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에필로그 (2)
(77/92)
77. 에필로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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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에필로그 (2)
2022.12.26.
오늘 중 가장 오래 눈을 맞추는 순간 같았다. 떠날 때가 다 되어서야 말이다.
그녀를 바라보던 도하는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이윽고 천천히 한 손을 올린 그는 현서의 뺨을 조심스레 만졌다.
따뜻한 온기가 얼굴에 닿자 놀란 현서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녀의 눈이 촉촉해지기 시작할 때 그의 손이 서서히 떨어졌다. 조금 전에 이미 작별의 말을 건넨 그는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현서의 얼굴만 조금 더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가 뒷모습이 보이자 마침내 현서의 눈물이 떨어졌다.
***
밖이 이미 조금씩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현서는 창밖을 한번 보았다가 모니터를 보았다가 시계를 한번 보았다가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가 괜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컴퓨터를 끄고 겉옷과 가방을 챙겼다.
정말 치열했지만 고민은 끝났다. 백번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곧장 성마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가며 비서에게 통보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볼게요.”
“네, 대표님.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요!”
급히 걷느라 마지막 말은 돌아보지도 못하고 내뱉어야 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때는 하늘이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다.
***
넓은 공항에 도착하자 더욱 눈앞이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금요일. 오늘이다. 시카고행 저녁 비행기라고 했다.
한국을 떠난 이후로는 그가 전에 쓰던 전화번호도 없애버렸고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다시 만났을 때도 새로운 번호가 있는지조차 묻지 않았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날의 갑작스러운 재회 이후여서일까. 며칠간의 단절은 이전보다 더 애달팠던 것 같다.
말없이 떠나갔던 그를 다시 보았던 일도, 그 밤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도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그날이 이미 머나먼 과거로 남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짓말처럼 만났다가 다시 단절되어버린 이 상황은 예전보다 더 많은 상실감과 불안함을 남겼다.
안간힘을 써서 아닌 척하며 살았을 뿐, 사실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며 지냈던 건지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움이란 건 오로지 이현서와 도현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탔던 그 남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도 그만큼 그가 그리웠다. 그래서 도현에게 그가 아빠라고 말해주었고 눈이 오던 날의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저 함께하고 싶어서. 그래서 그를 붙잡았던 거였다.
그녀에 대한 채도하의 감정이 사랑인 걸 깨닫게 되었던 이상 마음만은 그와 함께하고 싶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상황이 함께하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주었을 뿐.
한영숙이 비정해도 어미는 어미이니 그 천륜을 이현서가 끊을 수는 없었다. 그가 먼저 끊게 할 수도 없었다.
현서 자신은 한영숙이라는 징글징글한 인연을 끊어냈어도 자신이 그 아들의 도리마저 쥐고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한영숙도 핏줄이고 도현이도 핏줄이지만, 이현서가 일방적으로 그를 떠난 것이니 그가 한영숙과 함께한다 해도 그가 도현을 버린 건 아니게 되지만 그가 도현과 함께하기 위해선 한영숙을 버려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철저히 말이다.
핏줄과 핏줄 사이에서 힘들어할 그에게 억지로 천륜을 끊게 하여 곁에 둔다면 그의 마음이 편치 않을 줄을 알았기 때문에 그때는 그와 함께할 마음을 먹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 천륜을 채도하가 직접 끊어냈다면…….
끊어내는 것이 오히려 그가 살길이라면…….
그 가혹한 인연을 끊어내고 그에게 원하는 삶을 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미 때문에 딸을 잃은 그가 어미를 버렸다고 해서 그에게 그 누가 감히 손가락질을 할 수가 있을까.
이현서를 향한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난 이후에도 밀어냈던 건 다른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가졌던, 그 대단한 모든 걸 버리지 말라고 외면해 주었던 것이다. 그 대단한 것은 그의 명성과 그의 권력과 그의 재력, 그리고 그의 친부모였다.
그런데 그는 끝내 그 모든 걸 다 버렸다.
채도하에게 이현서를 제외한 그 모든 걸 갖게 하려고 채도하를 갖지 않았더니, 그는 이현서에게 그 모든 걸 주고는 채도하만 주지 않았다.
그런 채도하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을까.
이제는 그에게 아픔도 천륜도 묻고 제 삶을 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제 더는 그 굴레를 품지 말라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그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뿐이라는 것도 현서는 이제 잘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단 사람은 이현서뿐이라는 걸.
현서는 출국장을 찾아 정신없이 달렸다. 지금 놓치면 이제 연락조차 쉽게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발 아직 들어가지 않았기를.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의 모습을 애타게 찾아 헤매며 두리번거렸다. 발견하기도 전부터 이미 아른아른 눈에 밟히는 그 사람의 모습을.
이제껏 많은 상황들이 그들을 돕지 않았지만 이제는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에 더욱 애가 탔다.
그러자 마침내 하늘이 돕듯이 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현서는 힘껏 외쳤다.
“오빠!”
