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에필로그 (1)
(76/92)
76. 에필로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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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에필로그 (1)
2022.12.22.
겨울의 짧은 해는 이른 밤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도 창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오고 있어 왜인지 푸근한 밤이었다.
어두워도 두렵지 않고, 아름답고 따뜻한 밤 같은 그런 밤.
그건 실내의 여기저기를 꾸미고 있는 아기자기한 장식들 덕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트리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불빛들도, 다채로운 방울들도, 문에 걸린 초록 리스도 모두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가장 이 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건 세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이 순간의 분위기였다.
도현이 입고 있는, 루돌프가 그려진 빨간 스웨터는 어떤 장식보다도 사랑스러웠다.
원래도 음식 솜씨가 좋은 현서는 아이를 위해 특별히 더 정성스럽게 파티 음식을 준비했다.
메뉴도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모양까지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컨셉이면서 귀엽고 예뻤다.
현서 자신도 다 차려진 식탁을 보며 만족스러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손뼉을 한번 짝하고 치며 외쳤다.
“자, 다 됐다! 어서들 와서 앉으세요.”
그 소리에 도현이 도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 같이 밥 먹어요.”
누가 보면 5세 인생 내내 아빠라고 불러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호칭이었다.
도하는 너무도 믿기지 않아서 자꾸만 웃음 보다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꿈이라면 깨지 말아라, 하는 심정이었다. 이렇게 달콤한 게 꿈이라면 차라리 영영 눈을 뜨지 않았으면 했다.
“우아, 엄마! 맛있는 거 진짜 많아!”
“그래? 우리 도현이 많이 먹어.”
현서는 눈을 접어 웃으며 도현에게 말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아이가 호응해주니 그저 뿌듯했다.
그리고 조금은 어색했지만 현서는 도하를 보면서도 옅게 웃었다.
“앉아서 들어요. 도현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했지만…….”
“다 맛있어 보이네.”
어색해하는 건 도하가 더했다. 그야말로 먼 발치에서 두 사람을 지켜만 보고 돌아가려다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이라 여기서 자신이 어찌하고 있어야 할지 모르는 탓이다.
현서는 맛깔스럽지만 건강하게 조리한 닭요리를 조금 떠서 도현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헤헷, 닭고기다. 닭고기 좋아!”
이어 현서는 도현의 옆에 나란히 앉은 도하의 접시에도 닭요리를 떠주며 도현에게 말했다.
“맛있게 먹어, 도현이. 아빠도 좋아하는 닭요리야.”
“정말? 아빠도 닭고기 좋아해?”
엄마의 말을 듣고 도현은 신기하다는 듯이 도하와 현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현서는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어릴 때 옆집 살던 아빠가 엄마 집에 놀러 오면 도현이 외할머니가 닭요리 자주 해주셨어.”
“그럼 나는 아빠 닮아서 닭고기 좋아하나 봐! 엄마는 닭고기 도현이만큼 안 좋아하잖아.”
“맞아. 엄마가 생각하기에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그래서 엄마는 도현이에게 닭요리를 해줄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났어.”
도하는 둘의 대화를 들을수록 감격에 빠져들고 있었다. 자꾸만 꿈만 같아서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현서도 도현도 아빠라고 지칭해주고 있고 아빠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아빠, 지금 아빠는 우리한테 돌아온 거야?”
도현이 불쑥 도하를 보며 물었다. 도하는 왈칵 격해지는 감정에 순간 시선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현서도 감정에 북받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돌아왔다는 표현만 들어도 안타까웠으니까. 아이는 아빠가 저를 떠났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하도 현서도 아이가 던진 그 질문에는 당장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감정을 누르며 도하가 물었다.
“도현이는 아빠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응. 나도 다른 애들처럼 아빠랑 살고 싶다…….”
도하는 그 말에 가슴이 떨리도록 놀랐지만 고개를 돌려 현서를 보니 현서는 생각만큼 놀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난 저 말 백번도 더 들었어요.”
의연한 얼굴로 던지는 말에 도하는 더욱 놀랐다. 현서는 민망하다는 듯 웃기까지 했다.
저 대화가 둘의 일상이었구나.
아이의 그 애잔한 바람에 새삼 더 미안해지고 있었다.
“아빠. 못 돌아오면 도현이 보러 자주 올 수는 있어?”
“자주 오도록 노력해볼게.”
“자주 노력해야 돼, 알았지?”
어느새 아이의 말은 다시 반말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쳤을 때는 그새 좀 컸다고 의젓하게 존댓말을 쓰더니 집에 와서 금세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엄마에게 쓰는 말투로 자연스레 변해 있었다.
“그래, 자주 노력할게.”
끝내 도하는 녹아내린 듯이 빙긋 웃으며 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서는 슬퍼졌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웃었다.
현서도 도하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말은 아끼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지금에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 지금은 도현과 즐거운 이 시간에, 이 파티의 행복한 분위기에 취해 있고 싶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식사 시간 내내 서럽고 복잡한 이야기는 모른 척, 그렇게 단란한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을 만끽했다.
.
.
.
