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먼 나라에서 (74/92)


#74. 먼 나라에서
2022.12.15.



 


“루카스……. 갑자기 왜 그래.”

루카스는 놀라고 있는 현서를 진중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여기, 한국…… 오고 나서부터는 현서가 유독 힘들어 보여서.”

염려스럽게 현서를 보는 루카스의 눈빛에 현서는 회피하듯이 눈길을 내리깔았다.


“고마워, 루카스. 아직도 그렇게 나한테 깊게 신경을 써주고…….”

그의 마음도 꽤 오랜 마음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철옹성처럼 쳐내도 늘 오뚝이처럼 다가오는 그에게는 늘 미안함 뿐이었다.


“근데 난, 이제 내 고향에 남을래.”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내놓는 현서의 대답이었다.


“현서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루카스의 얼굴에는 금세 실망한 기색이 서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웃어보려는 듯 입가를 올렸다.


“내 딸 서하가 있고 내 엄마가 있는 여기에, 그리고 내 모든 추억들이 있는 여기에서……. 물론 나쁜 추억도 많지만 좋은 추억은 더 많거든.”

그 말을 하는 현서는 꽤 결연에 차 보였다.


“그러니까, 여기서 계속 살아볼래. 그리고 도현이도 한국을 좋아해.”

하는 수없이 루카스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예상대로인 답변이네.”

“그래서 말인데, 루카스. 나 송화궁에서 퇴사하려고.”

이번에는 루카스가 커피를 머금다가 뿜을 뻔했다.


“뭐어? 왜? 내가 들이대서 그래? 그럼 이제 안 들이댈게! 아니, 적당히 들이댈게!”

허둥지둥하는 루카스의 모습에, 좀 전까지 심각하게 말하던 현서는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거 아니야, 루카스.”

“그럼 왜? 내가 우리 원장님에게 대우를 잘 못 해줬나?”

“그럴 리가 있어? 늘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지.”

“그럼 왜…….”

루카스는 더욱 이해를 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현서는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웃음을 지우고는 다시 입을 뗐다.


“SH가 내 딸 이름이래. 아이 이름이 서하였거든…….”

송화궁 퇴사 이야기 중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SH와 딸 이야기에 루카스는 좀 의아했지만 이내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채도하 전무가 물불 안 가리고 SH에…….”

이름에 얽힌 사연을 들으니 더욱 그의 행동들이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현서는 고개를 한번 크게 주억이더니 유독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맞아. 그래서 그 사람만큼 애정을 가지고 SH를 꾸려갈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야.”

루카스는 한층 더 놀라 커진 눈으로 현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현서……. 지금 뭐라고 했어?”

불안해하는 루카스의 눈빛을 보니 현서는 미리부터 너무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나, 이제부터 SH에서 일해보려고.”

“……”

늘 유쾌하고 낙천적이던 루카스 유도 이 순간만큼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벙한 얼굴로 현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채도하가 SH를 내려놓고 한국을 떠나 있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현서에게 그걸 맡기려 한 걸까. 제 딸아이의 이름을 이니셜로 만들 정도로 아끼는 회사를.


“채 전무가 바라는 거지?”

“응.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마음이 가네.”

그 부분은 루카스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설립 의도나 이름부터가 워낙 두 사람에게 의미가 클 테니.”

“역시 루카스는 잘 이해해주네.”

현서는 미안해하는 눈빛을 가득 담아 루카스를 보았다. 루카스의 표정에 아쉬움을 숨기지 못해 더 미안했다.


“현서. 그럼 SH를 맡더라도…… 송화궁 원장으로도 남아줘.”

루카스는 그녀와의 연결고리가 하나쯤 남아 있었으면 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다시 진성으로 가면 지금 한국에는 있지도 않은 채도하에게 그녀를 영영 빼앗길 것 같았다.


“송화궁에는 출근 자주 안 해도 되니까 원장 직함만 내려놓지 말아줘.”

“그 사람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현서는 허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하기가 힘든데…….”

루카스는 믿을 수 없는 허탈감이 빠져들었다.

청혼하면 거절할 줄은 알았지만 그 이후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나갈 줄이야.


“하……. 같이 미국 가자는 이야기를 꺼낸 게 무색하네. 미국은커녕 송화궁에서도 못 보게 생겼으니.”

현서는 미안하다 못해 민망해했다.


“그래도 송화궁 일은 차질없이 인수인계할 때까지 돌볼게. 하지만 원장 직함은 내려놓고 퇴사를 하긴 해야 할 거야. 이제 나는 SH에 전념하려고.”

“슬프네.”

“송화궁은 이미 체계가 잘 잡혀있고 직원들도 정말 잘하고 있잖아. 큰 지장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루카스는 웃는 척이라도 할 수가 없었다. 현서의 곧은 눈빛을 보니 이미 결심이 선 것 같았다.


“현서……. 꼭 가야 해?”

“정말 미안해, 루카스.”

그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녀를 절대 붙잡을 수가 없다는 걸.

***

훈훈한 바람이 부드러웠던 봄도 떠나간 지 오래였다. 이제는 녹음이 짙어지는 여름이 한창이었다.


“엄마, 나는 여름이 제일 좋아.”

“그래? 엄마는 도현이가 왜 여름을 제일 좋아하는지 알고 있지!”

“정말? 왜인 거 같은데?”

“여름에는 우리 도현이 생일이 있으니까?”

“에헷, 맞아. 어떻게 알았지?”

