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 내 인생에 끌어들여서 미안해 (66/92)


#66. 내 인생에 끌어들여서 미안해
2022.11.17.



 
영숙은 저를 비웃을 무리들을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그때 동철이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주었다.


“기다려. 내가 당신, 당신이 알던 사람들이 절대 무시 못 하게 해줄게.”

영숙은 쓰게 웃으며 제 어깨 위 동철의 손을 포개 잡았다.


“고마워, 역시 자기밖에 없어.”

“솔직히, 진성 회장만큼은 못 해줘도 아쉽지 않게 살게는 해줄 테니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숙은 취기로 붉어진 얼굴로 꿈을 꾸는 듯이 말했다. 그러다가 곧 울화가 터지는지 또 씩씩거렸다.


“아휴, 내 팔자야! 한영숙이 인생 뭐 이리 파란만장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 영숙 씨.”

“뭐, 내 팔자 내가 꼰 거긴 하지만…….”

영숙은 그날 해가 지도록 술병을 놓지 않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

아침 출근길이었다. 집을 나설 때도 현서는 옆집에 눈길이 갔다.

왠지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눈을 돌려보니 근처 어디에도 도하의 차가 주차되어 있지 않았다.

그날 저녁 이후 아마도 내내 들어온 적이 없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의 차 역시 그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고.

현서는 낮게 탄식하며 제 차에 올랐다.

간밤에 밤잠을 설친 건 물론이었다. 그날 이후 이틀이 흘렀지만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물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출근해서 원장실에 앉고 난 뒤 현서는 잠시 망설이다 도하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평일 오전인데도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러면 업무를 중단한 상태라는 의미였다.

이후 현서는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한 번 더 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통화 종료 패드를 눌렀다.

역시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이쯤 되니 일부러 꺼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도하는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는 모양이다.

가슴이 답답했다. 걱정되어 죽겠다.

현서는 끝내 채도하 전무라는 직함이 쓰인 명함을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그의 사무실 번호가 적혀 있었다.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몇 번 가지 않아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상냥하고도 사무적인 비서의 첫 말에 현서가 대답했다.


“윤 비서님. 오랜만이에요. 저 이현서예요.”

-사모님?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에요.

지극히 사무적이던 어조는 금세 변하여 반색으로 물들었다.


“윤 비서님, 잘 지내셨죠? 아직 채 전무님이랑 일하시고 계셨네요.”

-네, 네, 저는 여전해요. 사모님 건강하시죠?

“그럼요. 저는 더 건강해졌어요.”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저한테 잘해주셨던 몇 안 되는 분 중 한 분이 사모님이셔서요…….

현서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랬었다. 윤 비서와 김 실장처럼 도하의 지척에서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에게 현서는 아낌없이 잘해주었었다. 그때가 참 까마득했다.

안부가 몇 마디 더 오간 뒤 현서는 조심스레 용건을 꺼냈다.


“채 전무님은 지금 사무실에 계신가요?”

-아, 전무님은 이번 주 휴가셔요, 사모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예전에는 그토록 휴가 좀 내라고 잔소리를 했었는데, 지금은 그가 휴가 중이란 말이 이토록 두려울 수가 없다.


“……그래요?”

-네. 토요일 저녁에 갑자기 이번 주 모든 일정을 취소하셔서 깜짝 놀랐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지는 말씀도 안 해주셔서 안 그래도 많이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어요.

윤 비서는 그 뒷말을 아꼈다.

몇 년 만에 전화를, 그것도 도하의 개인 전화기가 아닌 사무실로 거는 전부인이라니.

아마 도하의 갑작스러운 잠수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눈치 빠른 윤 비서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 사람…… 많이 힘들 거예요.”

-아……. 큰일이 있긴 하셨나 보네요. 목소리가 워낙 안 좋으셔서 차마 여쭤보지도 못했습니다.

현서는 그 말에 주춤했다.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쑤셔왔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차분한 어조로 윤 비서에게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집안에 일이 좀 있었어요. 그 사람 돌아오면 윤 비서님이 더 많이 신경 써 주세요. 부탁해요.”

-네, 사모님. 제가 더 세심하게 신경 쓰겠습니다.

“고마워요, 윤 비서님.”

이혼한 전부인이 하는 부탁치곤 너무 이혼 전처럼 여상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현서는 저도 윤 비서도 이 대화를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화가 끊어지고도 현서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있도록.

어디 있는 거예요, 오빠.

나 조금 무서워져요.

***



“미미야! 할머니!”

도현의 청아한 목소리가 외쳤다. 아이는 담뿍 웃으며 달려와 미미와 영숙을 반겼다.


“도현이, 안녕!”

영숙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미도 그새 도현과 친해져서 꼬리를 흔들며 앞발을 들었다. 도현을 바싹 쫓아온 시터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며칠 만에 뵙네요!”

“왜 맨날 안 나왔어여?”

도현도 문득 해맑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시터가 이제 다섯 살이니 존댓말을 잘 써야 한다고 거듭 가르쳐놔서 오늘은 순순히 존대하면서.

시터도 웃으며 거들었다.


“도현이가 미미랑 할머니 많이 기다렸답니다.”

