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결심
(60/92)
60.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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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결심
2022.10.27.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이제껏 현서가 대놓고 말하지 않아 아마 모르는 줄 알 것이다.
“소중한 아이를 또 잃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를 악물며 말하는 현서를 보고 영숙은 당황하여 시선을 휙 돌렸다.
“네가 지금 우리 집이 무슨 묫자리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구나.”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무언가를 알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스스로가 먼저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제 발이 저려 앉은 자리가 영 불편해졌는데 영숙은 가방을 챙기며 일어났다.
“아무튼, 난 네가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란다. 우리가 평범한 사람들도 아니고 소송까지 가봤자 괜히 세상만 떠들썩해지지 않겠니? 그 과정에서 아이도 힘들어질 거란 건 누구보다 잘 알 테니 너만 어리석게 굴지 않으면 충분히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란다.”
현서는 그 말을 들으니 시작도 하기 전부터 괴로웠다.
도현아……. 이를 어쩌니.
“며칠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렴.”
그 말을 끝으로 영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현서는 그녀의 뒷모습만 허망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는 걸까.
생각만으로도 두려워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피하고 이렇게 돌아왔는데.
이건 영숙을 떨쳐내는 길만이 아니었다. 채도하도 떨쳐내는 길일 것이다.
영숙 앞에서도 꾹꾹 참아냈던 눈물이 끝내 삐져나와 흘러내렸다.
도하 오빠…….
***
현서에게 준 며칠의 말미. 며칠간 영숙은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며칠 동안 태풍의 눈 속처럼 조용한 기분이 들었다.
이현서 고것이 순순히 내놓을 리는 없을 것 같고. 제 아이라면 끔찍이 생각하는 애니까 아무래도 애를 빼앗아오려면 그것이랑 싸우게 될 것 같은데.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현서가 발신자였다.
지난번 이메일을 보낸 이후 현서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던 덕에 알게 된 현서의 새 번호였다.
“나다.”
-어머니.
영숙은 귀를 의심했다. 의외로 현서가 공손히 어머니라고 불렀다.
별꼴이네? 태세가 전환된 건가?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전화기 속에서는 역시나 현서의 정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버님 어머님께 정식으로 제 아들 도현이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영숙은 눈을 크게 뜨며 전화기를 고쳐잡았다.
“정말이니?”
-예. 이미 아시게 되셨으니 소개해 드려야죠. 진작 그랬어야 하는데 숨겨서 죄송해요.
마치 예전의 현서를 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순하고 고분고분했던 시절의 이현서.
안 될 싸움이란 걸 깨달은 모양이지?
채 회장도 아직 말은 없지만 막상 손자를 보게 되면 애정이 생길 것이고 도하도 도현이 제 자식이니 설득하면 도하가 직접 친권을 가지는 방향을 원하게 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양육권은 못 가져오더라도 친권은 가져와야 한다.
현서가 제아무리 송화궁의 원장이라 해도 진성의 변호인단을 어찌 이길까.
“네가 이제 현실을 직시한 모양이구나. 정신을 차린 거니?”
-네. 오랜만에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서방님이랑 동서도 불러서 인사드리고 싶어요.
“주혁이네까지?”
-네. 복잡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으니 서방님네 아이만 빼고요.
“뭐, 알았다. 이제 걔들 부부도 이 일에 대해 알아야겠지.”
-그럼요.
현서가 발신자로 떴을 때만 해도 내심 긴장했던 영숙은 금세 고고해져선 목을 세웠다. 그녀에게는 또, 말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너도 알다시피 이런다고 해서 네가 나한테 한 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똑바로 사과해야 할 거야.”
-그래야죠.
“그래. 이제 도현이가 우리 집 아이가 될 텐데 너랑 내가 이렇게 남을 수는 없잖니. 네가 납작 무릎이라도 꿇으면 가끔이라도 도현이 계속 만나게 해 줄 의향은 있다.”
-만나 뵙고 할게요.
현서 이것이 미우나 고우나 금쪽같은 도현이의 어미였으니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다시 예전처럼 고분고분해진다면 아이를 보여줄 수도 있을 성싶었다.
내가 이렇게 관대하다니까.
“좋다. 그럼 언제 소개해줄 거니? 우리 집으로 오는 거지?”
-오랜만에 모이는 자리니까 이왕이면 제가 직접 만든 음식들로 대접해드리고 싶어요. 한남동 집은 너무 오랜만이라 이제는 저희 집 주방이 쓰기가 더 편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면 저희 집으로 모셔도 될까요?
영숙은 굳이 그 구질구질한 집에서 볼 게 무어냐고 쏘아대려다 그녀의 현 거주지를 알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너 좋을 대로 해라.”
-그럼 제가 아버님이랑 도하 씨 스케줄 맞춰서 약속 잡아볼게요.
“알았다.”
-그럼 곧 다시 연락드릴게요, 어머니.
“기다리마.”
-예.
의기양양해진 영숙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현서는 여전히 괘씸했지만 아이를 정식으로 소개받을 생각을 하니 그래도 전화를 끊을 때는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특히 도현을 떠올리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미네 할머니가 제 친할머니란 걸 알면 아가가 얼마나 반가워할까.
