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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아빠도 도현이 사랑해? (68/92)


#68. 아빠도 도현이 사랑해?
2022.11.24.



 


“안타까워서 어째요…….”

두 달간 공들여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도현의 친할머니라는 것까지 인증을 했으니 딱하게까지 봐주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고맙게도.


“저 계속 이렇게 도현이 얼굴 봐도 되겠죠?”

“도현이야 어차피 그 시간에 매일 놀이터에 가는 게 평일 루틴이니까요. 이렇게 놀이터에서 잠깐 얼굴 보시고 가는 것만이면, 뭐……. 도현이도 워낙 미미를 예뻐하고요.”

“아이구, 너무 감사해요.”

영숙은 온화하게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애초에 이렇게 다 넘어온 관계라 생각해서 사실을 실토한 것이기도 했다.


“참, 제가 선물 하나 준비했어요. 빈손으로 부탁드리기도 그렇고 해서.”

“네? 아이고, 뭘요.”

영숙은 가지고 온 쇼핑백을 테이블 위로 건넸다. 쇼핑백 안을 흘끔 들여다본 시터는 눈이 불쑥 커지더니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어머, 이렇게 귀한 건 못 받아요!”

그건 가방이었다. 시터는 얼른 다시 가방을 쇼핑백 안에 넣어 영숙에게 도로 주었다.


“괜찮아요. 그동안 도현이 보게 해주신 것도 고마워서 그래요.”

“그래도, 이건…….”

“나 진성 총수가의 안주인이에요.”

“예? 진성……이요?”

진성이라는 익숙한 두 글자에 불현듯 시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숙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현서가 한 번도 말 안 했어요?”

“예. 저는 이 원장님 과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 진성 맞아요. 그러니까 고작 이 선물 하나 사는 돈, 나한테는 돈도 아니에요.”

아직은 진성이라는 이름을 팔만 했다.

진성가에서 떨어져나왔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에 친해져야만 신뢰감이 더 쌓인 상태에서 도현을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


“어우, 그래도 이건 무려…….”

시터가 송구스럽다는 듯 입을 뗐다.


“에르메스 아니에요?”

영숙은 어깨를 세우고 당당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가방은 이전에 현서에게 퇴짜맞고 되돌아온 에르메스 가품이었지만 말이다.

재활용을 아주 제대로 하게 되네.


‘후후, 어차피 그걸 이런 행색의 여자가 알 리는 없겠지. 딱 보아하니 속아 넘어갔네.’

영숙은 계속해서 푸근한 말투로 나긋이 말했다.


“내 정성이니까 받아둬요. 안 그러면 내가 더 미안해지니까.”

이제 이 한영숙이도 어엿한 투자회사의 대표다 이거야.

배당금도 받고 있어서 손주 맛있는 거 정도는 사줄 수 있었고 이제 곧 투자금도 뻥튀기되어 목돈도 만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립해 자리 잡아가고 있으니, 채 회장이나 도하의 도움 없이도 도현이와 함께할 수 있겠지.


“이렇게 하루에 단 30분이라도 도현이 얼굴 볼 수 있다면 난 더 바랄 게 없어요. 그 시간이 나한테는 에르메스보다 더 큰 가치니까요.”

“어휴, 그럼 감사히 쓸게요. 너무 감사해서 어째요.”

“아니에요. 좋아하시니 뿌듯하네요. 이제 전 일어나야 할 거 같네요.”

“네네, 그러고 보니 진성 사모님이시면 바쁘시겠어요! 이따가 도현이 놀 때 또 뵈어요.”

“그래요.”

선물을 먹여놓으니 역시 태도가 달라지는 건지. 이렇게 알아서 이따 보자고 하고.

그렇게 도현과 친해지는 길은 순조롭게 열린 듯 보였다.

***



“엄마, 도현이는 아빠 있어?”

이번에는 유난히 이 질문에 당황이 되었다.

아이라 주기적으로 이 질문을 하곤 했다. 말해주어도 어려서 또 금방 잊는 모양이다.


“도현이는 아빠가…… 없지.”

이제는 이 말을 해주면서도 더 가슴이 아파져 왔다.


“아빠가 없는 애들은 없대!”

도현은 그 작은 머리로 열심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오늘 놀이터에서 만난 미미네 할머니가 그랬는데. 원래 모든 아이들은 다 아빠가 있다고.”

현서는 곤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 마냥 아빠란 원래 없는 존재라고 둘러댈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랬구나…….”

“엄마. 그럼 도현이도 아빠가 있어?”

“…….”

“도현이도 아빠 보고 싶다.”

더는 답을 피할 수 없었던 현서는 낮은 한숨 끝에 결국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음……. 그래. 사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이 아빠가 있고 도현이에게도 아빠가 있지만, 도현이 아빠는 아주 멀리 있어.”

엄마에게서 아빠가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된 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어디 있어?”

“우리가 만날 수 없는 곳.”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도 가장 먼 곳에 있는 게 네 아빠란다. 엄마와는 단순히 이혼 그 이상의 이별을 해버리고 만 네 아빠는.

도현의 눈빛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왜 만날 수 없어?”

이제 다섯 살 되었다고 질문할 때의 표정도 제법 예리해졌다.


“아빠에게는 도현이랑 엄마가 가장 소중했지만, 우리가 함께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었어.”

현서는 도현의 자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우리 도현이가 좀 더 크면 엄마가 더 자세히 말해줄게.”