도현을 재우고 나온다는 현서가 이윽고 도현의 방에서 나왔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조용히 아이 방의 문을 닫는 그녀를 홀로 소파에 앉아 있던 도하가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도 왜인지 머뭇대는 눈길로 도하를 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재잘거리던 도현이 잠들자 집 안이 온통 적막에 잠겨 있었다.
좀 전까지는 현서나 도하나 둘 다 아이를 사이에 껴두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현서와 도하의 대화보다는 현서와 아이의 대화, 도하와 아이의 대화가 주를 이루었던 것이다.
아이가 없는 공간에 두 사람만이 남자 급격하게 어색함이 감돌았다. 둘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둘 사이에는 쌓인 할 말이 아주 많은 것도 같은데 막상 마주하니 할 말이 없는 기분이었다.
앉지도 않고 멀뚱히 서 있던 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와인 한잔할래요?”
“좋아.”
잠시 후 현서는 아까 도현 앞에서는 꺼내지 않았던 알콜을 가지고 와 간단한 안주와 함께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도하가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서 두 개의 잔에 쪼르르 따랐다.
이내 와인 잔을 손에 든 현서는 입에 잔을 가져가기 전에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건배할까요?”
무엇을 위한 건배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러면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도하가 차분히 잔을 들었다. 그러더니 그는 나직하게 건배사를 뱉었다.
“도현이의 행복과 건강을 위하여.”
이 순간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내용이었다. 현서는 그의 잔에 챙하고 잔을 부딪쳤다.
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몇 모금을 넘기고 난 현서가 도하에게 물었다.
“지금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 다시 갈 거니까.”
“…….”
현서는 잔을 괜스레 돌리다가 망설이던 입을 뗐다.
“어디로요?”
“우선은…… 시카고로.”
“거기서 거주하는 거예요? 거기서 뭐 하는데요?”
“지금부터 거주해보려고. 지금부터 뭐라도 해보려고.”
“…….”
할 말을 잃은 현서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다시 어렵게 입술을 어물댔다.
“지금까지는 뭐 하고 지냈는데요?
“그냥……. 여기저기 여행을 좀 했지.”
현서는 도하의 얼굴에서 쓸쓸한 표정을 보았다. 여행이라는 그 즐거운 걸, 저토록 쓸쓸하게 말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랬군요. 근데 한국은 왜 다시 왔어요?”
도하는 대답하기 전에 와인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곧 솔직하게 답했다.
“너랑 도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어느 여행지에서 무엇을 하든 늘 마음은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럼 그렇게 혼자서 몰래 보고 미국으로 가려고 했단 말이에요?”
“……”
도하는 말없이 눈동자만 내리떴다.
그러자 현서는 이 측은한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바보…….”
도하는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멋쩍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럴 거면서 왜 그렇게 도망치듯이 가버렸어요?”
현서의 핀잔에 도하의 내리뜬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도망. 도망이란 표현이 정확했다.
자신이 가장 함께하고 싶어하는 존재들과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가 공존하는 이 나라에서 달아났다.
가장 함께하고 싶어하는 존재들과 함께하는 것도,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를 피하는 것도 어려워질 이곳에서.
“있잖아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서가 또 말문을 열었다.
“내가 떠나는 오빠를 붙잡지 않은 건…… 내가 힘들어서가 아니었어요. 오빠가 힘들까 봐 붙잡지 않은 거였어요.”
잠잠히 그 말을 듣던 도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언제나 천사 같은 이현서. 늘 나를 배려하고 생각하고.
도하는 서하의 죽음을 둘러싼 내막을 알게 된 직후 깨달을 수 있었다.
현서가 그를 떠난 진짜 이유는 제 어미가 서하에게 저지른 잘못으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걸.
이별 과정에서조차 그를 배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현서야……. 이제 내 걱정은 그만해.”
도하는 와인 잔 끝만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너랑 도현이 편히 지내라고 나타나지 않은 건데…….”
그의 말에 현서는 두 눈이 시큰해질 것 같았다. 눈도 잘 맞추지 못하고 하는 말이라 더 애석했다.
눈빛에는 미련이 그득해서는……. 그 눈빛을 어쩌지 못해 저렇게 숨기려고 마주치지도 못하는 거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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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멎어있는 하늘이 고요했다. 바깥세상은 눈이 많이 쌓여 온통 하얬다.
예쁘고 적막한 밤이었다. 와인잔을 기울이다 보니 생각보다 꽤 오래 앉아 있었다.
“도현이한테 인사도 못하고 가네.”
대문 앞에 선 도하가 아쉬운 얼굴로 집 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
“가기 전에 한 번 더 얼굴 보여주던지요.”
아쉬운 건 현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보다 훨씬 더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도하는 막상 그 말에는 답이 없었다.
“…….”
“언제 출국해요?”
“다음 주 금요일 저녁 비행기야.”
“……그렇군요.”
현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도하는 다 못한 할 말이 있는 듯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이내 짧게 뱉을 뿐이었다.
“갈게.”
현서는 마지막 인사말을 건네지 않고 계속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대로 인사를 해버려도 괜찮은 건가.
가만히 보고만 있자 그녀의 근심 어린 눈동자를 내려다보던 도하가 문득 옅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