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외전 1 (78/92)


#78. 외전 1
2022.12.29.



 


“할아버지!”

“우리 도현이 왔구나!”

채 회장이 거실 현관 앞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도현이 쪼르르 달려와 채 회장의 두 다리를 꼭 끌어안자 채 회장도 껄껄 웃으며 허리를 굽혀 아이를 안아주었다.

채 회장의 얼굴에는 햇살 같은 미소가 피어 있었다. 그는 요즘 도현을 보는 낙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도하가 진성에서 빠지면서 다시 채 회장의 일이 늘어난 상황인데도 현서가 먼저 찾아뵙겠다고 하면 바쁜 와중에도 반드시 시간을 내곤 했다.

이제는 서로가 친조부와 손자 관계라는 것을 아는 두 사람이었다. 이제는 더 대놓고 애정 표현을 담뿍 하며 지내고 있다.


“아버님.”

“그래, 어서 와라. 들어가자꾸나.”

세 사람은 오늘따라 유독 밝은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로 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자 사용인이 차와 과일을 내 왔다.

채 회장이 차를 한 모금 넘기더니 현서를 보았다.


“참, 오늘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했지?”

“네, 아버님.”

현서는 웃고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사뭇 진지한 눈길로 채 회장을 보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냐. 회사 일이야?”

가끔 SH 경영 건으로 상의드릴 때가 있곤 해서 또 그런 이야기를 예상하시는 모양이다.

씩 입가를 올리던 현서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고는 중대 발표를 내뱉었다.


“아버님. 실은 저희들요…….”

그녀를 빤히 보는 채 회장의 얼굴을 보며 현서는 씩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셋이서 다시 함께하게 되었어요.”

채 회장은 잠시 멍하게 현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와 닿지가 않는 듯했다.


“셋이? 그러니까, 그……. 너희…… 셋이?”

그러나 이내 그의 눈동자가 희망으로 반짝였다.


“네, 저희 둘이랑 도현이 아빠랑요…….”

도하는 아직 미국에 있었지만 그전에 현서는 이렇게 채 회장에게 미리 귀띔을 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왔다.

무뚝뚝한 아들이 면목까지 없었으니 그리 바지런하게 이 소식을 전할 거 같진 않았기에 현서가 먼저 찾아뵙자고 진지하게 말씀드렸다.

도하가 귀국하고 나면 아예 셋이 함께 찾아뵙자고 할 생각이다.

거기까지 말을 건넨 후 현서가 채 회장을 살폈을 때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채 회장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다.”

채 회장은 눈물을 글썽이며 현서에게 그렇게 말했다.


“고맙다, 얘야.”

그 역시 그간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걸 한순간에 알 수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서는 함께 촉촉해진 눈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했어요, 아버님.”

 

***



“어, 도현아! 저기 봐! 아빠 나온다.”

“오! 진짜 아빠다!”

저편에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엄마가 아빠 마중 나가려 공항에 간다니까 기어이 따라온 도현은 그만큼 아빠를 반가워했다.


“아빠아!”

아이를 발견한 도하의 표정도 곧 환하게 밝아졌다. 멀리서 그는 현서와도 눈을 맞추며 미소를 보였다.

캐리어를 밀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도하에게 도현은 더 빠르게 다가갔다.


“도현아!”

도하가 두 팔을 벌리며 달려오는 아이에게 함께 두 팔을 뻗자 아이가 와락 품에 안긴다.

도하는 도현을 번쩍 안아 들며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우리 도현이도 공항까지 나왔을 줄은 몰랐네.”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그는 현서에게 다가갔다. 현서도 한시라도 빨리 가까이서 보고 싶은 사람처럼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현서가 한 걸음 앞까지 다가왔을 때 도하는 캐리어를 놓고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았다.

현서도 한쪽 팔로는 그의 허리를 다른 팔로는 그에게 안겨있는 도현을 함께 안았다.

세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으며 감회의 순간에 흠벅 젖어 있었다. 약 한 달 만의 재회였다.

그것도 이건 그냥 재회가 아닌 특별한 재회였다.

비로소 세 식구가 가족의 이름으로 다시 뭉치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한 달 전에 두 사람의 얼굴을 멀리서라도 보려고 무작정 비행기를 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비행이었던 것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한 거였는데 이제는 ‘귀가’였다.

오늘은 온전한 가족이 된 세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상기된 표정의 도하가 현서의 얼굴을 살폈다.


“오래 기다렸지? 더 빨리 귀국할 걸 그랬어.”

“지금도 충분히 서둘렀잖아요.”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사둔 집을 처분하고 오려고 했는데 매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그대로 두고 나와버렸다.

그냥 집은 천천히 되는 대로 처분하고 그저 현서와 도현이 있는 곳으로 어서 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비행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갔어.”

도하는 웃으며 현서의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붙였다 뗐다.


“여기까지 날아오는 내내 빨리 너랑 도현이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거든.”

오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현서와 도현에게 가는 길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너무 행복해서 불안하다는 표현이 실감 날 만큼 이 행복을 감히 자신이 가져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었다.