오늘도 만나러 가야지. 소개받는 날 깜짝 놀라게 해줘야 하니 오늘은 누군지는 말하지 않고 만나고만 와야지.
영숙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드레스룸에 들어갔다.
***
원장실 안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영숙과 통화를 마친 현서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전화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심을 하고도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설 길이 없었다. 이 폭풍이 지나고 나면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도현과 둘이서 행복할 수 있겠지?
행복…… 할 수 있을까?
현서는 애써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 고개를 저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번에는 채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서냐.
“예, 아버님.”
-그래. 무슨 일이니.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괜찮으시면 조만간 아버님 시간 되실 때로 제가 맞춰서 뵙고 싶어요.”
-그래, 알았다. 비서실에 이야기하마.
“어머님이랑 식구들 모두 함께 모인 자리에서 드리고 싶은 이야기라, 저희 집으로 초대 드리고 싶어요.”
현서의 말에 채 회장이 잠시 침묵을 흘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공기가 바뀌었음을 현서는 느낄 수 있었다.
-도하 어미랑 무슨 일 있었던 거니? 그 사람이 너한테 연락했던 모양이구나.
“아…….”
현서가 무어라 대답을 하지 못하자 채 회장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날 모든 걸 말씀드릴게요.”
-그날이……. 아주 중요한 날이 될 것 같구나.
“예, 아버님. 그날 너무 놀라지 마시고 지난번에 제가 드린 부탁 꼭 기억해주셔요.”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마.
“감사해요, 아버님.”
통화가 끊어졌고 현서는 멍한 얼굴로 전화기를 귀에서 내렸다.
.
.
.
퇴근이 조금 늦었던 도하는 주차를 마친 뒤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집 앞으로 다가가던 그는 그 앞에 서 있던 인영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현서?
마침 현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를 보고도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하는 그런 모습의 현서에게 다가갈수록 그녀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왜 나와 있어?”
“오빠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요.”
재회 이후 현서가 먼저 그를 찾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할 얘기가 있다는 말은 매우 반가울 말이었다.
“네가 먼저 얘기를 다 하자고 하고, 반갑네. 근데 그 반가운 말을 그렇게 싸늘한 표정으로 하는 걸 보니까, 기대해선 안 될 이야기를 꺼낼 모양이야.”
도하가 담담하게 내뱉는 그 말을 듣고 와락 밀려드는 슬픔이 현서를 덮쳤다.
“기대는…… 하지 말고요.
이제 이 사람에게도 알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모두가 알고 이 사람만 모를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 그래야 한영숙이 확실히 떨어져 나갈 테니까.
“무슨 이야기든 들을게. 뭔데 그래?”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시간 돼요?”
도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돼. 안 되어도 내야지.”
“그래요. 그럼 그때 봐요. 우리 집으로 오면 돼요.”
“이 집으로?”
현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도하는 거듭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장소도 의외였다. 늘 밀어내기만 하다가 왜 집으로 부르는 건지.
“알았어.”
대답을 해 주었는데도 현서는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의아함을 느낀 도하는 현서의 얼굴을 살폈다. 한없이 울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갈게요.”
그러나 이내 그녀는 마주치는 눈동자가 부담이 되는지 슬며시 피하며 돌아섰다.
“도현이는 자?”
도하가 담 너머를 향해 흘끗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현서는 다시 그를 돌아보며 말해주었다.
“아까 잠들었어요.”
“그래. 너도 잘 자.”
현서는 이번에도 역시 그의 깊은 눈길을 오래 보지 못하고 다시 돌아섰다.
“오빠도요.”
그리고 달아나듯 대문을 열려던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대문이 열렸고 그 사이로 졸린 얼굴의 도현이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어, 도현이 깼어?”
“아저씨도 있네?”
도현은 도하를 발견하곤 반짝 잠이 깨는 듯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도하는 다가오는 도현을 보며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바짝 가까이 다가온 도현은 불쑥 도하의 다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자그마한 도현은 키가 큰 도하의 다리까지밖에 닿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서는 차마 도현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도하가 웃으며 도현을 안아 올리는 모습도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언제 다시 두 사람이 저렇게 서로를 안고 웃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도현이 자다 깨서 나온 거야?”
“응, 엄마가 없어서……. 아저씨는 여기서 엄마랑 머해?”
이제는 제법 발음도 정확해져서 아저찌라고 부르던 발음이 아저씨에 가까워져 있었다.
“엄마랑 잠깐 이야기했어.”
도하가 현서에게 슬쩍 눈길을 던지며 대답해주었다.
현서는 도하 품에 있는 도현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도현아. 추우니까 이제 들어가자. 다시 자야지.”
도하는 아쉬운 듯이 도현의 뺨을 한번 어루만지고는 현서에게 넘겨주었다.
“아저씨, 안녕.”
“응. 도현이 잘 자.”
현서는 그대로 도현을 안고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닫힌 문 앞에서 그녀는 도현을 꼭 안으며 작게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