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 (54/92)


#54.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
2022.10.06.



 
불같이 화를 내는 도하를 보며 움찔한 영숙은 이내 입을 삐죽였다.


“어머니의 오해를 풀도록 현서한테 제가 잘 이야기할게요. 그때까지 어머니는 현서랑 그 아이 만나지 말아주세요.”

“흠……. 오해? 넌 내가 바보인 줄 아니?”

도하는 어머니에게서 시선을 피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보니 네가 바보구나? 넌 네 아들 안 찾아올 거야?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더더욱 내가 나서야지!”

“이제 와 현서 인생에 끼어들 자격 없으시잖아요…….”

“뭐야? 왜 자격이 없어! 내 손자, 내 핏줄이 거기 있는데!”

“어머니.”

“시끄럽다. 이제는 단순히 너랑 현서 둘만의 문제가 아니야.”

아이의 존재 사실을 알리고 도하와 합세하여 아이를 빼앗아오려 했건만, 저 버리고 나간 아내 편만 든다.


“그러시면 어머니는 저랑 싸우셔야 할 거예요.”

“뭐야? 하……. 이제 넌 네 어미도 안 보이는 거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영숙은 그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도하가 하도 말리고 들자 영숙은 현서에게 가는 대신 집으로 갔다.

어차피 송화궁 출입도 못 하고 고고한 이현서를 당장 만나기도 어려웠으니 오늘 일찍 집에 가 있다는 채 회장에게 달려갔다.


“회장님!”

서재 문을 벌컥 여니 역시나 책상 앞에 채 회장이 앉아 있었다.


“문 함부로 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여간 하는 말본새 보면 제 아들놈이 저걸 똑 닮았지 싶다. 그러나 영숙은 오늘만큼은 피식 웃으며 굴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들어보면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걸요?”

채 회장은 미동도 없었다. 또 무슨 작당을 꾸미는 건지 벌써부터 골치가 아플 뿐.

영숙은 서재 문을 탁하고 닫고는 채 회장에게 다가갔다.

처음에 손자의 존재를 알았을 땐 현서에 대해 기함하고 분노하느라 씩씩댔었지만, 점차 진정하고 나니 생각할수록 이건 오히려 기쁜 일이었다.

도하에게 아들까지 생기면 그 아이도 오래오래 대를 이어 진성의 후계자가 될 것이 아닌가.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오래 살아야겠는걸? 하고 중얼대며 여기까지 오는 내내 즐거운 기분이었다.


“회장님. 내가 오늘 누굴 보고 왔는지 아세요?”

채 회장의 뾰족한 눈동자가 영숙을 향했다. 영숙은 그 앞에서 입가를 짐짓 치켜올리며 말을 뗐다.


“놀라지 마세요. 오늘 당신 손자를 보고 왔어요, 내가.”

방금까지 미동 없던 채 회장의 얼굴도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영숙은 제가 말하고도 새삼 어이가 없는지 쿡쿡 웃었다.


“회장님도 사람 맞네요. 놀라시는 얼굴이 볼 만합니다?”

채 회장은 잠시 혼란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영숙의 얼굴만 쏘아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내 손자? 지금 내 손자라고 했어?”

“그래요. 당신도 이 집안 대를 이을 손자 한번 만나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또 수상한 작당하는 거면 도하 친모고 뭐고 없이 내칠 줄 알아!”

“아이고, 무서워라! 하하, 회장님! 어릴 적 헤어져 지내던 우리 도하 만나보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아마 그 기분을 조만간 또 느끼시게 될 겁니다.”

채 회장은 눈썹을 쑥 올렸다. 영숙이 아무리 평소 경거망동한다 해도 존재하지도 않는 손주를 만들어 낸 적은 없었다.


“아휴, 그 애는 어떻게 팔자도 제 아빠를 닮았나 몰라. 집안 밖에서, 아비도 없이 엄마 손에서만 자라고 있는 것까지 똑같네.”

“무슨 일인지 똑똑히 말해!”

“에구, 깜짝이야……. 후, 잘 들으세요, 회장님.”

영숙은 채 회장의 부릅뜬 눈에도 평소처럼 졸아붙지 않으며 오늘만큼은 당당하게 고했다.


“현서 고 앙큼한 게 도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어요, 글쎄!”

채 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호흡도 금세 거칠어져 갔다.


“뭐, 뭐야?”

“놀랍죠? 나도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도하와 현서에게 아이가 있었다고? 그걸, 어찌 알아?”

“확실해요. 물론 친자확인은 해야겠죠. 그렇지만 난 이미 맞다고 100프로 확신해요. 도하 어릴 때랑 붕어빵이니까요. 어미였던 나는 도하 아들 정도는 한눈에 알아보겠더라고요.”

“…….”

채 회장은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그래서 내가 조만간 현서 만나보려고요.”

“만나지 마.”

“네? 아니, 우리 핏줄이 거기 있는데 만나지 말라니요. 하루라도 빨리 데려와야죠!”

“일단 가만히 좀 있어! 내가 직접 확인할 테니까.”

영숙은 답답하다는 듯 숨을 쉬익 내쉬며 투덜댔다.


“고게 분명 잡아뗄 거에요, 애 뺏기기 싫어서. 그러면 친자확인부터 하자고 해야죠. 난 내 손자 데려오기 위해 철저하게 싸울 준비할 거니까 그런 줄 아셔요.”

“싸우긴 뭘 싸워? 설령 우리 손주라고 해도 현서랑 아이 건드리지 마!”

“네에? 아니, 회장님!”

“나가. 혼자 조용히 생각 좀 해야겠어.”

“어휴, 참! 속 터져서 정말.”

영숙은 어쩔 수 없이 영숙은 돌아서야 했다. 그녀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턱턱 치며 서재를 나갔다.