빙긋 웃는 현서는 그가 흡족할 만큼 그를 담뿍 반겨주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는 그의 품에 꼭 안겨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일이 이렇게 실체가 되어 펼쳐져 있었다.


“어서 가요. 우리 집으로”

현서의 말은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무사히 다시 만나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현서와 아이의 미소를 보니 새삼 더 감사가 되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현서의 차를 도하가 운전했다.


“오빠. 아버님한테 바로 들렀다가 가요.”

“그래.”

도하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대답했다. 만족스레 웃는 현서의 옆에서 그는 잠시 골몰하게 생각에 잠긴 채 운전만 하다가 이윽고 생각을 내뱉었다.


“오늘 얼굴 뵈면……. 분명 회사에 복귀하라고 하시겠네.”

현서가 자잘한 소리로 웃었다.


“복귀해야죠, 그럼 안 하려고 했어요?”

“하긴 해야지. 아버지도 힘드실 테니.”

“맞아요. 요즘 몸도 마음도 많이 약해지긴 것 같아요. 눈물도 많아지시고…….”

운전대를 잡은 도하의 손이 움찔 떨렸다.

최근 아버지의 눈물은 분명 불효자인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너는……. 괜찮아?”

“뭐가요?”

“내가 너랑 같은 건물 안에서 일하는 거. 기사도 워낙 크게 터졌고 구설수가 심해질 텐데.”

현서는 그 말에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새삼스레 뭘요. 나, 지금 이미 진성 사람이잖아요. 오빠 덕분에.”

현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내뱉었다.


“나 진성 계열사, SH의 대표이사잖아요. 나를 진성에 꽂아두고 혼자만 도망가버린 탓에, 오빠는 진성가 사람 아니어도 나는 진성가 사람 만들어놨잖아요.”

차가 멈추었을 때 도하는 고개를 돌려 현서를 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은 염려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서 익숙해요. 사람들 시선 같은 것도. 이미 한 차례 시선 세례를 받아서요.”

그 말에 도하는 더 곤란한 얼굴을 했다.


“미안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현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도 대체로 호의적이긴 하더라고요. 불쌍한 여자 같아 보였나 봐요. 콩가루 집안에서 버텨낸 가련한 여자, 그래서 첫 아이도 잃고 남편도 떠난 외로운 여자.”

마치 남 이야기하듯이 술술 내뱉는 현서를 보며 도하는 민망함에 난감한 표정만 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여기서 오빠 한 명 더 들어온다고 내 인생이 더 힘들어질 것도 없어요.”

“그래도. 그때는 내 어머니 이야기가 더 큰 화제였었고, 나랑 아버지는 그런 너에게 가진 걸 증여하고 떠난 전남편과 그런 너를 진성 안에서 일하게 하고 아껴주는 전 시아버지로 남았을 뿐이었지만…….”

도하는 수심이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다시 가족이 될 거니까, 이제는 더더욱 네가 주인공으로 구설에 오를 텐데…….”

그러나 현서는 그의 말에도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겠죠.”

차는 다시 출발했고 도하는 앞을 보고 운전하면서 중얼거렸다.


“이런 집구석에 다시 며느리로 들어온다는 말도 돌 수 있고.”

“그리고 그걸 순수한 사랑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죠. 오너가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욕심날까, 라고 생각할지도요.”

누구보다도 예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서는 담담했다. 그래서 도하는 더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

그런 그에게 현서가 말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우리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줘야죠, 오빠.”

앞을 보며 운전 중이던 도하의 눈빛이 일순 먹먹해졌다.

이현서는 마음이 여린 듯하지만 결심을 한 순간에는 강인한 면모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싶어요, 이제. 남들 눈치 보면서 놓치기엔 너무 큰 거잖아요, 그 행복이.”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정말 고마워, 현서야.”

도하는 그제야 다시 웃으며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보았다.


“누가 함부로 어떤 말을 하든, 금방 그 말 들어갈 수 있게 내가 너한테 많이 잘할게.”

현서의 얼굴에도 그와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엄마……. 나 배고파.”

그때 어른들의 어려운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던 도현이 끼어들었다.


“도현이 배고파? 할아버지 댁 갈 거야. 조금만 참았다가 거기서 같이 먹자.”

“응! 할아버지네 집밥 맛있어!”

대화의 방향은 도현을 중심으로 바뀌어 있었고 도하와 현서의 눈빛은 금세 부드러워져 있었다.

***

채 회장 집에서 돌아오니 어느새 도현이 잘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늦었네. 도현이 어서 씻고 자자.”

현서가 집 안으로 들어가며 어깨를 토닥이자 도현이 도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오늘은 아빠랑 잘래!”

도하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럴까? 아빠랑 같이 씻고 잘까?”

“응!”

그 말을 들은 현서의 얼굴에 문득 화색이 돌았다.


“오, 그거 잘됐네요! 이제 도현이도 여섯 살이니까 앞으로 아빠랑 목욕하면 되겠다!”

“이야!”

아직 엄마가 씻겨주긴 했지만 함께 알몸으로 탕에 들어가는 건 점점 줄여갔더니 도현이 은근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이제 아빠에게 역할을 주면 되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홀가분했다.

잠시 후 욕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도현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소리만 들어도 도현이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는 걸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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