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함께 한다면 (75/92)


#75. 함께 한다면
2022.12.19.



 
오늘은 도현이도 함께할 거니까 너무 많이 울지 말아야지…….

그때 갑자기 전화기 진동이 짧게 울렸다. 화면을 보니 물건이 도착했다는 문자 알림이 와 있었다.


“택배 올 게 있던가……. 도현아, 엄마 잠깐 물건 좀 가지고 들어올게.”

문자를 보낸 업체를 보니 퀵서비스로 온 배달이었다. 기분이 묘했던 현서는 서둘러 문 앞으로 나가보았다.

물건은 작은 상자였다. 집으로 가지고 들어온 현서는 고민 없이 포장을 뜯었다.

그렇게 상자가 개봉되는 순간, 그녀는 손을 주춤했다.

이내 눈물이 왈칵 고여 들었다.

처음 보는 브랜드의 젤리가 들어 있었다. 그 포장 위에는 연보라색 리본이 예쁘게 묶여 있었고 같은 색의 앙증맞은 코사지로 장식되어 있었다.

연보라색 봉투의 카드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열어본 카드에는 또다시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지난번에는 도현에게 보내는 카드였는데 이번에는 서하에게 보내는 카드였다.

[서하야, 안녕. 우리 서하가 먹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젤리를 먼 나라에서 발견하게 되어서 이렇게 보내. 젤리를 좋아하던 예쁜 서하가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 서하처럼 예쁜 젤리 많이 먹고 엄마 눈물도 닦아 주렴.

-단풍이 어여쁜 가을날의 산타가-]

오늘은 너무 많이 울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했다. 둑이 터진 듯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흐으흑…….”

결국 현서는 소리 내어 울고 말았고 그 소리를 들은 도현이 놀라며 나왔다.

아이의 작은 손에는 곰돌이 모양 젤리가 들려 있었다.


“우리 서하 오늘은 좋겠네…….”

도현이 들고 있는 젤리를 보며 현서는 중얼거렸다.

***

올 겨울은 유독 추웠다. 연신 한파가 자주 찾아와 혹독한 칼바람이 윙윙 부는 날이 많았다.

그러더니 오늘은 눈이 내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였기에 눈이 많이 온다면 내일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서는 오늘부터 휴가를 냈다. 크리스마스인 내일까지 도현과 시간을 넉넉히 보내기 위해서였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는 둘이서 조촐히 파티도 할 예정이었고 내일은 얼음 썰매를 타러 갈 계획이었다.

오늘은 모처럼 유치원에도 직접 차를 몰고 도현을 데리러 갔다. 그래서 도현은 엄마와 하원하는 길 내내 신이 난 상태였다.

주차를 마친 현서가 도현을 카시트에서 빼내어 주었을 때 문득 도현이 엄마를 졸랐다.


“엄마!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이렇게 추운 겨울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응! 하얀 눈 보니까 먹고 싶어져.”

엉뚱한 아들의 말에 현서는 웃음이 났다.

아이스크림처럼 단 음식을 자주 먹이지는 않지만 오늘만큼은 아이의 기분을 좋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크리스마스의 기분으로.


“알았어, 그럼 엄마랑 같이 마트 가자.”

“와아!”

아이의 손을 붙잡고 집이 아닌 마트를 향해 방향을 돌리자 도현의 발걸음도 더욱 발랄했다.

.
.
.

결국 아이스크림을 잔뜩 샀다.


“이 추운 겨울에 이걸 언제 다 먹지?”

“내가 하루에 하나씩 먹을게, 엄마!”

“그럴 거야?”

왠지 현서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눈 오는 풍경이 예뻐서일까. 아이와 함께하는 오늘이 즐거워서일까.

그럼에도 무언가가 빠진 것 같은데 말이지. 그게 채워지면 더 완벽할 텐데.


“어?”

그때 갑자기 도현이 걸음을 멈추고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보았다.


“왜 그래, 도현아?”

워낙 엉뚱한 아이니 현서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물었다.


“아저씨 맞네!”

“뭐?”

동네 아저씨가 한둘이 아니니 대체 어떤 아저씨를 말하는 건지 몰라 현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현서는 얼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하얀 눈이 예쁘게 쌓인 나무 아래 도현이 말한 ‘아저씨’가 있었다.

정말……. 정말 채도하야?

그는 현서보다도 더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마치 거기 숨어서 몰래 보려다가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현서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도현이 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현서를 보고 있던 도하는 이내 그에게 다가오는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몹시 반가운지 도현의 얼굴에 풍성한 웃음이 부서졌다.


“도현아…….”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도하는 더욱 어쩔 줄을 몰랐다.

3월에 마지막으로 보고 얼굴도 못 보았던 아이가 아직 저를 기억하고 있는 것도 감격이었고 이렇게 반가워해 주는 것도 감격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현서는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꼼짝 않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저씨, 언제 왔어요?”

아이의 키도 부쩍 커져 있었고 말투도 의젓해져 있었다. 전에는 반말이었던 말투도 그 사이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아까…….”

다시 도현을 향해 시선을 내린 도하는 한쪽 무릎을 굽혀 도현과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근데 왜 여기 서 있어요?”

“그냥……. 혼자서 몰래 보고 가려고 했는데 들켜버렸네.”

“숨어 있던 거예요?”

도현이 까르르 웃으며 묻자 도하도 함께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가려고 했어요? 인사도 안 하고?”

“미안해. 이 선물만 두고 가려고 했어.”

“이게 뭐예요?”

