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단장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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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단장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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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단장지애
2022.10.31.
“뭐라고? 그만두겠다는 이야기야?”
“예. 인제 그만 쉬려고요.”
서산댁의 말이 폭탄선언처럼 들렸다. 영숙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왜? 아줌마 어디 아파?”
“이제 저도 여기저기 안 좋아지기 시작하네요.”
“혹시 어디 큰 병 생긴 거야?”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병원에를 가!”
“아휴, 사모님.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드려요. 안 그래도 좀 쉬면서 병원도 다니려고요.”
“그럼 몸 좀 나아지면 다시 나와 줘. 몸이 안 좋으면 고쳐서 쓰면 되지, 응?”
영숙은 꽤 간절하게 서산댁을 붙잡았다. 그럼에도 서산댁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잘 생각해. 서산댁이 어디 가서 이런 돈을 받고 일하겠어.”
“그건 그런데요, 사모님. 제가 이제 힘들어서…….”
물론 급여를 다른 데보다 훨씬 넉넉히 주는 건 사실이었다. 급여는 한영숙이 아니라 채 회장이 주는 거니까.
하지만 부려먹는 건 채 회장이 아닌 한영숙이었다. 급여에 비해 배나 많은 일을 시키는 것도 한영숙이었다.
“서산댁 돈 더 안 벌어도 돼? 아직 막내 대학 졸업 안 했잖아!”
“막내도 공부 끝냈어요. 올해 졸업식이에요.”
“그래? 그럼 노후대책은? 백세시대인데 돈 벌어야지.”
그러나 서산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좀 쉬었다가 다른 데 취업하면 돼요.”
“다른 데? 다른 데 어디? 어디서 오래? 아줌마 나이에 여기보다 더 벌 데가 있긴 해?”
영숙이 서운하다는 듯이 추궁하자 서산댁이 잠깐 주춤하다가 조곤조곤 뱉어냈다.
“사모님. 물론 제가 여기서 돈을 적게 받는 건 아니지만요, 노동 강도에 비하면 결과적으로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에요.”
“뭐?”
“이 넓은 집에서, 주방에서 식사 준비하고 치우는 일이랑 청소, 빨래 저 혼자서 다 보는 거 쉽지 않아요. 정원사도 따로 안 부르셔서 제가 정원까지 다 관리하잖아요.”
서산댁은 말하면서도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 집안에서 일하면서 못하던 일도 잘하게 되어버렸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라면 장점일까.
“크흠…….”
할 말이 궁색해진 영숙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사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산댁을 대신할 사람을 구하기가 더 어려운 것도.
워낙 바지런했던 현서가 나간 이후 사람을 추가로 고용해야 했는데 마음에 드는 인간들이 없어 안 했더니 서산댁이 더 힘들어할 만은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서산댁을 잡아야 했다.
“서산댁. 나 좀 살려주라. 서산댁 아니면 누가 내 마음에 들게 일을 해주겠어.”
“예? 제가 사모님 마음에 들긴 했었나요? 늘 혼내시기만 해서 제가 하는 일은 죄다 마음에 안 드시는 줄 알았네요.”
“으응? 내가 그랬어?”
“매일 밥상 올릴 때마다 반찬 투정을 하시고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훑고 다니시면서 확인하고 집 안에 먼지 한 톨만 나와도 성화시고 빨래 개키는 모양까지 마음에 안 들어 하시고 바꿔봐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고. 식기세척기 사용하는 거 찜찜하다고 하셔서 매번 손 설거지하느라 주방에 오래 있는 건데 굼뜨다고 독촉하시고. 겨우 숨 돌리면서 커피 한 잔만 마셔도 눈치 주시고 틈을 안 주시니, 이제는 관절이 닳을 것 같아요, 사모님.”
“아, 아니. 그거야…… 미안해, 서산댁. 내가 고용인을 좀 더 배려했어야 하는데.”