뒤편에서 외쳤지만 그는 그 한 번에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그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돌아본 그의 표정은 놀란 기색을 띠었지만 점차 상기된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현서가 급히 다가가고 있자 곧장 그 역시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현서야…….”
서로의 마음만큼이나 빠르게 서로에게 다가간 두 사람은 곧 마주 보게 되었다.
현서가 차오른 숨과 함께 내뱉었다.
“가지 마요.”
놀라있던 도하는 더욱 놀란 얼굴을 했다.
“오빠. 나, 며칠 전에 확실히 깨달았어요.”
현서는 숨이 찼는데도 숨을 고르기도 전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난 지금, 내 아이 도현이가 있어 매우 기쁘지만, 그 아이를 내게 준 오빠랑 함께 있으면 그 기쁨이 더 완전하게 채워진다는 걸요.”
도하의 애틋한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비록 우리에게는 화석처럼 박힌 상처도 있고 지워낼 수 없는 혈육의 굴레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제…….”
현서는 그에게 이제껏 보여주었던 얼굴 중 가장 절박한 얼굴로 토로했다.
“이제는…… 그 아픔보다 기쁨이 더 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현서는 크고 까만 눈을 들어 도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약간 촉촉해져 있었다.
“오빠는…….”
그를 보며 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 그래요?”
“…….”
현서는 어느 때보다도 가슴이 맑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도 솔직할 수 있었다.
“오빠. 나는 우리 아픔이…… 우리 기쁨보다 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슬픔에 젖어 있는 마음이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언제까지나 이길 수는 없어요.”
현서는 그를 설득하려 혼신을 다했다.
“과거의 슬픔을 전부 비울 수는 없어도 묻을 수는 있잖아요. 이제는 슬픔이 아닌, 행복을 바라봐요, 우리.”
더는 슬픔을 위해 살지 말라고. 더는 그 자신을 벌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제는 돌아와서 도현이와 제 곁에 있어 달라고.
그는 꽤 놀란 듯 멍해 보였지만 다행히 그녀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긴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부정이 아닌 긍정과 인정이 밀려드는 순간일 거라고 현서는 확신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가지 마요. 오빠.”
잠잠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도하는 마침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무 감격에 차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돌아오려고 했어.”
현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미국 생활 정리하는 대로 너랑 도현이한테 다시 돌아오려고 했어.”
“……정말?”
현서가 확인하듯이 되묻자 도하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현서는 그제야 안도한 사람처럼 탄식했다.
“그랬구나……. 그러려고 했구나…….”
눈길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는데 커다란 품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눈을 크게 뜨는 사이 그녀는 이미 눈앞의 남자에게 안기게 되었다.
“돌아와서 다시 들이대려고 했지. 매달리고 애원하고…….”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그날의 행복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가 있을까.
이전에 알던 달콤함보다 더한 달콤함이었다. 이제는 그 소중함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으니까.
현서가 그에게 안긴 채 조용히 그를 불렀다.
“오빠…….”
“응.”
“그럼 나 아직…… 사랑해요?”
“사랑하지. 전보다 더 많이…….”
도하는 현서를 더욱 꼭 껴안으면서 그녀의 귓전에 대고 대답해주었다.
“그럼 가장 소중한 우리랑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버릴 수 있다는 말, 아직도 유효해요?”
“유효하지.”
“그럼 제발 버려요.”
문득 도하는 의아해져선 현서를 안은 채 고개를 약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내가 더 버릴 게 남았어?”
그가 정말 몰라서 묻자 현서는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답을 말해주었다.
“오빠의 그…… 죄책감을 버려요.”
“…….”
도하는 순식간에 먹먹해진 가슴으로 그녀를 보았다.
“오빠의 사랑을 버리지 말고요.”
간절한 바람이 담긴 그녀의 눈빛이 그를 치유하고 있었다.
“넌 언제나 나를 구하는구나.”
도하는 현서는 더욱 품에 가득 안으며 읊조렸다.
“늘 나를 구했던 건 너였지.”
현서도 두 팔을 들어 함께 그를 꼭 안았다.
“이제는 행복해도 돼요, 오빠.”
이제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 서하도 그걸 바랄 거예요. 우리 도현이도 바라고 있고.”
평생 잊지 못할 슬픈 이름에 앞으로도 함께 슬퍼하겠지만 또한 평생 기뻐할 새로운 이름에 함께 행복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현서 너는……. 항상 이렇게 예쁜 말만 하고…….”
이제는 주기만 하고 싶은데 아직도 이렇게 너에게 받고 있네.
“너는 항상 날 사랑해주었지.”
지금도 그를 안아주고 있는 두 손길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이렇게 끝내 그를 놓지 않고 있는 이현서가.
“그런데 그거 알아?”
도하는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를요?”
“알고 보면 내가 더 너를 많이 사랑했던 거.”
“그런가요?”
현서는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간지러워서 나직이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확신에 찬 저음의 목소리가 대답을 들려주었다.
“지금부터 많이 보여줄게.”
현서는 눈을 감고 이 순간의 환희에 미소지었다.
이제는 그의 말을, 그의 사랑을 믿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