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외전 2
(79/92)
79. 외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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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외전 2
2023.01.02.
혼자서 샤워를 마친 현서는 조용히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집 안이 어둡고 고요했다. 도현을 재우고 나오겠다는 도하도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현의 방으로 가서 문을 빼꼼 열어본 현서는 이내 픽 웃고 말았다.
도현의 침대 위에서 도현과 도하가 함께 잠들어 있었다.
현서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들어갔다. 스탠드의 미등이 비추고 있는 도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니, 도현보다 더 곤히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시차 때문에 한창 잠이 쏟아질 만도 했다. 오늘 도착했으니.
깨워서 편한 자리로 옮기라고 하려다가 오늘만큼은 그냥 두는 것도 괜찮다 싶었다.
아침에 도현이 일어났을 때 아빠 얼굴이 보이면 좋아할 것 같아서였다.
도현이 침대가 넓어서 다행이다.
현서는 스탠드 미등을 끄고 나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
“도현이 유치원은 유치원 차 타고 가?”
다음 날 아침 도하가 물었다. 아직 도현은 일어나지 않은 이른 시간, 도하가 먼저 깨서 나오더니 그거부터 묻는 것이었다.
“네, 차가 집 근처 공원 앞에 서요.”
“그럼 당분간 내가 배웅이랑 마중 나갈게.”
“정말요? 도현이가 너무 좋아하겠네요.”
현서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어제 본가에서 너 잠시 자리 비웠을 때 아버지랑 이야기 끝났어. 복직은 다음 달에 하기로. 그러니까 그전까지 내가 도현이 많이 챙길게.”
“다음 달 복직하기로 했군요.”
“응. 그래서 한 달 정도…… 여유가 있어. 너랑 도현이랑 같이 시간 많이 보내려고 일부러 천천히 복귀하기로 했어.”
“너무 좋네요.”
현서는 말리지 않았다. 채도하는 인생에서 이렇게 가족들과 여유를 부려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도현은 지금껏 아빠가 떨어져 살아왔다가 이제 막 아빠와 함께 살게 되었으니 이런 시간이 있다면 아주 긍정적인 적응 기간이 될 것이다.
“도현이한테 정말 좋은 시간이 되겠어요.”
“너도 아침에 좀 더 자.”
“왜요?”
“내가 너 출근 준비도 도울게.”
순순한 얼굴로 말하는 도하를 보며 현서는 매우 흥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어떻게요?”
“아침은 내가 준비할게.”
“호오, 오랜만에 오빠가 해준 음식 먹어보겠네요?”
옆집 살던 어린 시절에는 도하네 집에 놀러 갔을 때 가끔은 그가 무언가 먹을 걸 만들어준 적이 있었다.
영숙이 시도 때도 없이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주로 나가 있으니 도하 혼자서 부시럭부시럭 저만의 요리를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음, 적어도 그때보다는 실력이 늘었을 거야.”
“오, 그래요?”
“내가 미국에서 또 혼자 1년 정도는 지냈잖아.”
“그러네요. 그럼 기대할게요.”
“물론 네가 한 요리만큼 기대하면 못 쓰고…….”
“하하하…….”
현서는 미리 방어를 해두는 도하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부터 할게.”
현서는 조금 우려가 되어 주방을 흘끗 한번 보았지만 우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러고는 나름 깐깐한 얼굴로 요구했다.
“알았어요. 도현이는 간을 약하게 해야 해요.”
“그래야지.”
“부탁해요, 그럼.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요.”
“그래. 천천히 준비해.”
“알았어요. 그럼 난 씻고 옷 입고 나올게요.”
.
.
.
현서가 간단히 메이크업을 마칠 무렵, 도하는 도현의 방으로 들어갔다.
“도현아, 일어나야지?”
오늘은 일찌감치 아빠가 먼저 깨버렸으니, 어젯밤에 아빠 옆에서 자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아이가 깼을 때 이렇게라도 아빠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으음…….”
도현이 눈을 감은 채 꼼지락거렸다. 도하는 웃으며 도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도현이 눈꺼풀을 스르륵 올리며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맑게 반짝이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니 세상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
“응. 우리 도현이 졸려?”
“응…….”
“어제 목욕을 너무 열심히 했나?”
도하는 도현을 조심스레 안아 들며 말했다.
“아빠 안고 나갈까?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지, 우리 도현이 쑥쑥 크려면.”
도현은 작은 두 팔로 아빠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폭 안기는 아이의 감촉이 뭉클해서 도하는 이 순간이 너무도 달콤했다.
도현이 아빠에게 안긴 채 방에서 나오고 있자 그 모습을 본 현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도현이가 아빠 앞에서는 아기가 되네.”
“준비 다 했어? 아침 먹자.”
도하는 먼저 식탁으로 가서 도현을 식탁 의자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뒤따라온 현서는 식탁 위를 훑어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앉아, 현서야.”
도하는 웃으며 현서를 위해 식탁 의자를 빼주었다.
“고마워요.”
도하는 곧 미리 만들어둔 드레싱을 샐러드에 살살 부었다. 그러고는 현서와 도현의 접시에 야채를 적당히 덜어주고 삶은 달걀도 올려주었다.
“자, 이건 샌드위치.”
먹음직스럽게 도톰한 샌드위치도 각각 접시에 올려주자 도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런 도현에게 현서가 친히 말해주었다.
“도현아, 오늘 아침 식사는 아빠가 만들어준 거야.”
“와아, 진짜? 아빠가 만들었어?”
