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파국 (64/92)


#64. 파국
2022.11.10.



“한영숙 씨는 아나필락시스에 빠진 서하를 병원으로 내보내지 않아서 방치했고, 결국 서하는 기도까지 부어서 호흡곤란이 왔어요.”

도하가 제 친모와 이부동생이 서하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걸 알면 크게 무너질까 봐 현서는 당시엔 이 사실을 모른 척 묻어두었었다.

서산댁은 철저한 을이었기에 절로 입막음이 되었다고 생각한 영숙과 주혁은 현서가 알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 안하무인이었다.

소중한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지만, 그런 집에서는 절대 키울 수가 없었다. 서하를 그렇게 보내고 어떻게 그 잔인한 집에서 또 아이를 낳을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도하만은 이 악몽 같은 진실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기에 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모르게 하는 것이 사랑했던 남자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당시엔 저를 향한 도하의 마음도 몰랐었고 그의 사랑도 볼 수 없었기에 그가 가족을 버리고 아이와 함께하도록 설득할 자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진실의 실체를 낱낱이 까 보여줘야만 하는 때가 오고야 말았다. 이것이 도현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한영숙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었다. 설령 채도하를 영영 아프게 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여기 있는 한영숙 씨와 한주혁, 이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서하는 지금도 살아 있을 아이예요.”

빼도 박도 못하게 몰린 영숙은 엉엉 울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주저앉았다.

사색이 된 주혁은 채 회장과 제 형의 눈치만 번갈아 가며 보고 쩔쩔매고 있었다.

혜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제 남편을 쏘아보고 있었다.


“회장니이임!”

끝내 영숙은 채 회장 앞으로 기어가다시피 다가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무지해서 그랬어요.”

채 회장이 벌게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제 바짓가랑이를 잡은 영숙의 손을 탁 쳐냈다.


“회장님! 저 안 버리실 거죠? 네?”

“입 다물어. 아직도 뚫린 입이라고 할 말이 있어?”

채 회장이 독설을 퍼붓자 영숙은 좌절하며 더욱 크게 울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현서를 보더니 현서에게도 기어갔다.


 


“현서야아아! 내가 정말 죽을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미 눈물져있던 현서의 얼굴은 냉담할 뿐이었다.


“맞아요. 서하가 죽었으니 죽을죄가 맞죠. 그런데 한영숙 씨가 죽으셔도 우리 서하는 돌아오지 않아요…….”

“현서야! 내가 그때는! 정말 그때는 미쳤었나 봐! 제발 용서해줘. 내 아들, 내 손자 봐서 용서해주렴! 내가 네 그 소중한 아들에게 피를 물려준 할머니잖니! 응?”

얼마나 이중적인 인간인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을 손녀와 아들과 며느리에게 저지르고도 며느리가 이 사실을 아는 줄 몰랐을 적엔 그토록 뻔뻔하게 굴더니.

모든 게 드러나니 용서를 구걸한다. 과연 저 반성이 진짜 반성일까. 이제는 진정성을 느끼려야 느낄 수가 없다.


“아, 피를 물려준 할머니라 하시니까……. 피를 물려준 손주는 저쪽 집에도 하나 있죠?”

얼어붙은 분위기 가운데 현서는 문득 혜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서. 동서에게도 선물이 있어. 녹취록이 한두 개가 아닌데 동서 딸이 나오는 것도 발견했거든. 아린이, 맞지?”

“예?”

혜미와 영숙의 얼굴이 동시에 변했다.


“지금 들려줄게.”

현서는 또 다른 녹음 파일을 틀었다.

새로운 녹취록에서도 영숙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아. 시끄러워서, 정말. 아이 하나 못 달래고 뭐해. 돈 받고 잘하는 게 뭐야, 정말.]

[사모님, 아린이가 졸린가 봐요.]

[졸리면 재우면 되지. 어떻게든 재워봐.]

[열심히 재워 보고 있는데 안 자네요.]

[얜 대체 왜 이렇게 우는 거야? 우리 집안엔 이런 애가 없었던 거 같은데. 혜미 고걸 닮았나…….]

[아아악, 엄마, 엄마!]

영숙과 서산댁의 대화였고 아린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녹취가 흘러나오자 영숙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으며 혜미 부부의 눈치를 보았다.

대화를 듣던 혜미와 주혁은 그 시기가 언제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아린이를 영숙에게 맡겨놓고 부부 둘이서 놀러 갔을 때였다.


[아린이가 안 자고 엄마만 찾네요. 아무리 달래도 울기만 해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서산댁. 얘 콧물 나오는 거 같은데 그 콧물약 좀 먹이자.]

[네? 콧물이요?]

[아, 왜. 먼저 먹다 남은 콧물약. 감기 걸렸을 때 그거 먹고 잘 잤잖아.]

[아린이 콧물 안 나오는데요?]

[내가 봤어, 콧물 나오는 거. 어디 있어? 내가 가져다 먹일게.]

“어머니!”

거기까지 녹취를 듣고 난 혜미가 귀를 찢을 듯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미치셨어요?”

영숙을 노려보는 혜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들고 있었다.


“서하도 죽게 하셨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신 거예요? 아린이마저 잡으실 뻔했잖아요!”

악을 쓰며 내지르는 혜미의 목소리에 영숙은 움찔움찔 몸을 움츠렸다.


“아이구, 혜미야. 내가 아린이를 잡다니. 고작 가, 감기약에 애가 잘못되겠니?”

“뭐라고요? 왜 이렇게 뻔뻔하세요! 이 상황에서 그런 변명이 나오세요?”

