아내 앞에 주저앉은 주혁은 절박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혜미야,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라고! 우린 아린이도 못 보고.”

“그냥 보지 말고 살자.”

“야야, 혜미야! 내가 돈 구해서 그 가방 다시 찾아올게, 응? 그럼 좀 화가 풀리겠어?”

그러나 자포자기한 혜미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이번에는 진심 같았다.


“혜미야, 응?”

“그렇게 못하겠으면 소송으로 가야지. 우리 그냥 마지막이라도 좋게 헤어지자.”

주혁은 덜컥 손이 떨려왔다. 진짜 아내와 아이마저 단절된다고 생각하니 똥줄이 탔다.


“야, 오혜미…….”

“양육비 안 줄 거면 아린이 볼 생각하지도 말고. 뭐, 무능한 네 꼴을 보니 양육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만.”

술까지 들어가 감정 기복이 심한 상태였던 주혁은 끝내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혜, 혜미야……. 사랑해. 응? 내가 너 사랑하는 거 진짜 몰라?”

“몰라. 이제 그딴 거 안 통하니까 지X하지 마. 가증스러워.”

주혁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훌쩍거렸지만, 혜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집은 위자료로 내가 가질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우리 아빠 아는 변호사 통해서 이혼 수속 밟을 거니까 연락하면 법원으로 나오기나 해.”

결국 주혁은 혜미가 싸둔 짐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노숙자가 낫겠다는 생각이 씨가 되어 오늘부터 노숙자가 될 운명이었다.

채 회장님이랑 형한테 콩고물 떨어질 때 잘할걸.

서하야……. 삼촌이 너한테 벌을 받나 보다.

주혁은 너무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가보면 알아.”

오늘 저녁은 도하가 현서의 직장 앞으로 데리러 왔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자며.

도현은 본가에서 할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단다.


“어디길래 그러지? 궁금하네요.”

오랜만에 둘만 하는 외출이라 현서는 괜스레 기분이 들뜨고 있었다.

이렇게 차를 타는 것조차 단둘이서 하는 건 얼마 만인지 모른다.

얼마 후 차가 어느 건물 안 주차장으로 들어가자 현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 본 길 같기는 한데 어디더라?”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 난 다음에도 현서는 알아차리질 못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내리는 순간 그제야 머릿속이 반짝했다.


“어, 여기는 전에…….”

현서는 금세 발그레해진 얼굴로 도하를 올려다보았다.


“상호가 바뀌었더라고.”

“그래서 몰랐네요.”

상호도 인테리어도 바뀌어 있었지만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십 대 시절 몇 년 만에 연락한 도하가 그녀 앞에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나 무려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곳이니까.

그날의 떨리고 설레던 감정은 박힌 듯이 영영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앉자.”

도하는 그때와 같은 창가 자리를 예약까지 해두었다. 현서는 내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뭐 먹을래? 그때 먹었던 안심 스테이크?”

“그럴까요? 아직도 그렇게 맛있는지.”

사실 그때는 잔뜩 긴장하고 도하만 쳐다보느라 무슨 맛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좀 더 즐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기분 좋게 들었다.

얼마 후 주문한 메뉴들이 나왔고 두 사람은 그때처럼 예쁘게 플레이팅 된 요리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네요.”

“그러게, 그날보다 더 맛있는 거 같아.”

불안했던 이십 대보다 오늘이 더 행복해서일까. 음식 맛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그렇게 메인 요리를 끝낸 뒤 그날처럼 달콤한 디저트와 커피까지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현서야, 결혼하자.”

도하는 다시 현서에게 청혼했다. 현서는 맑은 미소로 그에게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도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고마워.”

이내 도하는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케이스를 열자 거기에는 두 개의 반지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도하는 그중 작은 크기의 반지를 먼저 꺼내 현서의 손을 잡았다.

제 손을 붙잡은 손이 너무 따뜻해서 현서는 더 이 순간에 가슴이 뭉클했다. 약지에 영롱한 반지가 끼워졌을 때 현서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어지러운 인연을 돌고 돌아 다시 그와 반지를 나눠 끼는 순간이 이렇게 찾아왔다.

현서는 눈가에 눈물을 맺은 채 말없이 도하의 반지를 꺼내 그의 손에도 천천히 끼워주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한 팔로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의 넓고 따스한 어깨에 기댄 현서는 더욱 감정이 북받쳐 올라 왈칵 울고 말았다.

***

눈이 시원할 정도로 푸른 바다가 창문으로 보였다. 도하가 바라던 대로 둘만의 신혼여행지였다.

도하가 은근슬쩍 아이를 떠보니 도현은 할아버지 집에서 노는 걸 워낙 좋아해서 방학을 맞아 할아버지와 며칠 지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채 회장은 말할 것도 없이 환영했다. 그 넓은 집에서 사용인들을 제외하곤 혼자서 지내는 그는 늘 적적하고 조용한 집에서 고독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손주와의 며칠을 위해 휴가를 내겠다고 했다.

현서와 도하가 해외 여행을 하는 동안 나이가 적지 않은 채 회장과 또 나이가 어린 도현은 무리하지 않고 국내 여행을 하기로 했다.

서울 근교에 어린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여행지들이 많이 있어서 할아버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기회를 가지시겠다고 했다.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열린 창가에 서 있던 현서는 에메랄드 물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멈칫했다. 도하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탓이었다.

이내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지분거리는 숨결에 현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 언제 나가요?”

“조금만 더…… 있다가.”

“오자마자 이러고 있는 게 벌써 몇 시간째잖아요.”

“그래서 너무 좋은데?”

“하하…….”

백허그를 풀지 않고 있던 도하는 말없이 뒤에서 그녀의 얼굴을 잡아 그를 향해 조금 돌렸다. 서로가 마주 보며 시선이 얽히자 도하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금세 또 진한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귓가에는 바다에서 들려오는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고요한 풀 빌라에서 이렇게 은밀한 사랑을 나누는 것도 굉장히 낭만적이었다.

두 번째 신혼여행. 이번 여행은 첫 번째 신혼여행보다 훨씬 더 견고해진 두 사람의 인생을 향한 시작점이었다.


“많이 사랑해, 현서야.”

“나도 사랑해요.”

“네가 없으면 나도 없고 내 인생도 없어.”

두 사람은 서로의 고백을 신뢰했다. 이렇게 평생 사랑하고 또 사랑할 것이라는 서로의 약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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