채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문을 열어 찬 공기를 쏘이며 머리를 차분히 하려 애썼다.

정말 현서가 도하의 아이를 가진 채 이혼을 한 것일까.

그러나 채 회장은 영숙처럼 거기에 화가 나지 않았다.

떠났다면 떠난 이유가 있겠지.

저야 자세한 사연을 모르니 손자를 데리고 떠난 며느리에 대해선 어느 정도 서운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었지만,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게 쉬운 일도 아닐진대 오죽 절실한 이유가 있었으면 그걸 감안하면서까지 떠나야만 했을까 생각했다.

채 회장은 이내 전화기를 꺼내 자신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숙 모르게 일정을 빼두기 위해서였다.

***

따뜻한 조명 아래서 빛나고 있는 알록달록한 트리는 더욱 크리스마스 이브의 분위기를 돋아주고 있었다.


“할무니! 선물 고맙습니다!”

“할머니도 도현이가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마워!”

“할무니가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서 정말 좋아!”

도현은 가느다란 두 팔을 벌려 그레이스 박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할머니도 우리 도현이랑 같이 지내서 너무 행복해.”

그레이스는 도현의 포옹에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미소를 지었다.


“파파도 안아줘.”

루카스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손짓하자 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루카스를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루카스 삼촌은 애기처럼 샘내. 이리 와, 안아 주께.”

“어? 그런데 왜 삼촌이야, 아빠지.”

“삼촌은 아빠가 아니니까.”

루카스는 갑자기 삼촌이라고 선 긋는 도현의 태도가 내심 섭섭했다.


“우리 도현이 이제 컸네. 이젠 아빠라고 안 불러줄 거야?”

“응.”

루카스의 물음에 도현은 맑은 얼굴로도 단호하게 대답하고 현서를 향해 몸을 돌려 두 팔을 벌렸다.


“엄마도 내가 안아줄게.”

“고마워, 우리 도현이가 엄마를 사랑해 줘서 행복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현서에게 쪼르르 걸어간 도현은 현서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도현을 쳐다보고 있던 그레이스 박은 도현에게 버림받아 슬픈 얼굴을 한 루카스의 등짝을 큰 소리가 나게 때리면서 깔깔 웃었다.


“루카스! 억울하면 얼른 결혼하렴.”

“아, 왜 또 이야기가 거기로 튀어요?”

그레이스 박의 말에 현서가 쿡쿡 웃었다.


“그래, 루카스. 자꾸 도현이한테 아빠 소리 듣고 혼삿길 막히지 마. 얼른 결혼해서 진짜 아빠가 되라고.”

“맞아! 삼촌 결혼 좀 해!”

어른들 하는 말을 흉내 내는 도현의 말투에 온 가족이 깔깔 한참을 웃었다. 너무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현서는 티 없이 웃고 있는 세 사람을 보며 그들처럼 티 없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요즘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은 그녀의 심정을 이 중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현서는 이 행복한 공기 속에서 누군가를 생각하면 웃기가 어려웠다.

불과 옆집인데,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현서의 전화기 벨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채도하였다.

그의 생각을 하던 중에 전화가 오자 현서는 괜히 거부하기가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현서가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자 루카스가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현서는 괜히 씩 웃어주고는 방문을 닫았다.


“네. 말해요.”

-참 딱딱하게도 받네.

“지금 손님이 와 있어요. 길게 통화 못 해요.”

-언제는 길게 했나.

“무슨 일인데요.”

말장난조차 받아주지 않는 현서의 딱딱 태도에 전화기 너머에선 자잘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혼자 있을 그를 조금 걱정했는데 그나마 오늘은 기분이 울적하지 않나 보다.


-내가, 도현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샀어.

“네?”

-도현이에게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라고 전해줘.

현서는 곤란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 뭐하러 선물을…….”

-이런 거까지 막지 말아줘. 나 도현이 아빠야.

“후……. 알았으니까 말조심해줘요.”

현서는 전화기를 괜히 막으며 속삭였다. 아이를 위해 이미 샀다는 사람에게 버리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그럼 집 앞에 지금 두고 갈게.

“그래요.”

거실로 나와보니 분위기는 여전히 화기애애했다. 도현이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에 그레이스와 루카스가 열심히 귀를 기울여주고 있었다.

현서는 잠시 집 밖으로 나와 대문을 열었다. 대문 앞에는 마침 도하가 서 있었다.

그는 바닥에 커다란 쇼핑백을 막 두려 몸을 살짝 굽혔다가 그녀를 발견하곤 허리를 다시 세웠다.

이내 그는 말없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현서는 순순히 받아들며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뭐가 이리 많아요.”

“그냥……. 그만한 남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할 걸 고르다 보니 결정이 어려워서……. 다 샀어.”

현서는 조금 안타까운 기분이 들어 그의 얼굴을 잠잠히 바라보았다.


“그래요.”

저 역시 그런데, 그라고 안 그러겠는가. 부모의 마음인걸. 아빠의 애정을 산타를 통해 보여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안쓰러울 수밖에.


 


“도현이는 안에 있어?”

도하가 안을 슬쩍 보며 묻자 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스 박 회장님이랑 유 대표님이랑 같이 크리스마스 파티 중이에요.”

도하의 눈에 일순 쓸쓸함이 비쳤다.


“그래. 도현이가 좋아하겠네.”

“그렇죠.”

“그럼 들어가 봐.”

도하는 꼴사나운 표정을 짓게 될까 봐 돌아서야 했다.

가장 사랑하는 여자와 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제 아이. 이런 연말에 함께하고 싶은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거였다.

선물이라도 줄 수 있어 다행이라며, 그나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제 꼴이 우스워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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