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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네가 나를 받아만 준다면 (55/92)


#55. 네가 나를 받아만 준다면
2022.10.10.



 
현서는 일부러 도하가 들어갈 때까지 문을 닫지 않았다.

자신의 집 안에선 아이와 단란하게 파티가 진행 중인데 아이와 함께하지 못하고 빈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아빠의 뒷모습이 너무도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루카스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현서는 도현이 선물을 볼 수 없게 수납장 안에 넣어두고 그들이 있는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는 루카스의 눈길에 현서는 괜히 찔렸다. 루카스는 채도하가 도현의 아빠라는 사실까지는 알고 있는데, 도하에게도 진실을 들켰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현서, 도현이 아……. 아니, 채 전무는 잘 지낸대?”

“응?”

서로 하고 있던 생각이 같았는지 하필 물어도…….

놀라지 않은 척 현서가 대답했다.


“루카스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하하…….”

“그냥 갑자기 궁금하네. 난 채 전무를 본지가 좀 되어서.”

“나도 그렇지 뭐, 요즘엔 업무적으로 딱히 볼 일도 없어서.”

“그래?”

의혹이 가득한 루카스의 눈빛에 현서는 더욱 웃기가 어려웠다.

***

어제 크리스마스이브 분위기에 취해 그레이스와 루카스는 저녁 식사를 하고도 한참 뒤에 돌아갔다.

도현도 평소보다 늦게 잠들어서 오늘 현서와 도현 둘 다 조금 늦잠을 잤다.


“우아, 엄마! 이거 다 뭐야?”

느지막이 일어나 눈을 비비며 방 밖으로 나오던 도현의 눈이 불현듯 휘둥그레졌다. 현서는 천연덕스럽게 함께 놀라주었다.


“어머, 산타 할아버지가 놓고 가셨나 보네? 우리 도현이 1년 동안 착하게 지냈나 보다. 산타한테 선물도 받고!”

“우아아! 뜯어 볼래!”

도현은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호다닥 선물들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현서는 어쩐지 애잔한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엄마! 멋진 거 진짜 많아!”

“우와, 정말?”

변신 로봇에 미니 RC카에 도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보니 현서는 더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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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휴일을 맞아 집에서 도현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되자 오후쯤이 되니 도현이 외출하고 싶어 했다.


“어? 엄마! 옆집 아저찌다!”

대문 밖으로 나서는데 옆집 대문도 하필 열려서 현서는 도하와 꼼짝없이 마주쳤다.

도하는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로 도현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도현이,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옆집 아저찌!”

아이의 말에 도하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비행기 아저씨에서 옆집 아저씨로 바뀌었네?”

“응! 우리 옆집 사니까.”

현서는 아이를 보는 도하의 눈빛을 오래 보기가 곤란했다. 저 눈빛은 분명 아는 눈빛이었다. 예전에 서하를 보았던 그 눈빛 그대로였으니까.


“도현이, 엄마랑 좋은 데 가는 거야?”

“응! 엄마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꺼야. 아저찌도 같이 가자!”

“아, 안 돼, 도현아.”

인사를 마무리 짓고 가던 길 가려 하는 순간,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현서가 끊어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살피던 도하가 도현에게 대답했다.


“그럴까?”

“응! 같이 가. 가서 맛있는 거도 먹고 비행기로 또 같이 놀자! 나 색종이도 있져.”

도현은 등 뒤로 맨 작은 아이용 배낭을 보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안 돼, 도현아. 아저씨는 같이 못 가.”

그러나 도하는 현서가 놀랄 만큼 환하게 웃으며 도현에게 물었다.


“그럼 도현아, 오늘은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줄까?”

“응!”

“아니야, 도현아. 아저씨는 바빠.”

“나 안 바빠.”

현서가 기겁해서 돌려 거절했는데도 도하는 태연하게 내뱉었다. 어찌 보면 아이보다도 더 기대에 차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선.


“바쁘시잖아요. 채 전무님은 늘…….”

“오늘은 휴일이잖아. 크리스마스. 빨간 날.”

“언제는 휴일도 없이 일하던 사람이―”

저도 모르게 쏘아대려던 말을 주춤 멈추었다. 그러자 도하는 그녀를 빤히 보며 씩 웃었다.


“요샌 그렇게 안 살아. 지금도 바쁘지 않고.”

“어디 나가는 길 아니었어요?”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이었어.”

“모처럼 휴일인데 부모님께 인사나 드리러 가시죠?”

“지금 우리 부모님 걱정해주는 거야? 아직도 효부 노릇이야? 고맙지만, 안 그래도 이미 본가 다녀오는 길이야.”

말마다 튕겨 나오자 현서는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럼 본가에서 상다리 휘어지게 차린 음식들 배불리 드시고 오셨을 테니 점심은 안 드셔도 되겠네요.”

“점심 아니고 아침 일찍 식사 같이하고 점심은 아직이야. 나도 마침 배고파.”

사실 도하는 요즘 계속 울적함에 식욕이 없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배고픈 척했다.

현서는 더 해줄 말도 없어 그냥 도현의 어깨를 감싸며 당겼다.


“아, 아무튼 안 돼요. 도현아, 빨리 가자.”

“왜애애! 아저씨랑 같이 갈 거야아아!”

어지간하면 나오지 않는 도현의 떼쓰기가 발동되었다. 현서는 놀라서 주변을 흘끔 살폈다.


