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최후의 만찬
(62/92)
62.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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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최후의 만찬
2022.11.03.
아이는 이내 아빠의 품에 안겨 인사를 나눴다.
“아빠가 빨리 운전해서 서하 코 자기 전에 꼭 돌아올게.”
“응. 아빠 안녕!”
현서는 도하와 현관을 나서면서도 자꾸만 아이에게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영숙과 한집에 친정엄마를 두고 가는 게 좀 걱정되긴 했지만, 서하만 두고 가는 것보단 나을 테니 이게 최선이겠지.
그러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고 나가며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현서는 차를 타고 가는 길에도 한 시간에 몇 번은 전화를 걸었다.
모임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엄마는 그저 웃기만 했다. 영숙이 별로 친절하게 굴지는 않지만 그래도 별로 참견은 안 해서 엄마는 무탈하게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일 잘 보고 조심히 돌아오라고. 자꾸 전화할 거 없이 거기 일에 집중하라고.
그래서 더는 전화도 걸지 않고 엄마 말대로 일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도 현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자꾸 아침에 헤어질 때의 서하가 눈에 밟혔다.
“오빠. 우리 너무 오래 안 있고 갈 수 있어요?”
“서하 걱정되어서?”
“네. 아니면 나 먼저 기차 타고 올라갈까?”
“아니야. 그냥 같이 일찍 가자. 얼마 안 가 1부 일정 끝날 것 같으니까. 2부는 생략하고 나가자.”
“그래도 되겠어요?”
“어차피 중요한 분들껜 인사 다 드렸으니까.”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던 현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1부 일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쯤 친정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직 일정이 다 끝난 건 아니었으므로 현서는 혼자서 회장을 빠져나와 조용한 복도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통화 패드를 누른 현서는 아주 잠깐 동안 입조차 열 수가 없었다.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는 순간부터 이미 통곡 소리가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엄마?”
현서는 덜덜 떨며 입을 벙긋거렸다. 아무 말도 듣지 않아도 엉엉 우는 엄마의 울음소리 자체가 절망적이었다. 본능적으로 서하가 떠올랐다.
“왜 그래요!”
-현서야아! 서하가! 숨을 못 쉬어! 어엉―
가능성 중 최악의 상황. 곧바로 현서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현서는 우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물었다.
“숨을 못 쉰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흐흐윽……. 낙지를 먹었대. 의식이 없어.
현서는 사색이 되어 떨었다. 서하에게는 해산물 알러지가 있었다. 알러지로 인한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온 것 같았다.
“엄마! 지금 어디예요!”
현서는 힘 풀린 다리로 일어나 달렸다.
-구급차 안이야. 흐으윽…….
“엄마! 지금 어느 병원으로 간대요?”
혜수에게서 병원 이름을 들은 현서는 엉엉 울며 도하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엄마, 내가 지금 빨리 갈게요! 전화는 끊지 마요.”
회장에 들어가 보니 1부 일정이 막 끝나서 사람들이 여기저기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 편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하가 보였다.
“오, 오빠! 서하가! 허어엉―”
엉망으로 우는 얼굴로 도하의 앞에 끼어든 현서를 보며 도하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서하가 쇼크가 온 거 같아!”
“뭐?”
“빨리 올라가야 해! 알러지로 호흡곤란이 왔대.”
그 길로 도하와 현서는 혼비백산 회장을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요란하게 사라지자 주변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해산물만큼은 철저하게 조심시키는 음식이었고 그건 친정엄마도 알고 있었다.
먹은 줄도 모르고 있다가 알러지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야 서산댁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친정 엄마가 화장실에 가신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먹은 것 같다고 했다.
현서는 내내 전화기를 붙잡고 울었고, 도하는 정신없이 운전하여 두어 시간 되는 거리를 한 시간 반 동안 내리밟았다.
하지만 병원에 도착하여 허겁지겁 응급실로 달려갔을 때 부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친정 엄마 혜수는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었고 의사는 망연하게 서 있기만 했다.
황급히 침상으로 다가간 부부가 마주한 건 이미 고요하게 잠든 아이의 모습뿐이었다.
“서하야?”
“서하야!”
부부가 절망적으로 아이를 붙잡으며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데 뒤에서 의사가 사망 선고를 했다.
말도 안 돼.
서하가 사망했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서하야!”
“안 돼, 서하야!”
통곡 소리가 퍼져나갔다. 이후 친정 엄마 혜수는 그대로 실신해버렸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아침에 작별인사를 하며 품에 안았던 아이의 온기가 아직 생생한데 그게 영원한 작별인사가 되었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당연히 암담했다. 세 살짜리 아이의 죽음 앞에서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현서는 정신을 놓고 우느라 손님들을 제대로 맞지 못했다. 도하와 채 회장이 자리를 지켰지만 그들 또한 정신이 나간 사람들처럼 보였다.
영숙과 주혁은 조용했지만 대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숙은 손님들이 오면 이따금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대며 같은 말을 했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생기네요. 아기가 어쩌다 알러지 음식을 집어 먹었는지. 내가 잘 돌보지 못한 탓이죠. 그 어린 것한테서 눈을 떼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람들은 하나밖에 없는 손주를 잃어 어떡하시냐고 영숙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서하의 외할머니 혜수도 세상을 떠났다.