바로 오늘이 생일이라 뻔히 보이는 정답이었는데도 도현은 엄마가 퍽 어려운 문제를 맞힌 듯이 신기해했다.

다섯 살 도현의 유치원 생활도 한 해의 절반을 지나려 했다. 이제는 말도 더 또박또박 잘하게 되어 대화를 나누는 재미가 쏠쏠했다.

마침 주말이 생일이라 현서는 도현과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엔 도현의 생일을 맞아 특별히 둘이 함께 캠핑을 가기로 했다.

그녀는 어젯밤에 싸둔 짐을 점검하며 도현과 곧 함께 떠날 여행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도현이 캠핑 가면 뭐부터 하고 싶어?”

“나는 물놀이부터 할 거야!”

“오, 그래. 낮에는 역시 물놀이지!”

오늘을 위해 물안경도 신중하게 골라서 사두었고, 몸집이 빠르게 자란 아이를 위해 튜브도 조금 더 큰 거로 새로 장만했다.


“거기 밤에는 반딧불이도 보인대. 우리 도현이 아직 반딧불이 한 번도 못 봤는데 엄마랑 이번에 같이 보자.”

“응! 근데 반딧불이가 뭐야?”

“등불을 달고 있는 것처럼 빛이 나는 곤충들인데 깜깜한 밤에 보면 반짝반짝 정말 예뻐.”

“우와! 진짜 예쁘겠다. 빨리 보고 싶다!”

“엄마도 빨리 보고 싶어. 자, 이제 챙길 거 다 챙겼으니 우리 이제 출발하자!”

이내 두 사람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캠핑이라 짐이 상당히 많았다.


“엄마!”

현서가 가장 커다란 짐을 먼저 들고나와 차 트렁트를 열고 있을 때였다.


“응? 왜, 도현아?”

“누가 왔어!”

대문 앞에 서 있던 도현이 외쳤다.

짐을 막 트렁크에 넣은 현서가 고개를 돌리자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퀵서비스 기사가 보였다. 기사는 손에 박스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올 게 없는데……. 잠깐만, 도현아.”

“안녕하세요. 여기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퀵서비스로 배달된 물건이어서 현서는 더욱 의아해져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낸 사람도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 뜯어봐!”

“응, 그래.”

현서는 도현의 바람대로 곧바로 포장을 뜯어보았다.

호기심과 기대감 속에 물건이 정체를 드러낸 순간 현서도 도현도 둘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아, 엄마! 이거 누구 거야?”

“그러게. 도현이 선물인가?”

“이거 엄청 멋진 블록이야, 엄마!”

겉 포장을 본 도현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맞네. 도현이 생일이라고 누가 보내줬나 본데, 누구지?”

그때 현서는 동봉된 봉투를 하나 발견했다.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봉투를 열자 안에 있던 건 귀여운 카드였다. 생일 케이크가 그려져 있는 생일 카드.

그 카드를 열어본 현서는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금세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엄마, 뭐라고 쓰여 있어?”

“아…….”

도현의 해맑은 얼굴이 기대에 가득 차 있자 현서는 먹먹해진 목소리로 카드를 읽어주어야만 했다.


“우리 귀여운 도현이의 네 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먼 나라에서 응원할게. 한여름날의 산타클로스가…….”

현서는 그 짧은 문구에도 목이 메어 끝에서는 울먹였다.


“와아! 엄마 산타 할아버지래! 근데 산타 할아버지가 생일 선물도 줘?”

“우리 도현이가 엄마 말도 잘 듣고 착하게 잘 지내서 올해는 산타 할아버지가 생일 선물도 주나 봐.”

현서는 아이의 앞에서 안간힘을 써서 눈물을 참아냈다.


“엄마! 나 캠핑에 이 블록도 가져가서 할래!”

“그래, 가서 텐트에서 엄마랑 같이 만들자.”

현서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밝게 대답해주었다.

먼 나라에서 응원한다고 하는 걸 보니 채도하는 아직 한국에 없구나.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만은 아직 이곳에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현서는 슬프지만 웃으려 했다.

그리고 현서는 그 사람 역시 이 시간에 함께 웃고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저와 그의 아이 도현이 웃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

푸른 여름이 흔적도 없이 지나가고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무르익었다.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단풍을 보면서도 슬퍼지는 계절이 왔다. 바로 서하가 떠난 계절.

그렇게 또다시 서하의 기일이 왔다. 그리고 오늘은 처음으로 도현과 함께 서하를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은 날이기도 했다.

누나의 존재에 대해서는 원래 도현이 좀 더 큰 뒤에 알려주려고 했는데 무엇이 현서로 그럴 마음을 먹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젯밤 도현에게 너에겐 누나가 있었는데 그 누나가 도현이보다도 더 어릴 적에 하늘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현은 꽤 놀랐지만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아직은 어려서 단순한 나이인 아이라 그랬지 싶다.


“엄마, 누나는 뭐 좋아했어?”

“응?”

아침부터 서하에게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도현이 물었다.


“누나 좋아하는 거 갖다 주려고.”

현서는 도현의 마음에 뭉클한 감격을 느꼈다. 잠시 생각에 잠겨 그녀는 서하가 무얼 좋아했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음……. 맞아, 누나는 젤리를 참 좋아했어.”

“아, 젤리! 나한테 지금 있어!”

도현은 젤리를 가지러 쪼르르 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젤리를 좋아하던 서하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해서 현서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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