“도현아! 왜 이래! 안 된다고 했잖아.”

“으아아앙!”

급기야 아이가 울기까지 하자 도하가 더 민망해하며 현서를 보았다.


“밥 한 끼 같이 먹는 거로 아이를 이렇게 섭섭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

그러나 현서는 제어되지 않는 도현을 괜히 더 다그쳤다.


“얘가 왜 이래. 오늘따라 안 그러던 행동을!”

“아저찌이! 같이 가꺼야!”

당황한 현서가 더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도하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아이에게 즐거운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남겨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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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저찌 옆에 앉으꺼야!”

동네 떠나가게 울고불고했던 도현을 끝내 현서는 달래지 못했고, 도현은 원하는 것을 쟁취했다.

그 고집을 구태여 꺾으려면 더 크게 야단을 쳐야 할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도하와 도현은 그저 이웃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뿐이었다.

그토록 절대 안 된다고 할 만큼 아이가 이상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세 사람은 도하의 차에 타고 아이들이 먹기 좋은 메뉴가 많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왔다.

차 안에서부터 내내 입이 귀에 걸려 있던 도현은 자리에 앉을 때도 도하와 찰싹 붙어 있기를 원했다.


“그래, 도현아. 이리 와서 앉아.”

“헤헷.”

나란히 앉은 둘을 보며 현서는 한없이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많이 닮긴 닮았다.

아이와 아빠.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고 있는데 현서는 그럴수록 슬퍼졌다.

아이를 크게 야단쳐서라도 저 사람과 떼어내지 않은 건, 어쩌면…….

은연중에 이 모습이 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셋이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어제, 크리스마스이브 파티 때부터 그녀를 괴롭히던 그 감정을 이렇게라도 해소하고 싶었던 건지도.

멍하게 둘을 바라보는데 도하가 그녀를 향해 눈을 들었다.


“현서야. 너도 메뉴 골라야지.”

“아, 네.”

현서가 메뉴판을 받아 보고 있는데 도현이 문득 물었다.


“근데 아저찌, 왜 엄마한테 현서야 이래?”

“아, 아저씨는 엄마랑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야.”

“진짜?”

도현이 엄마를 보며 묻자 현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릴 때도 옆집 살았었어.”

“다시 옆집 살아서 잘 됐다.”

도하는 아이의 해맑은 그 말에 혼자서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은 네 엄마와 옆집 살다가 한집에 살게 되었었고 그래서 네가 태어났단다, 라는 말은 영영 할 수가 없는 것일까.

잠시 후 메뉴가 나오자 도현은 신이 나서 먹기 시작했다. 현서는 아이가 평소와 달리 맛있게 먹는 모습에 꽤 놀라고 있었다.


“도현아, 맛있어?”

“진짜 맛있어!”

“도현이 잘 먹네. 이 작은 몸 어디에 다 들어가는 거지?”

“평소엔 잘 안 먹어서 마르고 작은데, 오늘은 신기하네요.”

도하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아이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더 사줄게, 도현아.”

신이 난 건 도하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식사가 한창 진행된 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 때쯤이었다. 도현이 뜬금없이 말했다.


“나 루카스 삼촌보다 아저찌가 더 좋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도하는 눈썹을 얼핏 올렸다. 이내 승리감에 젖은 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져갔다.

훨씬 오래 봐온 루카스보다 아이가 제게 더 호감을 가져준다니. 이런 황송한 기분이 다 있나 싶었다.

더욱 아이에게 자신이 아빠라고 고백하고 싶었다. 그럼 아이도 얼마나 좋아하고 반가워할까.

도하는 그런 엄청난 고백 대신 소소한 고백을 해주었다.


“아저씨도 도현이 좋아.”

도현도 방금 도하가 한 것처럼 눈썹을 올렸다. 두 사람의 같은 버릇을 보며 현서는 더욱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말?”

도현이 웃으며 묻자 도하는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커다랗고 까만 눈망울을 들여다보다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겠어, 도현이를.”

도하는 말끝에서 하마터면 목이 멜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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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의 차 안에는 가는 길에서와는 달리 정적이 흘렀다.

늦은 오후, 도현은 곤하게 잠들어 있었고 현서는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가 조용하니 어찌해도 어색해질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었다.


“현서야.”

창밖을 보던 현서의 눈동자가 거울 속 도하의 얼굴로 향했다.


“난 오늘이 참 행복했는데, 너는 아니야?”

신호에서 차가 멈추자 도하가 거울 속에서 현서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현서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앞으로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이야. 네가 나를 받아만 준다면…….”

바깥 풍경에 멍한 시선을 두던 현서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나한테 제일 중요한 건 너랑 내 아이야. 다른 무엇보다.”

“…….”

현서는 이 남자의 말을 믿고 싶었다. 이제는 이 남자에게서 진심이 보여서 더 어려웠다.


“나는…… 다른 건 다 포기할 수 있어, 현서야. 너만 괜찮다면.”

그럼에도 방금의 말에는 굉장히 놀라 현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이현서랑 내 아이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들은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느새 차는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시동까지 끄고 난 도하는 뒷좌석에 있는 현서를 돌아보았다.


“말 그대로야. 너랑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를 붙잡는 어떤 것도 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의 진중한 눈빛을 현서는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가슴이 속절없이 떨렸다.


“진성도, 나를 낳아준 어머니도, 어렵게 재회한 아버지도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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