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나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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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나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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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나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2022.11.21.
“나 아니었으면…… 나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네가 그런 지독한 일을 겪을 일도 없었겠지.”
삽시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채도하의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오빠 탓 아니에요. 서하 일로 오빠 원망해 본 적 없어요.”
현서는 울먹이며 말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오빠랑 결혼한 것도 내 선택이었어요.”
그가 절망하게 될 건 필연적이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탓하는 걸 상상하지는 않았다.
지금 이 시간이 누구보다 괴로울 건 누구보다도 이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제 혈육 때문에 제 혈육이 다치게 된 상황을 알고 나서 고통에 빠져 있을 그가 너무도 애석했는데, 그는 그걸 넘어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지 마요.”
참을 수 없는 비탄의 잠겨 있던 그는 그동안 이현서의 비탄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영숙과 주혁의 허물로 인해 자신이 괴로운 만큼, 자신의 아내였던 여자이자 서하의 엄마인 이현서의 슬픔에 침잠하고 있었다.
그는 이현서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현서는 그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실감할 수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현서는 몸을 굽혀 앉곤 두 손을 뻗어 도하의 두 손을 잡았다.
“일어나요.”
현서의 손에 이끌려 그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피폐해진 눈동자는 허공을 보고 있었다. 눈앞에 무엇도 보이지 않는 듯 초점이 없었다.
현서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초점 없던 그의 눈동자에 문득 초점이 돌아오고 그 동공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금세 그 눈동자도 현서의 눈동자처럼 젖어 갔다.
“약해지지 말고…… 잘 지내요.”
현서의 눈에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아이를 잃은 것도 장이 끊어지는 비애인데, 아이가 죽게 된 그 이유가 너무도 아팠던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래도 우린 살아가야 하잖아요.”
현서는 그저 도하를 달랬다. 그러나 도하가 허망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그 질문에 당황한 현서는 답하지 못했다.
“…….”
제게는 새롭게 찾아온 천사, 도현이가 있어서 그 아이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이 사람은…….
도현이에게도 아빠로 남지 못하는 이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라고 해야 할까.
안타까운 얼굴로 대답은 하지 못하는 현서에게서 도하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끝내 몸을 돌렸다.
현서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붙잡을 수 있는 이유란 게 전부 사라져버렸으니까.
이제는 완전히 끝나버린 인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쓸쓸한 뒷모습은 그렇게 천천히 멀어져갔다.
***
“영숙 씨, 좀 앉아 봐.”
외출했다가 돌아온 동철이 심각한 분위기로 소파에 앉자 영숙은 제꺽 그와 마주 앉았다.
왠지 그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것만 같아 그녀는 기대감에 부풀고 있었다.
“여기저기 발품 팔면서 최대한 알아는 봤는데. 마땅한 투자처가 없어. 첫째는 안전하고 수익성이 좋아야 하는데.”
잔뜩 설렜다가 동철의 말에 짜게 식은 영숙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럼 어떻게 해?”
“뭐, 사실 한군데가 있기는 해. 근데 거긴, 놓치기는 아까운데 영숙 씨한테는 좀 무리일 거야.”
“왜?”
“자금이 최소 30억이 넘어야 해서. 다른 데 잘 찾아보자.”
영숙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뗐다.
“잠깐만, 그럼 방금 말한 30억 넘는 데는 믿을 만한 곳이야?”
“응, 사실은 지금 우리도 투자하고 있는 곳이야. 여기보다 확실한 데도 없어.”
동철이 말에 영숙은 귀가 솔깃해졌다. 지금까지 자기에게 나오는 배당금만 봐도 얼마나 수익성이 좋은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자리가 생겼대?”
“그게 실은……. 이 양반이 지병이 있으셨는데 최근에 돌아가셨거든, 자녀들이 고민하다가 결국은 투자금 빼서 유산으로 나누기로 했대. 딱 그 틈을 파고들 기회긴 하지. 근데 영숙 씨 자금으론 어차피 안 되니까 나도 얘기 꺼낼 생각도 없었다가 그냥 말이나 꺼내 본 거야.”
“그래? 아깝긴 하네.”
영숙은 동철의 말을 듣는 순간 운이 탁 트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 있는 내 명의 집까지 처분하면 채 회장이 준 돈이랑 합쳐서 30억은 거뜬히 넘기는데. 그걸 급매로 내놓지, 뭐.”
영숙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당장에 모자란 현금 때문에 사라져버린다고 생각을 하니 똥줄이 탔다. 겨우 20억밖에 주지 않은 채 회장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성가시게 말이야.
“자금 준비할 수만 있다면 영숙 씨가 최대 투자자니까 당신을 대표이사로 올릴 수도 있거든. 아쉽다.”
“대표이사까지?”
“그럼, 내가 일을 허술하게 하겠어,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당신한테 지위랑 돈, 두 마리 토끼를 다 가지게 해줘야지.”
영숙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렇게 되면 채 회장에게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난 뒤에도 여편네들 사이에서 조금은 어깨를 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흠……. 그럼 어떻게든 내가 한번 마련해볼게.”
어차피 채 회장과 찢어졌다는 소식이 퍼져나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채 회장이나 도하나 그리고 그 측근들이나 다들 입이 무거워서 망정이지, 쪽팔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이것이 한영숙이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인생 역전의 기회였다.