“미, 미안하다.”

“멀쩡한 애한테 감기약 먹여 재우는 미친 할머니가 어디 있어요?”

영숙은 벌거벗겨진 듯, 숨고 싶은데 숨을 데가 없어진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좀 전까지는 죄인으로 찌그러져 있던 주혁도 제 자식에게 해를 끼쳤다는 걸 알게 된 이 상황에는 제 엄마에게 화가 나는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씩씩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망연자실 넋이 나가 있는 사람은 도하였다.

난리 중에 그는 아연함에 창백해진 낯빛으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이내 위태롭게 비척대는 걸음을 옮겨 집 밖으로 나갔다.


“도, 도하야!”

영숙이 큰아들에게 손을 뻗으며 부르짖었다.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유용했던 존재가 등을 보였다.

현서는 도하의 뒷모습을 보며 그를 따라 몇 걸음을 뗐다. 그러나 끝내는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더욱 눈물로 부옇게 흐려져 갔다.

오빠…….

이제는 한영숙에게서 확실하게 도현을 떼어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채도하도 영영 잃어버린 것 같았다.

도하가 나가버린 빈자리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던 현서는 숨죽여 오열했다.

큰아들이 자리를 비우자 방금까지 넋 나가 있던 채 회장도 이윽고 찬찬히 일어났다.

그가 말없이 문밖으로 나가자 영숙은 부랴부랴 그를 따라나섰다.


“회장님!”

처절하게 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자 차에 타고 있는 채 회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채 회장이 직접 운전하고 왔기에 운전석에 오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회장님!”

그러나 영숙은 조수석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문을 닫고 난 채 회장이 그녀를 태울 생각이 전혀 없는 듯 차를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영숙을 없는 사람 취급하듯 눈길도 주지 않고 출발해버렸다.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른 채 영숙이 멍하게 골목길에 서 있는데 마침내 주혁 부부도 밖으로 나왔다.

안절부절못하며 나온 주혁은 제 엄마를 흘끗 보더니 곧 본체만체 지나가 제 차가 주차된 곳으로 갔다. 그도 그대로 제 코가 석 자인 듯 보였다.

혜미 역시 눈이 마주치자 차갑게 째려보며 남편을 바짝 따라 걸었다. 시모를 잡아먹을 듯한 눈빛이었다.

***

택시에서 내린 영숙은 고래등 같은 집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으리으리한 집이 내 집이던 시절도 이제 다 갔구나.

터덜터덜 걸어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채 회장이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영숙이 들어갈 때부터 노기가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가.”

“회장님…….”

“긴말 안 해도 알아먹겠지.”

영숙은 그녀를 매섭게 쳐다보는 채 회장의 눈동자를 슬쩍 피했다. 그녀를 혐오하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는 듯한 눈빛이었다.


“제 입장도 좀 들어봐 주세요.”

“무슨 입장! 내 귀한 손녀 죽게 해놓고 무슨 입장! 지금 바로 짐 싸서 내 집에서 나가란 말이야!”

“지금 어디로 가요. 이 밤에……. 이제 주혁이네도 못 가게 생겼는데…….”

영숙은 꼭 불청객처럼 앉지도 못하고 선 채로 훌쩍훌쩍 울었다. 씨근덕거리던 채 회장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내뱉었다.


“내일 날 밝는 대로 나가.”

“어, 어디로 가요, 제가…….”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네가 좋다고 놀아나던 놈들 중 하나한테 가던지.”

영숙은 채 회장이 하는 말에 정곡을 찔려 멈칫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이 집에 처음 들어올 때 약속했었지. 진성 안주인에 걸맞게 행동거지만 조심해준다면, 평생 그 안주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해주겠다고.”

영숙은 이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약속을 했었고 끝내는 지키지 못했다.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가 놓쳤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빈손으로요?

자포자기한 결국 영숙은 돈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법적 부부는 아니라도 남들 눈엔 사실혼으로 인정될걸요? 빈손으로는 못 내보내세요.”

“허…….”

영숙의 뻔뻔함에 채 회장은 혀를 내둘렀다.


“참 대단한 여편네야.”

이제는 기가 차지도 않았다.


“그래, 물론 빈손으로는 안 내보내지. 그래도 내 아들 낳아준 어미니까.”

젊은 시절 술에 취해 서로 밤을 보냈던 일에도 제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여겨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일방적으로 영숙이 원하는 금전적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서로 잊힐 때쯤 정혼자와 결혼하여 정착했는데, 뒤늦게 한영숙이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고는 영숙과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제 죄가 한없이 크다고 여겼기에 만약 당시 제게 처가 없었다면 영숙과 아들을 가족으로 맞을 생각까지 했을 것이다.

처를 밀어내고 들어앉고 싶다는 영숙의 요구에 부모님들이 곤란해했어도, 당시 채 회장은 영숙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아내에게도 너무 미안했다.

비록 결혼 전이었다지만 아내와 이미 정혼 상태에서 범한 과오였기에 아내에게도 참으로 못할 짓을 하고 말았으니 아내를 내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게 못난 남자인 제 탓 같았다. 두 여자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평생 사죄의 마음을 가지고 살기로 결심했었다.

사실을 알게 된 아내가 영숙의 아들 도하를 받아들이겠다고 해서 더욱 미안해지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영숙이 아들만 혼자 내줄 수는 없다 하여 대신 도하와 편히 지낼 수 있는 아파트를 강남에 사주고 매달 양육비를 넉넉히 주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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