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잔혹한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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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잔혹한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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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잔혹한 내막
2022.11.07.
“네가 원장일 줄이야. 진짜 개천에서 용 난 거 아니니?”
“진짜 어떻게 형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해요. 형님이 원장님인 줄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진작 알았다고 좋았겠니? 네가 나한테 뭘 잘했다고.
영숙과 혜미가 떠드는 이야기를 들으며 현서는 확실히 이 사람들이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느낄 뿐이었다.
만찬이 한창 무르익어가도록 현서는 젓가락을 들지 않고 있었다. 도하가 그런 그녀를 보며 의아해져선 물었다.
“너는 왜 전혀 안 먹고 있어.”
“난 생각이 없어서요. 많이들 드세요. 이제 이렇게 모일 기회도 흔치 않을 텐데.”
도하는 그 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이며 더욱 근심에 젖어 들었다. 현서는 또다시 그의 눈을 피했다.
“참.”
문득 현서가 그들 중 주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제가 빼먹은 게 하나 있네요.”
그녀는 잠시 주방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말했다.
“우리 서방님을 위해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뒀는데 말이죠.”
“오오, 정말요? 뭔데요?”
잔뜩 기대하는 주혁 앞에 현서는 꿈틀거리는 산 낙지가 가득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 이게 뭐야. 낙지?”
“그래요. 서방님. 많이 들어요.”
당황하던 주혁은 왜인지 찜찜한 얼굴로 현서를 보며 말했다.
“나 요즘 낙지 안 먹어요, 형수.”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보던 현서는 그 눈빛 그대로 입가를 살짝 말아 올렸다.
“왜? 왜 안 먹니? 주혁아.”
“뭐?”
갑자기 튀어나온 현서의 반말에 밥상 앞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갑자기 돌변한 현서를 보며 너무 당황해서 말문들이 막힌 것 같았다.
“왜? 기분 나빠? 우리 옆집 살던 시절엔 서로 동갑이라 그렇게 불렀잖아. 이제 나 네 형수도 아닌데?”
“형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농담치곤 무서워요.”
주혁의 옆에 앉은 혜미가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주혁은 휘둥그레진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더듬거렸다. 현서가 했듯이 함께 반말로.
“낙, 낙지는 안 먹을래. 치워.”
“그렇게 좋아하더니, 왜? 서하 가던 날까지도 좋아했잖아.”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흠칫 놀란 주혁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벌어졌다.
현서는 손으로 낙지를 한가득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많이 먹으란 말이야!”
동시에 현서는 손에 가득 쥔 산낙지를 주혁의 입에 처넣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식구들이 아연실색했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주혁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영숙이 일어나 현서의 손목을 휘어잡으며 외쳤다.
“네 딸이 낙지 먹고 세상 뜬 걸 왜 주혁이 탓을 해! 낙지 사 온 사람이 죄야?”
현서는 영숙에게 잡힌 손을 확 뿌리치며 영숙을 노려보았다.
“사 온 건 죄가 아니죠. 먹여서는 안 되는 아이에게 재미로 먹인 게 죄죠.”
그 순간 도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몸을 틀었다. 그의 머리가 조금 떨리는 게 보였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영숙과 주혁은 둘이 동시에 눈동자를 돌려 도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얼굴은 삽시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얘,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영숙이 주위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뱉어냈다.
현서는 칼날처럼 매서운 어조로 계속해서 실토를 이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한영숙 씨도 공범이고요. 알러지가 있다고 했는데도 무시했죠.”
영숙은 움찔 어깨를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큰아들에 이어 채 회장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채 회장의 눈에는 핏발이 붉게 서 있었다.
현서는 다시 주혁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낮은 어조로 씹어뱉었다.
“주혁아, 넌 우리 엄마랑 서하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어릴 적 다들 너 무시할 때 우리 엄마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니.”
“이, 이게 지금 우리를 모함하려 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로 뒤집어씌우려는 거야?”
영숙은 날카롭게 내지르며 현서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잡히기도 전에 현서가 그녀를 힘껏 밀쳐냈다.
뒤로 나동그라진 영숙은 허리를 부여잡고는 죽는소리를 했다.
“아이고, 아파라! 내가 오늘 여기서 며느리 손에 죽어 나가겠구나. 얘, 도하야! 너는 이런 패륜을 보고도 어찌 가만히만 있니?”
도하에겐 이미 어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가 혼란에 휩싸여 얼빠져 있는 사이 현서가 영숙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한영숙 씨에게도 낙지 좀 드려요? 아, 아니지. 한영숙 씨에겐,”
현서는 식탁 위의 한 음식이 담긴 그릇을 들어 쓰러진 영숙의 머리 위로 부어버렸다.
“이걸 드려야죠. 한영숙 씨가 그리도 좋아하시는 이현서 표 임자수탕.”
임자수탕을 뒤집어쓴 영숙은 창백해진 얼굴로 벙쪄 있었다. 그런 영숙을 보며 싸늘한 미소를 짓던 현서는 이어 다른 접시도 들어 그녀 위로 엎었다.
“이것도 드릴까요? 우리 서하 장례 치르고 온 다음 날에도 드시고 싶어했던 구절판이에요. 손녀 그리 보내고도 입맛이 여전히 좋으셨어요?”
악에 받친 목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어느새 현서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런데 찰나 그녀의 양쪽 어깨가 커다란 두 손에 잡혔다. 가까이 다가와 있던 도하였다.
“현서야……. 너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이야.”
도하를 보는 현서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거 같아서…….”
그녀를 보는 도하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오빠……. 서하가 어른들이 안 본 사이 혼자서 낙지 먹은 게 아니었어요. 해산물 알러지 있는 서하한테 낙지 먹인 거, 여기 있는 한영숙 씨와 주혁이었어요. 그걸 서산댁 아주머니가 보셨어요.”