너에게는 어여쁜 누나가 있었다는 것, 어른들이 그 누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 그 가운데엔 아빠와 가까운 누군가의 나쁜 방해가 있었다는 것.

이 모든 사실을 언젠가는 말해줘야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어린 너를 슬프게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지금도 이미 도현의 눈빛은 슬퍼 보였다.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아빠를 그리워하는 눈빛이었다.


“그럼 아빠도 도현이 사랑해? 엄마처럼?”

현서는 그 답에는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몇 초 후에 대답해야 했다.


“그러엄. 아빠는 지금도 도현이 너무너무 사랑해. 그것만은 우리 도현이가 꼭 알아줘야 해.”

그러나 아이의 슬픈 얼굴 앞에서 먼저 울어버리는 건 현서였다. 그녀는 이곳에 없는 누군가도 지금쯤 도현을 생각하며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사무실의 커다란 책상 앞 회전의자에 앉은 영숙은 앞에 놓인 명패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표이사 한영숙]

투자한 금액에서는 배당금이 따박따박 나왔다. 비서의 깍듯한 대우가 영숙의 콧대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게 했다.

같은 모임의 여사들도 높은 비율로 나오는 배당금을 보고는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하기 위해 영숙의 비위를 살살 맞추려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배당금을 받고 그 돈까지 더하여 또 재투자하면서 더 늘어난 배당금을 받는 재미가 쏠쏠한 게 인생을 사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오늘도 출근한 영숙은 중역 의자에서 비서가 내려다 준 커피를 마시며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Rrrrrrrrrrr―

벨 소리가 꽤 길게 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는 비서가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안 받고 뭐 하는 거야?”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아직 복귀하지 않은 모양이다. 영숙은 비서를 욕하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예, 투자회사 엔젤스 컴퍼니, 대표이사 한영숙입니다.”

-한 여사? 아니, 한 대표!

“어어, 안 여사구나? 웬일이야?”

-월요일에 들어와야 할 배당금이 아직 안 들어왔거든.

“그래? 나는 아직 확인을 안 해서 모르겠는데.”

-한 대표가 사장인데 그것도 모르면 어떻게 해!

“조금 늦나 보지. 무슨 일인지 내가 알아보고 연락해 줄게.”

-알았어, 얼른 해결해 줘.

투자자가 짜증 섞인 말투로 따지다가 전화를 끊자 영숙은 혼자서 투덜거렸다.


“기다리면 염연히 잘 들어갈까. 성화는…….”

영숙은 곧장 동철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오랫동안 신호가 갔다.

결국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자 영숙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계속 신호가 가는데 동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쁜가 보네.”

영숙은 동철에게 문자를 남겨놓았다. 그러고는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남은 커피를 마셨다.


“배당금이 며칠 늦을 수도 있지, 안 여사는 뭘 또 그리 오두방정이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영숙은 키폰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그런데 이쪽도 신호가 오래가도록 아무도 대답이 없다.


“아니, 무슨 밥을 한 시간이 넘도록 먹고 있어. 오늘따라 비서까지 속을 썩이나.”

영숙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에이, 모르겠다.”

할 일도 없는데 노곤했던 그녀는 그대로 잠을 청했다.

.
.
.

쾅쾅!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와 와글와글, 시끄러운 소리가 영숙의 잠을 깨우고 있었다.

락이 걸려 있던 회사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영숙의 사장실 문도 활짝 열렸다. 동시에 몇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저기 있다!”

개중 한 명이 영숙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며 달려들었다.


“너 잘 잡혔다!”

달콤한 낮잠에 빠져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영숙은 지금의 상황이 잘 판단되지 않았다.


“왜, 왜 이래!”

“어디서 사기를 처먹으려고!”

“뭐라는 거야! 놔! 감히 어디서 내 멱살을 잡아!”

제 멱살을 잡은 사람의 손을 뿌리치려 버둥대며 영숙은 화를 냈다.


“사기꾼 X 주제에 뻔뻔한 거 보게?”

“뭐야? 사기꾼 X?”

“이 사기꾼 다들 잘 막아! 도망 못 가게!”

“누가 사기꾼이라는 거야? 이 인간들이 지금! 이거 안 놔? 당신들 다 경찰에 고소할 거야.”

“뭐 경찰? 불러! 이 사기꾼 X이 어디서 경찰을 찾아.”

“자꾸만 누가 사기꾼이래? 그 배당금 좀 늦는다고 지금 이 지랄들인 거야?”

사기꾼이라니 영숙은 황당하기만 했다.

이런 때에 장동철은 하필 아직 소식도 없고. 이 인간들이 이렇게 들이닥치도록 비서는 아직도 자리에 없나 보다.


“기다려봐! 내가 장 사장한테 전화해 볼 테니.”

되레 큰소리를 친 영숙은 동철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원이 꺼져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신호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전원까지 꺼져 있으니 영숙은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왜,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지?”

“이 여편네가 어디서 개수작질이야!”

그러나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던 투자자들은 그녀의 상황을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


“자, 잠깐만! 지금 당장은 연락이 안 되니까, 다들 일단 기다려요. 내가 알아보고 연락해 줄 테니까, 오늘은 우선 돌아가시고.”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라는 거야? 빨리 내 돈이나 내놔!”

“지금 내가 어떻게 당장 돈을 줘요? 내 돈도 잔뜩 물려 있는데! 지금은 이렇게 몰려와봤자 소용들 없으니까 좀 가라고!”

“뭐야? 이 사기꾼 X이!”

“아아악!”

되레 버럭 소리치던 영숙은 급기야 머리채를 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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