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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그의 마지막 마음 (73/92)


#73. 그의 마지막 마음
2022.12.12.


도현은 그 물음에 빙긋 웃더니 또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네! 집이 커서 숨바꼭질하기 좋잖아요!”

“그럼 할아버지랑 숨바꼭질해볼까?”

“우와! 정말요?”

“자, 같이 가볼까?”

“와아! 숨을 데 진짜 많아서 진짜 재밌겠다!”

도현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채 회장을 보며 현서는 신기해했다.

아버님도 몇 년 사이 조금 더 늙으셨나 보다. 마음이 약해지신 것 같아.

서하도 많이 예뻐하시고 사랑하셨지만 저렇게 자발적으로 숨바꼭질까지 하며 놀아주시진 않았는데.

이제는 손주에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된 채 회장을 보며 현서의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할아버지가 술래예요! 나 숨을게요!”

“그래! 얼른 숨으렴.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현서는 즐겁게 집 안을 누비는 도현과 채 회장을 잠잠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비로소 찾아온 도현과의 평화였다.

영숙이 사라져 조용해진 도하의 본가에서 채 회장과 도현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있는 이 광경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광경이었다.

한데 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서는 순수하게 행복하기가 어려웠다. 평화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많이 다쳤으니까.

지금 이 광경 안에는 비록 표독스러운 한영숙이 없었지만 아이의 아빠 채도하도 없었다.

도현과의 행복이 발목을 잡히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도 내내 홀로 무너져 있을 채도하 때문이었다.

***

송화궁 동편 돌담이 알록달록한 장미들로 수놓아졌다. 어느덧 5월이었다.

오늘, 유난히 따사로운 5월의 하루는 평소보다 조금 여유로웠다.

따스한 온풍이 부는 나날들을 맞아 이제는 송화궁을 찾는 손님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조금은 여유로운 날이었던 덕에 현서는 책상 앞 사무용 의자를 떠나 대신 소파에 가서 앉았다. 잠시 일을 놓고 차를 한 잔 음미했다.

바깥 공기 내음에도 찻잔에도 꽃 향이 가득했다. 코끝에 스미는 꽃차의 풍미 덕에 차 맛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향은 아련한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아련한 감성은 늘 하나의 방향으로 생각을 흐르게 했다.

이럴 때 하는 생각은 늘 하나였다.

우습게도 이렇게 한가한 시간이 현서에게는 도리어 독과도 같았다.

눈을 감으니 차오르는 슬픔에 더 침잠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현서는 곧 다시 눈을 떠야 했다.

전화기 진동이 울린 탓이었다. 곧 액정을 보자마자 눈이 크게 뜨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진성 법무팀의 정 변호사였다. 몇 년 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꼭 도하와 관련된 일일 것만 같아 현서는 한없이 초조한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그럼…… 그 사람은요?”

어안이 벙벙해진 현서가 가장 궁금한 건 그거였다. 이 상황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앞으로는 경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실 겁니다.”

정 변호사가 할 말이 있다며 한번 찾아뵙겠다고 했다. 마침 여유가 좀 있었던 순간인지라 오늘 바로 원장실에서 대면이 이루어졌다,


“채 전무님께서 워낙 애정을 가지고 있던 사업인 만큼 꼭 사모님께서 이끌어주시길 원하십니다. 아시다시피 애초에 다른 사람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방향의 이야기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필요하시면 경영을 지원해드릴 사람도 본사 쪽에서 파견이 가능하니 처음부터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제가…….”

현서는 난처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정 변호사는 예상했다는 듯 내내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장 핫한 천연 라인인 송화궁 제품이 이제는 SH를 대표하는 제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제품의 창시자격이신 분이 사모님이시기도 하니 대표자가 되신다면 이미지에도 좋고요.”

“하…….”

“SH는 전무님께서 딸아이과 사모님을 생각하시며 시작하신 일이고, 그게 얼마나 크고 중요한 의미인지는 사모님께서 누구보다도 잘 아시니, 사모님이 가장 적임자가 아니실까요?”

아무래도 채도하는 정 변호사에게 어떻게든 이 자리를 전부인에게 넘기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설득을 하는 걸 보니.


“그리고 SH에 이미 이현서 원장님을 잘 아는 임직원들도 많은데 그분들이 전부 사모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성심껏 사모님을 도울 자들이에요. 한 사람 한 사람 채 전무님께서 사모님을 위해 신중하게 뽑으신 인재들입니다.”

“제겐 송화궁도 있는데…….”

“송화궁 내려놓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이대로 동시에 SH의 대표자도 맡아주십사 하시는 거죠.”

“그래도……. 시간을 좀 두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오늘이라도 그 사람 만나서 대화해볼게요.”

어찌 이런 일을 벌인 건지 직접 만나서 대화해야지, 안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왜인지 정 변호사의 얼굴이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저, 사모님……. 근데 채 전무님께서는 이미 한국에 안 계십니다.”

정 변호사를 쳐다보던 현서의 초점이 일순 흔들렸다.