아쉬워진 영숙이 뒤늦게 서산댁의 비위를 맞춰보려 헤실거렸지만 서산댁의 표정은 완고하기만 했다.
“사모님 마음에 꼭 드시는 좋은 도우미 구하셨으면 좋겠네요.”
영숙은 벙찐 얼굴로 서산댁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붙잡기는 틀린 것 같았다.
***
5년 전―
지방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이번에는 도하가 각별히 여기는 지인이 주최하는 모임이었는데 그 지인이 부부가 동반하기를 추천했기에 현서도 함께 갔다.
어지간한 행사에는 도하 혼자 다니곤 해서 이번에는 모처럼 현서를 동반하는 거였는데 지방인지라 하필 길게 집을 비워야 할 상황이었다.
자기 자식도 잘 못 보던 영숙에게 세 살배기 서하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현서는 친정엄마 혜수에게 맡기려 했다.
당일 아침 일찍 준비를 마쳤다. 도하는 차고에서 차를 빼러 먼저 나갔고 현서는 서하의 겉옷을 입혀 방을 나오고 있었다.
“서하도 같이 가니?”
안 그래도 채 회장님과 영숙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영숙이 거실에 있었다.
“아니요. 아이들은 못 데려가는 자리라 친정에 맡기고 가려고요.”
“그럼 지금 애 데리고 친정에 먼저 가려는 거야?”
“네, 어머니.”
영숙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대번에 탐탁지 않은 표정을 했다.
“서하는 여기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데 그냥 집에 있으면 되지, 왜 굳이 친정에 데려다 놓니?”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이긴 했으나 영숙이 평범한 할머니는 아니었으니 이런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현서는 에둘러 말했다.
“아……. 어머니 힘드실까 봐요.”
“힘들 게 뭐가 있니. 원래 같이 살던 내 손주 내 집에서 보는 건데. 서산댁 아줌마도 같이 있고.”
당신 손주 당신 집에서 한 번 놀아주신 적도, 밥 한 끼는커녕 간식 한 번 챙겨주신 적도 없으니 힘든 줄도 모르실 것이다.
“서산댁 아주머니는 할 일이 많으셔서 얘만 보실 수가 없으니까요. 그냥 다들 편하게 계시라고 친정엄마한테 맡기고 갈게요.”
“아니, 왜 우리 집 애를 거기다 데려다 놓냐고.”
“예?”
영숙은 평소에도 사부인 혜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도하가 장모에게 잘하는 것도 싫어했고 아내와 처가에 방문하는 것도 싫어했다.
명절에도 갖은 꼬투리를 잡아 못 가게 하기가 일쑤여서 명절 전에 미리 몰래 다녀오는 적이 많았다.
한때는 옆집에 살면서 살갑게 언니라 부르며 혜수가 가져다주는 반찬을 좋다고 받아먹더니.
“거, 애 핑계로 친정 한 번 더 가고 싶어 그러니?”
“아니에요, 어머니. 그런 건 아니고요.”
“출가외인이라는 말도 모르니? 친정은 이제 남이야! 이래서 친정은 멀수록 좋다고 하지.”
도하가 나갔다고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일로 또 꼬투리다. 현서는 곤란한 얼굴로 영숙을 설득하려 했다.
“그냥 집에 저도 없는데 서하만 두고 가면 신경 쓰이실까 봐요. 아직 어려서 손이 많이 가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 애를 그렇게 함부로 밖으로 겉돌게 하는 거 아니다.”
막상 제 자식들은 어릴 때 혜수의 손에 툭하면 맡겨놓고. 남이었던 제 자식들로는 혜수의 신세를 잘만, 지더니 외손주인 서하를 맡기려니 함부로 겉돌게 한다니.
현서는 난감해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이렇게 실랑이를 오래 벌일 시간은 없는데 어찌하나 싶었다.
결국 큰 며느리가 멀리 가는 게 싫어서 이러시는 건가.