현서의 어깨를 잡은 도하의 손이 힘 풀린 듯 스르륵 내려갔다. 채 회장의 눈도 번쩍 뜨여 있었다.
“우리 엄마가 자리 비운 사이 한주혁 씨가 산낙지 잘 먹는 아이들 보면 신기하다며 우리 서하도 먹어보라고 했죠. 서산댁 아주머니가 서하는 알러지가 있다고 말렸는데도 조금은 괜찮다고 서하 꼬드겨서 입에 넣었죠. 한술 더 떠서 애들은 알러지 음식도 자꾸 먹어봐야 낫는다면서 억지로 더 먹인 건 한영숙 씨였고요.”
현서의 입술 사이에서는 오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알러지 반응으로 고생하고 있던 아이를 병원도 못 가게 내주지 않았던 것도 여기 계신 한영숙 씨였어요. 아이가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 되어서야 구급차를 탔던 것도 그래서였어요.”
“아, 아니에요! 회장님!”
영숙은 엉엉 울며 채 회장에게 호소했다.
“이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도하야! 엄마 그런 거 아니다! 맹세코 내가 네 아이 잘못되게 한 적 없어!”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울고불고 두 사람을 붙들고 늘어졌어도 두 사람은 이미 현서의 말을 믿는지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듯 보였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는 들어보시면 알 거예요.”
차갑게 내뱉은 현서는 조용히 전화기를 꺼내 들고 무언가를 눌렀다. 그러자 곧 녹취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숙과 혜수의 목소리였다.
[아니, 뭘 자꾸 병원을 간대요. 무슨 그 정도 가지고 병원을 가요?]
[그래도 애가 자꾸 몸을 긁고 힘들어하니까, 가서 약은 지어와야죠.]
[그러다 말 거예요. 호들갑은…….]
[아까도 그렇게 말하셔서 한 시간이나 방치되었잖아요. 더 심해지고 있다고요! 이렇게 부었잖아요! 혹시 모르니까 큰 병원으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큰 병원은 무슨……. 큰 병원은 이 근처에 있지도 않은데.]
[서하 할아버지께 차 타고 같이 가달라고 부탁 좀 드리면 안 될까요?]
[우리 회장님이 무슨 운전기사예요?]
[그게 아니라, 손녀 일이니까…….]
수년 전의 대화가 흘러나오자 영숙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듣고 있었다.
그때 녹취록에서 서산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채 회장님은 골프 치러 가셔서 지금 안 계세요.]
이후론 다시 혜수와 영숙의 대화였다.
[그러면, 아! 집안에 기사님 계시지 않아요? 김 기사님이라고 했나…….]
[김 기사는 내 전용 기사고요. 사부인이 왜 내 고용인을 내달라고 해요?]
[하……. 지금 내가 김 기사님 운전하는 차 타고 싶어서 이래요? 손녀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게 사부인은 안 보이세요? 서하는 사부인 손녀이기도 하잖아요.]
[아, 그러니까. 난 우리 손주 그렇게 나약하게 키우고 싶지 않다니까요?]
[어휴, 됐어요. 내가 서하 데리고 택시 타고 다녀오면 되지.]
[그건 안 되죠! 서하는 이 집 아이인데 사부인이 내 허락도 없이 혼자 마음대로 데리고 나갈 수는 없는 거죠.]
[뭐라고요? 하, 참. 그럼 근처 소아과라도 다녀올게요. 동네 정도는 괜찮죠?]
[이봐요, 사부인. 거, 왜 자꾸 남의 집 애를 함부로 데리고 나가려고 하세요? 필요하면 내가 데리고 나갈 테니까 지금은 그냥 둬요. 애들 너무 병원에 의존해서 키우는 거 아니에요. 저런 알러지도 견뎌봐야 이겨내지.]
[아니, 우길 걸 우겨야지. 애 피부 벌게지는 거 안 보여요? 손녀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별로 심각해 보이지도 않는데 유난은……. 내 허락 없이는 나갈 생각 말아요. 서하 이리 내요! 서하야, 이리 와라. 할머니랑 있자.]
[아니, 사부인!]
[사부인한테는 외손녀잖아요. 우리 집 애예요. 사부인은 우리 집 손녀 마음대로 밖으로 내돌릴 자격 없어요.]
[그렇게 손녀가 중요하면 아끼는 만큼 애 병원에 좀― 서, 서하야! 어떡해, 얘 갑자기 왜 이래! 서하야!]
이후로는 혜수가 정신없이 서하를 부르고 서산댁이 함께 놀라는 소리가 담겨 있었다.
[애가 숨을 못 쉬나 봐요!]
[구급차! 구급차 불러요! 빨리!]
혼비백산의 상황에서 녹취는 곧 꺼졌다. 아마 직후 구급차를 불렀던 것 같다.
녹취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아는 내용인데도 다시 들으며 현서는 꺽꺽 울고 있었다.
녹취를 다 듣고 난 도하와 채 회장의 눈가도 젖어 있었다. 영숙과 주혁은 사지에 몰린 사냥감들처럼 덜덜 떨고만 있었다.
서산댁에게서 받은 자료였다. 서산댁은 영숙의 횡포가 지나칠 때마다 몰래 녹음을 해왔다고 했다. 덕분에 이것 말고도 꽤 많은 녹취록이 존재했다.
감히 내놓지 못하고 있다가 서하의 죽음까지 이르자 장례식이 끝나고 약 한 달 뒤 조심스레 현서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며 이걸 들려주었다.
현서는 결국 최근에 다시 서산댁을 만나 이 녹취록들을 공개하는 대신 사례금을 드리기로 했다. 그래서 서산댁이 채 회장댁 일을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