도하가 도현에게 쇼핑백을 내밀었지만 이제껏 보내온 선물들이 도하가 보낸 거란 걸 모르는 도현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도현이 주는 선물이야.”

“우와, 내 거예요?”

아이는 금세 함박웃음을 지었다.


“무슨 선물이지?”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집에 가서 뜯어 봐.”

“네! 헤헷……. 아저씨가 우리 아빠라서 도현이 선물 주는 거예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도하의 눈동자가 멈칫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들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현서를 바라보았다.


“…….”

현서는 아이의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그저 먹먹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당황하여 대답도 못 하고 입이 붙어버린 그를 보며 도현이 왠지 조금 수줍게 웃었다. 도현은 그의 귓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도하가 아이에게 맞추어 바짝 귀를 기울이자 이내 아이의 새하얀 입김이 공중에 뭉게뭉게 흩어졌다. 곧 아이가 속삭이는 소리에 도하는 눈앞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아저씨가 우리 아빠잖아요. 나 다 알아요. 맞죠?”

가슴 속에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너무 벅차서 자칫하면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하는 덜컥 두려워진 마음에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침묵하고 있는 그의 귓가에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말해줬어요.”

도하는 서서히 눈을 돌려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저를 닮았지만 햇살 같은 미소는 엄마를 닮은 것처럼 보였다. 구김살 없는 사랑스러운 성격도 현서를 닮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 집에서 엄마 아빠 결혼하는 사진도 봤어요.”

“그랬……어?”

되묻는 도하를 향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저씨가, 아니, 아빠가 내 아빠라고 해서 나는 너무 기쁘고 좋았어!”

그 말과 함께 아이가 보여주는 미소는 티 없이 맑아 거짓이란 없어 보였다. 그 미소가 슬프도록 찬란했다.


“도현아……. 다시 한번 더…… 아빠라고 불러볼래?”

꿈을 꾸는 듯이 도하가 물었다. 아이의 입은 망설임 없이 열렸다.


“아빠!”

도현은 경쾌하게 외치며 날아오르듯 도하의 목을 끌어안았다. 주춤하던 도하는 곧 조심스레 두 팔을 들어 아이의 몸을 꼭 안았다.

도하는 잠시 눈을 감고 그대로 있었다. 도현이도 아빠가 정말 좋은지 제 팔로 아빠를 놓지 않고 있었다.

도하는 한동안 품에 붙이듯 꼭 안고 있던 작은 몸을 천천히 떼어냈다.


“춥지, 도현이. 엄마랑 이만 집에 들어가야지.”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저편에 서 있는 현서가 땅에 발에 박힌 듯 꿈쩍 않고 있어서 이만 도현을 보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도 추워 보였고.


“아빠도 같이 들어가는 거예요?”

“아니.”

“왜요? 도현이 보러 온 거 아니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왜 그냥 가냐는 듯이 묻는 아이에게 도하는 무어라 설명을 해주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미안하고 안타까워 가슴이 미어질 뿐이었다.


“도현이 보러 온 거 맞는데 오늘은 이만 가야 해서.”

“그렇구나…….”

조금 시무룩해 보이는 아이에게 도하는 지킬 수 없는 말이라도 다음을 기약했다.


“나중에 또 보러 올게.”

“언제요?”

“금방…… 또 올게.”

그제야 수긍한 듯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가 준 선물 가방을 야무지게 든 채로 제 엄마에게 걸어갔다.

현서는 다시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도하를 바라보았다.

도하는 말없이 눈짓으로 그녀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전처에게 건네는 안부 인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도현에게 아빠라는 진실을 밝혀준 일에 대한 감사 인사이기도 했다.

도하는 찬찬히 돌아섰다. 훔쳐보다 들킨 주제에 시간을 너무 끌었다.

선물도 주었으니 빈손이 되어 몸은 더 가뿐하게 돌아가는데도 발걸음은 더 무거워져 있었다.

억지로 조금 더 큰 보폭으로 걸음을 서두르려던 참이었다.


“오빠!”

그립고 그리웠던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도하는 발을 우뚝 멈추고 다시 현서를 돌아보았다.


“도현이랑 나랑 오늘, 크리스마스이브 파티할 건데…….”

거기까지 말을 뗐을 때 현서는 울컥 치미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다시 이어질 말을 꺼냈다,


“같이…… 갈래요?”

그녀의 우는 얼굴을 보는 도하의 눈가도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도하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동안 현서와 마주 보았다.

지금, 또다시 그녀가 손을 내민다.

어릴 적 옆집 소녀가 그러했듯이 그녀는 또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때처럼 따스한 눈동자를 하고선.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지금 네 손을 잡으면 다시는 놓고 싶지 않아질 텐데.

하지만 현서는 눈물이 흘러내린 얼굴로 그를 보면서도 동시에 절실한 미소로 권했다.


“아빠가 함께하면…… 아이도 좋아할 거예요.”

커다란 꽃송이 같은 하얀 눈이 내리고 있는 골목길. 이곳은 모든 추억의 시작이자 모든 인연의 시작이었으며 또 사랑의 시작이었던 곳이다.

익숙하고 정감 있는 이곳은 곧 그의 고향이었다. 이 낭만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곳은 하얀 눈이 쌓여가고 있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웠다.

햇살 받아 반짝이는 하얀 눈길 위에 눈보다 더 하얀 미소를 띤 여자가 서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 미소를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어찌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우뚝 서 있던 도하는 한참 망설이던 발걸음을 마침내 옮겼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따스한 곳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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