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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가장 중요한 걸 위해서 살아도 된다고 말해줘 (56/92)


#56. 가장 중요한 걸 위해서 살아도 된다고 말해줘
2022.10.13.


현서는 흔들리던 눈을 깜빡거렸다.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서는…… 안 되죠, 오빠.”

“아니야. 안 된다고 말하지 마.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걸 위해서 살아도 된다고 말해줘. 너만큼은 나를 이해해줘, 현서야.”

현서는 그의 간절한 눈빛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 강렬한 의지에 빠져들어 설득될 것 같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요, 오빠. 오빠가 그러면 내 마음도 편하지 않아요.”

어떻게 그에게 그 모든 것을 버리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현서는 그런 일은 상상만으로도 불편했다.


“다 버리고 온다고 해도 받아주지 않을 거니까 생각도 하지 말아요.”

도하는 상심이 가득한 얼굴로 현서를 보았다. 그리고 눈을 내려 그 곁에 잠든 도현도 보았다.

그는 역시 자신이 더 힘을 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현서가 낳은 아이는 이 집 핏줄이 분명한데.

알아서 확인해보겠다는 채 회장은 아직까지 말이 없었다. 괜히 채근하면 또 성질이나 부릴 것 같아 조용히 기다려보는데 속이 답답해 죽겠다.


“하여간 다들 나만 만만하지? 채 회장이나 아들놈이나 집 떠난 며느리나 다들 그냥…….”

새해도 밝았으니 새 손자를 집에 데려와야 하는데. 새해의 행운을 가져다줄 귀한 손님인 아이 말이다.

작년에는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개중 송화궁 탈퇴가 가장 망신스럽게 장식한 불운이었다.

생각하니 또 열이 뻗치는구먼.


“후……. 속도 답답하고 오늘은 쇼핑이나 해야지.”

영숙은 기분 전환을 위해 김 기사를 호출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사모님?”

“오늘은…… 압구정동으로 갑시다.”

차에 깊게 몸을 묻은 영숙이 지시했다.

갈 데라곤 백화점뿐이네.

송화궁에서 당한 망신으로 평소 잘 가던 모임에도 나갈 수가 없었다. 거기엔 지화자 여사가 있어서 곤란했다.

지화자가 송화궁에서 난 도난 사건 소문을 듣고 눈치 없이 넌지시 물어오길래 아니라고 쏘아붙이곤 그 후로 피하는 중이었다.


“이제 난 외톨이구나……. 인생 참 외롭다.”

가뜩이나 재벌가 여편네들은 은근히 영숙을 하대하며 잘 끼워주지 않아서 친해지기도 힘들다.

그나마 친해졌던 지화자마저 끊어내니 같이 놀 사람이 더 줄어들었다. 혜미 요건 오늘도 혼자서 송화궁에 갔다.


“적적하니……. 어서 우리 손자나 데려와야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백화점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사모님.”

김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고 영숙은 유유히 내렸다. 혼자서 백화점에 들어간 영숙은 화장품 코너부터 들렀다.

송화궁 죽 센터에서 받았던 화장품을 다 써서 당장 사야 했지만 마음에 드는 화장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짜증이 오른 영숙이 새삼 현서 욕을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릴 때였다.


“어머나!”

갑자기 다가오던 사람과 부딪쳐 넘어지고 말았다. 엉덩방아를 찧은 영숙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눈을 어디에다가 달고 다니는 거야!”

주저앉은 채 상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자 그녀를 향해 웬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중년 신사가 죄송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영숙은 그 신사의 얼굴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죄송합니다. 혹시 다치신 데는 없―”

“―어? 그쪽! 장동철 아냐?”

남자의 얼굴을 영숙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 이 남자는 세월이 비껴간 듯 헤어질 때 보다 더 잘생겨진 것 같았다.


“어, 누구신데?”

“나야, 영숙이.”

영숙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하자 장동철은 그제야 눈을 크게 뜨고 영숙을 보았다.


“한영숙이? 이제 보니 그러네! 젊을 때 보다 더 예뻐졌는데? 못 알아볼 뻔했어!”