“도현이 많이 먹어. 엄마가 만든 거보다 맛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잘 먹어줬으면 좋겠네.”
“엄마 거보다 맛있게 생겼어!”
도현의 말에 도하와 현서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같은 사람이 해준 음식을 자주 먹다 보니 색다른 게 좋아 보이는 모양이다.
“우아! 맛있다!”
맛도 입에 맞는지 도현이 좋아했다.
현서도 나름 흐뭇한 눈길로 음식을 바라보며 개중 샌드위치를 집었다. 한입 물어 맛을 본 그녀의 얼굴에 더욱 환한 미소가 번졌다.
“맛도 좋은데요? 모양도 예쁜데 모양만큼이나 맛도 좋아요.”
“그래? 다행이다.”
도하는 담담하게 대꾸했지만 그 역시 흡족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어릴 때 만들어준 음식들도 나름 맛있었지만 그때보다 엄청 발전했네요.”
“앞으로 많이 보여줄게.”
“많이 기대할게요.”
.
.
.
“도현아, 엄마 다녀올게.”
“응, 엄마, 안녕!”
현서는 출근 전 현관 앞에서 도현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도현에게 뺨에 뽀뽀를 받은 현서가 도현의 뺨에 또 뽀뽀를 돌려주자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도하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안 해줘?”
“네?”
현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그러자 도하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가리켰다.
“나도, 여기.”
현서는 조금 어색한 듯이 웃어버렸다.
기가 막혀. 이런 모습의 채도하라니.
본가에 살던 시절엔 시부모님들이 있어서 출근길에 이런 애정 행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이런 채도하의 모습을 보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아니면…….”
그녀가 웃기만 하는데 도하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여기도 좋고.”
현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치며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도현도 왜인지 말없이 엄마와 아빠가 말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아이에게 이런 광경은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똥말똥한 아이의 눈을 보며 현서는 아빠와 어제부터 함께 살게 된 아이 앞에서 이래도 되나 싶었다.
서하 앞에서도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이었으니.
“도현이만 해주고 난 안 해줘?”
그럼에도 도하가 채근을 멈추지 않아서 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도하의 뺨에도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자 도하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제 좀 좋네.”
현서는 또다시 소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갈게요. 도현이 등원 잘 부탁해요.”
“응, 걱정하지 마. 우리 이현서 대표님 오늘 파이팅입니다.”
.
.
.
도현과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며 조금 걷자 유치원 차량 대기 장소에 금세 도착했다.
“하윤아, 안녕?”
“안녕!”
도현이 친구들을 발견하곤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민준이 형아 안녕?”
“안녕. 근데 이 삼촌은 누구야?”
도현에게 인사를 건넨 민준의 눈이 곧 도하를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해맑은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우리 아빠야!”
“우와, 진짜? 너네 아빠 멀리 있다고 했잖아.”
“응, 근데 멀리 있다가 집에 왔어.”
단순한 아이의 단순한 대답이 듣기 좋았다. 마치 어딘가에 좀 오래 다녀온 아빠인 듯 아무렇지도 않는 소개가 썩 마음에 들었다.
도하는 이 순간이 생각 이상으로 뿌듯해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도현이 민준이 형아라고 부른 아이에게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하세여!”
도하를 빤히 쳐다보는 건 민준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장소에 나와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도하에게 쏠려 있었다.
대부분이 아이들의 엄마였다. 그들은 대체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현이 아빠셔요?”
“네, 안녕하세요.”
한 아이의 엄마가 다가와 먼저 말을 걸자 다른 엄마들도 슬금슬금 몰려왔다.
“어머, 도현이 아빠래.”
“그래?”
작년 유치원 운동회에서도 보지 못했던 도현의 아빠에 대한 관심은 굉장히 컸다.
민준이 말처럼 그간 도현은 엄마에게 들은 대로 아빠가 멀리 있다고 말해와서 그들 사이에서는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다가온 엄마들 중에는 괜히 수줍은 얼굴을 한 사람도 있었다.
어느새 엄마들과 아이들에게 둘러싸이자 도하는 조금 당황하기 시작했고, 도현은 그 상황을 즐기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하윤이 엄마예요.”
“예, 안녕하세요.”
“어머나, 도현이가 아빠를 닮았던 거네요! 도현이 엄마도 미인이지만 도현이가 닮지는 않아서 아빠를 닮았겠거니 했는데.”
말문이 터지자 엄마들은 금세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진짜 도현이가 아빠를 닮아서 이렇게 잘생겼던 거네요.”
“그러게, 도현이 보면서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시네! 연예인이 따로 없어!”
나오기 전까지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은 생각도 못 해서 도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잠시 후 차량이 도착하고 선생님이 내렸다.
“안녕하세요!”
경쾌하게 인사하는 선생님 앞으로 아이들과 보호자들이 몰렸다.
차례차례 아이들이 타며 도현이 차례가 왔을 때였다.
“아빠, 안녕.”
“응, 도현이 재밌게 지내다 와. 이따가도 아빠가 나올게.”
선생님의 눈도 휘둥그레져 있었다.
“도현이 아버님이세요?”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당분간 매일 뵐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선생님은 반색을 환하게 띠고 웃었다.
의식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주변 여자들은 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유치원 원아들의 보호자뿐 아니라 그냥 지나가던 여자들조차도.
그러나 도하는 그저 도현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차에 오르고 난 뒤에도 창문을 통해 아이가 앉아 아빠를 보며 손을 흔드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