돈도 명예도 손자도 전부 다 놓칠 수 없다 이거야!
***
어느덧 목련이 개화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는 꽤 춥더니 오늘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이제는 도현도 어엿한 유치원생이었다.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3월이 되어 이제 막 유치원에 입학했다.
현서가 출근하고 없는 날의 아침이었다. 도현의 등원 준비로 집 안 분위기가 바빴다.
“이모! 문자 왔어!”
도현이 알려주어 시터가 전화기를 확인해보니 미미네 할머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오후에는 종종 시간을 정해 미미와 함께 산책을 나오시곤 하는데, 아침부터 연락이 온 건 의외였다.
[미미네예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시간 내서 만나주실 수 있나요?]
시터는 어리둥절했다. 서로 안 지 두 달이 넘긴 했지만 따로 만나자고 한 건 처음이라 무슨 일인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그럼 도현이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잠깐 그 공원에서 뵐까요?]
[좋아요. 고마워요.]
.
.
.
공원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 앞에 있는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제가 음료 살게요, 이렇게 시간 내주시니까 죄송해서.”
“아이구, 감사히 마실게요.”
두 사람은 음료를 마시기 시작하며 평소처럼 자연스레 일상의 소소한 화제로 대화의 문을 열었다.
“날씨가 많이 풀렸네요.”
“그러게요.”
“도현이는 유치원 잘 적응하고 있나요?”
“네. 어린이집보다 더 재밌다고 하네요.”
“아휴, 기특해라. 도현이는 정말 귀여워 죽겠어요.”
영숙은 흐뭇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시터도 그렇죠, 하고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그런데 돌연 한숨을 내쉬는 영숙을 보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도현의 시터가 물었다.
“저, 그런데 오늘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나요?”
영숙은 더욱 진지한 표정이 되어 시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후우……. 제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아주 많이 놀라실 거예요.”
별안간 알 수 없는 소리에 시터를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왜요?”
영숙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앞에 있던 물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빈 컵을 내려놓은 그녀는 마침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실은…….”
“네.”
“실은…… 내가 도현이 친할머니예요. 흐흑…….”
말끝에서 영숙은 울음을 훅 터뜨렸다. 동시에 시터가 놀라자빠질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네? 누구시라고요?”
“내가 도현이 할머니라고요. 내가 전에 말했던 손자가 도현이에요.”
“…….”
입이 떡 벌어진 시터를 보며 영숙이 이어갔다.
“현서랑 내 아들이 이혼하는 바람에 이렇게 내 손자랑도 생이별한 사이가 되었답니다. 이렇게 할머니 얼굴도 모르고 크고 있잖아요.”
“하아, 그러셨군요. 어찌 이런 일이…….”
시터는 당혹스러웠다. 미미네 할머니가 ‘현서’라고 도현 엄마의 이름을 편히 부르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도리어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도현이를 보러오셨던 거군요.”
“맞아요. 이제 이야기해서 너무 죄송해요.”
훌쩍훌쩍 울며 사과하던 영숙은 테이블 위에 있던 냅킨으로 눈물을 훔쳤다.
“아이고, 참……. 그래서 그렇게 도현이를 예뻐하셨던 거군요.”
“이것 좀 보세요.”
영숙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사진들이었다. 현서와 도하의 결혼사진, 그리고 도하의 어린 시절 사진.
“어머, 세상에! 이분이 도현이 아빠였어요?”
연신 기절초풍할 듯이 놀란 시터가 외쳤다.
“보신 적 있나요? 걔두 가까이 이사 왔는데.”
“네, 맞아요! 옆집 사시는 분이네요!”
“그래요. 제 와이프 다시 찾겠다고 별짓을 다 해요, 걔가. 옆집에 이사까지 하고.”
이어 영숙은 혀를 찼다. 얼마나 현서 고것의 꽁무니를 쫓아다녔으면 베이비 시터까지 얼굴을 다 알까. 한심한 놈.
“어머나, 어째. 그분이 이 원장님 전남편이셨다니. 그래서 그분도 그렇게 도현이를 예뻐하셨었구나. 이제 생각하니 눈빛이 남달랐던 것 같네요. 이런 인연들인 줄도 모르고…….”
“이게 도현이 아빠 어릴 때 사진이에요.”
영숙은 도하의 어릴 적 사진을 쓱 밀어서 시터에게 가까이 보여주었다.
“어머, 어쩜! 어릴 때 얼굴은 정말 많이 닮았네요! 그러고 보니 지금도 많이 닮았는데 왜 몰랐나 싶네요. 도무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해서…….”
“정말 기구하죠. 사실, 오늘은 부탁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영숙이 문득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무슨 부탁이신데요?”
“음……. 제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고, 그냥 지금처럼 도현이 놀 때 놀이터에서 얼굴 볼 수 있게만 해줘요. 그거면 돼요.”
“아…….”
예상대로 시터는 크게 고민하지는 않는 듯이 보였다. 밖에서 노는 시간에 거기 와서 잠깐 얼굴 보는 일은 지금도 늘 하는 거라 부담감이 없는 듯했다.
“현서한테는 비밀로 해주시고. 도현이에게도 할머니란 거 말씀하지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