“그야 뭐, 관리도 잘 받고 있고 요새 또 의학이 발달했잖아.”

“부잣집 사모님이라 관리받는 게 다르구나. 이야, 어쨌든 반갑다! 이렇게 만나기도 하네.”

“그러네, 참 신기하다.”

영숙은 장동철의 몸을 스캔하듯 살펴보았다. 채 회장과 아들의 정장을 숱하게 보며 키운 눈썰미로 본 바,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명품급 정장인 듯했다.

뭐지, 이 양반? 전보다 신수가 더 폈는데? 형편이 좋아졌나.

그래서인지 영숙은 오랜만에 만난 동철이 더욱 반가웠다.

이렇게 보니 이 양반도 참 훤칠하네.


“근데, 동철 씨도 신수가 훤해졌네! 요즘엔 사업이 잘돼?”

“사실 다른 사업도 하나 하고 있는데, 그게 잘 풀렸어. 일이 하도 많아서 정신이 없는지 앞도 잘 못 보고 부딪쳤네. 근데 한영숙이라니, 이건 또 무슨 인연이야.”

“그러게 말이야. 이게 몇 년 만인지.”

“어, 잠깐만.”

불현듯 장동철이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받았다.


“아, 예, 사장님! 지금 가는 길입니다! 예!”

동철은 전화기를 넣으며 영숙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아쉽지만 가봐야겠다. 지금도 일 때문에 6층에서 약속이 있거든.”

“그래, 얼른 가 봐.”

장동철은 정말 바쁜 몸짓으로 정장 안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지금은 내가 늦어서. 내 연락처야, 시간 날 때 연락해.”

“으응.”

장동철은 곧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더니 몸을 돌렸다.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가던 그는 그러다 갑자기 영숙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반가운데, 차라도 한잔했으면 좋겠는데, 나중에 식사나 같이할까?”

“뭐, 생각해 보고 전화할게.”

동철이 준 명함을 들여다보며 영숙은 대답을 미뤘다. 오랜만에 만난 동철이 매우 반가웠으나 그런 내색을 하기는 자존심이 상해 괜히 튕겨본 것이다.


“그래. 그럼 또 보자.”

그래 놓고도 내심 아쉬운 기분이 들어 영숙은 동철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국 6층에서 약속이 있다는 말에 그를 멀찍이서 따라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때깔이 좋아진 동철이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내심 궁금해졌다.

명함에 적힌 건 번지르르해 보이는데 말이지. 아니면 여자라도 만나는 것인지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결국 영숙은 살금살금 동철의 뒤를 밟아 분위기가 조용한 전통 찻집 안에까지 들어와 그의 뒤쪽에 앉았다.


“장 사장, 내가 부탁할게, 이번 투자에 나도 좀 끼워줘.”

“사장님 이번에는 같이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다음 기회에 꼭 넣어드릴게요.”

“장 사장,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나랑 지낸 세월이 있는데, 이번처럼 좋은 투자처가 언제 다시 생긴다고. 꼭 내 자리 좀 만들어줘. 내가 장 사장에게 섭섭하지 않게 인사할게.”

“제가 투자하라고 하실 때 하시지, 지금에 와서 곤란하게…….”

“누가 이렇게 대박 칠 줄 알았나. 제발 부탁 좀 함세.”

그녀는 한동안 동철이 나이가 지긋한 남자랑 나누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자세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기억에 남는 말 하나는 건질 수 있었다.

대박을 쳤다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영숙은 잠시 후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VIP 라운지에서 기다리면서 연락을 해볼까? 집에 가기 전에 따로 만나볼까나?

저 사람이 진작 저렇게 근사한 모습이었다면 그때 그렇게 버리진 않았을 텐데. 지금 보니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영숙은 입맛을 다셨다.

장동철은 전에도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사업이 점점 기우는지 나중에는 어려워 보였었다.

그런데 요즘엔 사업이 좀 괜찮나 보지?

채 회장과는 명목상의 부부일 뿐, 그 집에서는 독수공방해야 했으니 실은 매일이 외로웠다.