많은 손님이 정신없이 오가고 있던 시간이라 그녀가 밖으로 나간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사인은 교통사고였는데 이상한 점이 많았다. 장례식장 앞에는 큰 도로가 있었는데 차들이 꽤 속도를 내는 곳이었다.
혜수가 사고를 당한 지점은 횡단보도도 아니었고, 왜 그곳에 혜수가 내려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운전자는 그녀가 일부러 뛰어든 것 같다고 주장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발을 헛디뎌 쓰러진 건지, 아니면 정말 스스로 뛰어든 건지는 블랙박스를 보아도 명확한 구분은 어려웠다.
그러나 뒤늦게 현서가 발견한 엄마의 문자를 보면 후자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현서야. 미안하다. 네 아기 못 지켜줘서.]
현서는 당시 아이를 잃고 절망한 자신에게 더 큰 슬픔을 남긴 엄마가 원망스러웠지만, 후에는 그런 엄마의 죄책감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날의 일이 현서와 도하 부부의 죄책감으로 남게 된 것이었다.
내가 지방에 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서하 곁에 있었더라면.
그러나 아무리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수없이 후회를 해보아도, 서하와 혜수는 돌아올 수 없었다.
***
“와, 형수! 오랜만이네요.”
“형니임!”
주혁 부부가 먼저 도착했다. 현서는 몇 년 만에 만난 그들 앞에서 속내를 감추고 한껏 미소를 지었다.
“어서들 와요. 오랜만이네.”
“어우, 형수, 진짜 놀랐잖아요! 임신한 채로 이혼한 거였다니. 진짜 대단해요, 형수.”
주혁은 놀랍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하곤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랬었죠. 사정이 있어서…….”
“진짜 요즘 형님 때문에 연달아 놀랐잖아요. 형님이 송화궁 루나 리 원장이라면서요?”
혜미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것도 들었구나.”
“네! 어머니가 이번에 손자 얘기해주시면서 그거까지 말해주셨어요.”
“그랬구나. 이야기는 천천히 풀도록 하고, 일단 앉아.”
식탁 위에는 현서가 오랜만에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가득했다.
“우아, 형수. 언제 이런 진수성찬을…….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리셨네요.”
“어머, 형님 음식 오랜만에 먹어보겠어요.”
신이 난 두 사람이 앉으려던 참에 초인종이 울렸다. 마침 채 회장과 한영숙이 도착했다.
“어서 오셔요. 아버님, 어머님.”
현서와 주혁 부부가 현관에서 맞이하자 영숙이 안으로 들어오며 힐끔거렸다.
“내 참, 여기가 얼마 만인지…….”
채 회장은 들어오며 말없이 현서를 보았다. 그는 조금 근심 어린 표정이었으나 현서가 무얼 하든 믿을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앉으셔요.”
영숙은 자리에 앉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현서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이는 어디 있니? 우리 손자.”
그건 채 회장도 궁금했는지 그 역시 진지한 얼굴로 현서를 보았다.
“아이는 때 되면 보여드릴게요.”
사실 도현은 지금 집에 없었다. 베이비 시터의 집에 가 있었다. 당연히 이들에게 소개해줄 생각도 없었다.
“천천히 식사부터 하셔요. 전에 좋아하셨던 음식들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 종일 준비한 음식들이에요.”
마지막으로는 도하가 도착했다. 어쩐지 염려스러운 얼굴로 들어선 그를 보며 현서는 그와 오래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수가 있었다. 지금 그녀는 채도하가 아닌 도현을 우선적으로 선택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오빠도 저쪽으로 앉아요.”
도하는 왠지 자꾸만 불안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자꾸 무언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내 모두가 둘러앉았다. 서로 섞이지 못해 훈훈하지 못한 분위기가 아주 요상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오늘 이들을 초대하여 이 자리를 마련한 현서의 얼굴이 가장 서늘했다. 그러나 그녀가 떼는 말은 다 친절해서 분위기가 더 묘해지고 있었다.
“더 좋은 곳으로 모실 수도 있었지만, 전에 제가 했던 음식들도 잘 드셨던 기억이 나서 나름 정성껏 차려봤어요. 부디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네요. 아버님, 어머님. 어서 먼저 뜨셔요.”
이윽고 채 회장과 영숙이 젓가락을 들며 식사를 시작했다.
모두 현서의 음식을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묘한 분위기를 읽은 도하나 채 회장은 어딘가 좌불안석인 듯 담담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현서가 음식을 하도록 집착적으로 부려먹곤 했던 영숙과 혜미, 주혁은 게걸스러울 만큼 현서의 음식을 잘 씹어댔다.
“형수 요리 오랜만에 먹으니까 진짜 더 맛있네요.”
“맞아요, 형님. 오래 그리웠어요. 역시 이 맛이야.”
무슨 자리인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즐기는 주혁 부부를 보며 현서는 나긋하게 웃었다.
“많이들 들어요.”
최후의 만찬일 테니까.
영숙도 임자수탕을 떠먹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시원하고 좋네. 얘, 그러고 보니 그 송화궁 임자수탕이 네 레시피였나 보다? 생각해 보니 원장 추천 임자수탕이었네. 어쩐지 맛이 익숙했다 싶었지.”
“그걸 알아차리셨어요? 신기하네요.”
현서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손도 많이 가는 임자수탕을 얼마나 자주 요구해댔었는지 새삼 기억이 생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