“……네?”

한국에 없다고?

갑자기 온몸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덮쳐오는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그냥 모든 게 다 우수수 제 속을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전무님은 진작 SH의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출국하셔서요.”

정 변호사 앞인데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이혼을 결심하던 순간부터 스스로 이제는 그와 상관없는 사이라고 못 박기가 몇 번이었던가.

그런데도 자꾸만 머리와는 달리 감정은 모순을 범해왔다. 그리고 그 모순을 누구보다 모른 척 해왔던 것도 자신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또다시 소용없는 감정 속에서 허우적대는 제 모습이 너무 우스웠다.

이제는 정말 멀어져 버린 사람인데.


“그랬나요…….”

“예. 그래서 이렇게, 제가 온 겁니다. 아직 추가로 더 맡기신 일도 있고요.”

멍했던 현서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더 맡기신 일이요?”

“예. 여기…….”

정 변호사는 다른 서류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의아한 눈으로 그게 무엇인지 확인한 현서는 이내 아까보다도 더욱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게 다 뭔가요?”

“채 전무님께서…… 재산을 사모님께 증여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현서의 벌어진 입술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정 변호사 앞이라고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속절없이 터져 나왔을 뿐이었다.


“전무님께서는 이 재산들도 꼭 사모님께서 받으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앞으로도 사모님께서 어린 아드님을 지키실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채도하는 그간 한영숙의 배를 불려주었던 자신의 재산을 한영숙의 전 며느리에게 몰아주고 한영숙의 명예를 빛내주었던 진성을 떠나버렸다.

한영숙의 아들에게는 이제 돈도, 진성의 황태자라는 타이틀도 남아 있지 않도록.

언젠가 복역을 마치고 나올 한영숙이 그때 가서 또다시 아들에게 기대할 수 있을 콩고물조차 전부 사라져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 이 사람이 정말…….”

“어린 아드님을 위해서라도 사모님께서 반드시 받으셔야 한답니다.”

사실 그전에도 이미 정말 멀어져 버린 그였다. 서하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의 내막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는 이미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렸다.

마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처럼. 그는 그렇게 망연하게 굴었었다.

그럼에도 지금이 더욱 가슴 아픈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가 포기한 것 중에는 그가 가장 소중하다고 말했던 이현서와 그의 아이 도현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서.

이제는… 그가 아주 가 버린 것 같아서.

물론 현서는 자신이 그를 버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로 하여금 전처와 아들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니니까.

이 슬픔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저와 도현의 얼굴도 안 보고, 그저 기약도 없이 떠나버렸다.

아마도 마지막 인사를 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겠지. 제 어미가 한 행각에 차마 그럴 면목이 없었겠지.

알고는 있지만. 머리로는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너무해, 채도하…….

어떻게 이렇게 모든 걸 자처해서 잃어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이러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이러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이래놓고 벌써 한국을 떠나버렸다니.

더는 같은 하늘 아래 없는 사람이라니까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이현서가 거절할까 봐, 거절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으려고 멀리 떠나버린 것이다.

넋이 나간 채 눈물 흘리고 있는 현서의 허탈한 얼굴을 보며 정 변호사가 애잔한 목소리로 종용했다.


“전무님의 이런 배려를 받아들여 주세요, 사모님.”

현서는 젖은 눈을 돌려 정 변호사를 보았다. 간절하게 말하는 정 변호사도 꼭 울 것 같이 보였다.


“전무님께 사모님과 아이가 오죽 애틋하면 이러시겠습니까.”

오랜 시간을 채 회장님과 채도하와 함께 해온 정 변호사는 이 모든 사정과 사연을 알고 현서에게 달려온 것이다. 채도하의 마음을 대변하기 위해서.

현서는 두 눈을 지르감았다.

채도하의 마음.

이제는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받지 않는다면 그의 마지막 마음마저 무시하게 되는 것 같아서.

***



“현서. 나랑 같이 미국 갈래?”

티타임을 가지던 중 돌연 루카스가 던진 말이었다.


“언제? 출장이야? 내가 미국에서 해줘야 할 일 있어?”

“아니. 아주 가자고. 송화궁은 여기 사람들한테 맡기고 현서는 나랑 미국에서 새로운 일 하면서 살자고.”

“…….”

갑작스러운 제안에 현서는 머뭇거렸다.

루카스가 올해 안에 송화궁 일에서 손 떼고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때 가서 하게 될 사업을 함께하자고 제의하고 싶은 모양이다.

현서는 그의 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차갑게 내린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침묵하고 있자 루카스가 이어서 입을 뗐다. 그런데 그가 뱉은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이건 내 청혼이기도 해, 현서.”

현서는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꼴깍 커피를 삼켜버린 현서가 동그래진 눈으로 루카스를 쳐다보았다.


“뭐, 뭐라고?”

“이제는 정말 도현이의 아빠로 함께하고 싶다는 말이야.”

“…….”

연달아 던지는 파격적인 고백에 현서는 무엇에부터 당황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나랑 같이 떠나자, 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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