자신이 그냥 지방에 가지 말고 남아야 하나. 이제라도 차에 있는 도하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싶었다.
서하를 이 집에 두고 가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그러시면……. 서하 놓고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영숙은 현서의 물음에는 또 주춤했다. 다짜고짜 잡아놓고 막상 볼 생각을 하니 어려울 것 같았나 보다.
“흠……. 정 사부인에게 맡기려면 여기로 와서 보라고 해라. 애 밖으로 내돌리지는 말고.”
좀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영숙과 서산댁만 있는 집에 두고 가기는 맘에 걸렸으니 현서는 그렇게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그럴까요? 그럼 엄마보고 오시라고 할게요.”
그때 도하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서하를 안아 들며 말했다.
“나가자, 서하야. 외할머니가 기다리신다.”
“아, 오빠. 그냥 엄마더러 여기로 오시라고 하려고요.”
“그래? 갑자기 왜?”
“그냥, 아무래도 집에 서하 장난감도 많고 보기가 더 수월할 거 같아서요.”
“어머님 불편하지 않으시겠어?”
도하가 그 말을 했을 때 영숙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너는 사부인이 여기 와서 불편할 게 뭐 있니.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현서는 할 말은 많아도 하지 않는 심정으로 묵묵히 듣고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이였으면 덜 불편했을 텐데. 당신께서 어찌하셨는지 아들은 모르니 저렇게 당당했다.
“그럼 내가 지금 모시고 올게.”
“그럴 시간 돼요?”
“충분해.”
그런데 또 영숙이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아들 앞이라 그런지 아까보다는 유해진 말투였다.
“너네는 지방까지 내려가야 한다며. 너네 바쁜데 사부인은 그냥 택시 타고 오라고 하면 되지.”
그러자 도하가 영숙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럼 어머니가 김 기사님 보내주세요.”
김 기사는 영숙 전용 기사였지만, 현재 집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가 김 기사뿐이어서 그렇게 말했다.
“아, 아니. 사부인은 그렇게 해주면 오히려 더 불편해해. 그냥 내가 택시비 드린다고 해라.”
아들 앞에서의 영숙은 마치 사돈을 배려하는 척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택시비도 안 주면 그만이었으니.
거기다 도하는 현서와의 앞선 대화를 듣지 못했으니 어미가 하는 말들에서 심술 맞은 맥락을 읽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님 보내는 거 불편해하시면 내가 모시러 가야겠네. 그냥 이럴 시간에 빨리 다녀올게.”
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인 도하는 결국 차 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들을 더는 말리지 못한 영숙은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똥 씹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문이 닫히고 현서만 듣는 상황이 되자 곧바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저놈 자식은 제 엄마보다 장모를 더 챙기지.”
“설마요.”
현서가 민망한 듯이 웃자 영숙은 그녀를 쫙 쏘아보았다.
“네가 평소에 쟤한테 속살거리는 게 있으니 쟤가 더 저러지 싶다.”
“그런 거 정말 없어요, 어머니.”
현서는 시모를 달래다가 곁에서 혼자 딴짓을 하며 놀고 있던 서하를 내려다보았다.
“외할머니가 오신대, 서하야.”
“점말? 외함미 빠이 오라 그래.”
그 후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도하와 혜수가 들어왔다.
채 회장까지 나와서 서로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까지 본 뒤 현서는 도하와 나설 수가 있었다.
“부탁해요, 엄마! 서하야, 엄마 다녀올게.”
“응. 엄마 빠이 와.”
현서는 서하를 품에 넣고 평소보다 힘주어 꼭 안았다.
“응. 빨리 올게. 엄마가 서하 놓고 가서 미안해. 할머니들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응. 외함미랑 노꺼야.”
“그래. 우리 서하 착하니까 잘 있을 거야.”
토실한 뺨에 입을 여러 번 맞추고 난 뒤에야 현서는 아이를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