저에게 관심도 없는 채 회장의 눈을 피해 다른 남자도 여럿 만나긴 했지만, 그것도 몇 년 전에 그만두었다.

현서와 도하가 자꾸 눈치를 채는 것 같더니, 결국 도하에게 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자꾸 그러시면 아버지에게 말씀드린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채 회장이 법적 남편이 아니었으므로 아들에게마저 팽 당하면 끝장이었으니까 아들 말을 더 잘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채 회장이 돈줄도 막아두어 목돈도 못 쓰고 카드도 빼앗아서 아들 카드만 쓰는 신세이니 아들 비위도 잘 맞춰야 했다.

한 번에 억대의 목돈은 못 쓰지만, 쇼핑하고 마사지라도 받는 데에 지출되는 카드값이 매달 일이 천만 원은 되는데, 그게 다 도하 돈이었으니까.

아들 무서워 바람도 못 피우고 조신하게 살고 있었는데 저렇게 더 근사해진 옛 애인을 우연히 마주치니 가슴이 새삼 싱숭생숭했다.

같이 놀 여편네들이 없어지니 또 이렇게 다른 인연이 이어지는구나.

영숙은 은은하게 웃으며 팩트를 꺼내 거울을 보았다. 도하를 일찍 낳아 그렇지 그녀는 아직 50대 후반이었다.

아직 환갑도 안 되었는데. 포기하기엔 아직 아깝다, 한영숙이의 로맨스.


[동철 씨. 오늘은 몇 시에 시간 나? 이렇게 만남 김에 식사나 하고 들어갈까 해서.]

라운지에 도착한 영숙은 모처럼 웃으며 그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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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잘 먹었어.”

“더 좋은 데로 가자니까. 나 지금 잘 벌어.”

“됐어. 요즘 없어서 못 먹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충분해.”

룸이 있는 고급 음식점 안이었다.

동철은 아까 투자자와의 만남이 길지는 않아 영숙이 보낸 문자에 흔쾌히 답을 주었었다.


“그래도 예전에 더 잘해주지 못해 늘 마음에 걸리고 미안했는데……. 아니면 내가 가방 하나 사줄까?”

“가방? 좋지. 동철 씨 요새 잘 나가나 봐?”

“영숙 씨가 알던 전보단 그런 편이지.”

하긴. 백화점을 나와 식사 자리로 옮기기 위해 김 기사를 보내버리고 동철의 차를 타고 왔는데 차도 비싼 외제차였다.


“무슨 일 하는데 그래?”

“그냥 뭐, 그냥 조그마한 일 해.”

“사실 나 아까 찻집 들렀다가 동철 씨 봤어. 같이 있던 그 사람, 투자하게 해 달라고 동철 씨한테 사정하는 것 같던데.”

“아아……. 그걸 봤구나. 사실 이번 투자처가 대박이 날 것 같거든. 최소 다섯 배야.”

“뭐어?”

돌연 영숙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왜 아까 그 투자자가 그렇게 통사정을 하며 쩔쩔맸는지 알 것 같았다.

오늘 여기 오기 정말 잘했는걸?


“어디 투자하는데?”

“아! 영숙 씨. 정말 미안하지만, 투자자가 아니면 함부로 말을 해 줄 수가 없어.”

사람 좋게 웃던 동철이 문득 정색하자 영숙은 좀 무안했다.


“음……. 얼마나 투자해야 하는데? 나도 조금 해볼까?”

“돈 있다고 투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냐. 자리가 없어서 못 받아.”

투자하겠다는데도 동철이 단호하게 잘라내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두 배 수익만 해도 개떼처럼 몰리는데 다섯 배 이상이라니.

이거 할 수만 있다면 완전 대박인데?


“한 몇억 들어갈 자리도 없어? 옛날 생각해서 동철 씨가 힘 좀 써봐.”

채 회장의 주머니를 못 쓰니 속 빈 강정이었지만 단 몇억은 부동산만 빼고 가진 거 좀 팔면 당장 현금화할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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