“…….”

영숙은 금세 눈물이 고인 눈으로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하다, 아가…….”

그러자 도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곁에 서 있던 시터도 놀란 기색이었다.


“할머니 왜 울어여?”

영숙은 도현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대답해주었다.


“할머니한테 슬픈 일이 있었단다.”

“무슨 일?”

“할머니한테 귀여운 손자가 있는데 이제 평생 그 손자와 함께할 수 없게 되었거든.”

영숙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가며 말했다.


“음…… 손자가 뭐예요?”

“하하, 우리 귀여운 도현이 같은 손자. 나한테 할머니라고 불러주는 아이지. 할머니 아들의 아들이야.”

“음. 슬프겠다.”

“도현이는 양가 할머니들을 잘 못 보았나 보구나. 손자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 거 보니.”

이어 영숙은 모른 척 그런 말을 흘렸지만 시터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도현은 울고 있는 영숙에게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영숙은 꽤 놀란 표정으로 가만히 아이를 함께 끌어안았다.


“아이구, 우리 도현이 할머니 위로해주는 거야? 우리 아가 마음씨가 참 따뜻하네.”

“힘드신 일이 있으셨나 보네요.”

옆에서 안타까워하던 시터도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네에. 제가 주책맞게 눈물을…….”

“가족 간의 일이 제일 힘든 거 같아요.”

“그러니까요. 이번에 아들 부부가 완전히 찢어져서 나만 손주 못 보게 생겼어요.”

“아아, 저런……. 그런 힘든 사연이 있으신 줄 몰랐네요.”

“안 그래도 늙어가며 손주 보는 낙, 그거 하나 기대하고 살았는데 이제 접어야 하려나 봐요.”

“어떡해요…….”

어른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도현은 제 나름 이해한 만큼 고개를 끄덕이며 영숙을 보았다.


“그럼 할머니! 이제 도현이가 놀아주면 되지.”

영숙은 잠시 멍하게 입이 벌어진 채 도현을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세상에, 우리 도현이 이렇게 착한 말을 다 하고. 그래, 할머니가 우리 도현이 보러 자주 올게?”

영숙은 아이의 토실한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네!”

도현도 뿌듯한지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얼굴을 꽤 한참 들여다보던 영숙은 문득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시터에게 말했다.


“미미가 안 나오면 도현이가 아쉬워하니까 나도 못 나갈 때는 연락 드릴게요. 도현이가 기다리지 않게.”

“그러실래요?”

“네, 우리 연락처 주고받아요.”

영숙이 먼저 시터에게 전화기를 내밀었고 두 사람은 자연스레 서로의 연락처를 저장하게 되었다.

***

오프인 날이었다. 평일 오프라 도현은 어린이집에 가서 집에는 현서 혼자뿐이었다.

도현이 집에 있으면 그나마 복작이는 분위기에 정신이 빼앗기기라도 할 텐데.

혼자서 조용한 집 안에 있자니 더욱 기분이 가라앉기만 했다.


“집이 너무 조용하네.”

평범한 나날이었다면 조용히 쉼을 만끽해야 할 하루가 지금은 초조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해가 드는 거실 소파에 앉아 좋아하는 홍차를 마시고 있을 때도 그랬다.

마치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닌, 벌을 서는 것처럼.

그때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다. 빠르게 화면을 확인하는 현서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내내 머릿속에, 가슴 속에 가득했던 이름이 떠 있었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오빠…….”

입안이 모래가 있는 듯 버석거렸다.


-……현서야.

“오빠 어디에요?”

이 사람 걱정 때문에 내내 애가 타고 곤란했다. 마침 그가 말했다.


-좀 만날 수 있을까?

만나자는 말이 두려워지는 건 한없이 내려앉은 도하의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그래요. 언제요?”

-언제라도. 네가 괜찮을 때.

“그럼 지금도 괜찮아요? 나 지금 집인데 도현이도 어린이집 가 있고 없어요.”

-그래. 그럼 금방 갈게.

짧은 통화가 끝나고 현서는 식어버린 홍차를 들이켰다. 그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좌절감이 드는 것 같았다.

끊겼던 연락이 닿게 되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지 않았다.

.
.
.

도하가 도착하고 대문 앞에서 그를 맞았을 때 현서는 왜 그토록 그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주일 새 핼쑥해진 그의 모습은 그럴 만도 하다 싶을 만큼 힘겨워 보였다.

대문이 열리면서부터 그는 현서를 시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고 현서가 대문을 닫고 나서도 그는 왜인지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서 현서를 보고만 있었다.

깊게 상처받은 그의 눈을 오늘은 피할 수가 없었다. 피하고 싶은데 피하고 싶은 마음보다 걱정이 더 커서 그러지 못했다.


“들어가요…….”

그러나 가만히 현서를 응시하고 있던 그는 들어가기를 택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찬찬히 무릎을 굽혔다.

놀라서 굳어진 현서의 눈동자에 그가 무릎을 꿇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

“……미안해.”

충격에 현서의 입술이 벌어졌다.


“너를 내 인생에 끌어들여서…… 미안해…….”

아연한 현서는 벌어진 입술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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