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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달라질 수 없는 진실 (53/92)


#53. 달라질 수 없는 진실
2022.10.03.


처절하게 매달리는 한 남자의 모습에 현서는 한없이 가슴이 저릿했다.

이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이 거짓 없이 투명하게 보였다.

그의 말대로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라질 수 있는 건 없어요.”

“현서야. 그런 건…… 다시 바로잡을 수 있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야. 하지만 우리의 아이가 태어났고 내가 그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은 달라질 수 없는 진실이야.”

현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지 마요, 오빠. 오빠는 절대 날 설득할 수 없을 테니까.”

도하는 절망적인 눈으로 현서를 보았다. 견고하고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무슨 말로도 그녀는 꿈쩍하지 않는 듯했다.


“도현이가 앞으로도 계속 아빠가 누구인지 몰랐으면 해요. 부탁할게요.”

도하는 그런 생각을 하자 괴롭도록 가슴이 미어졌다.


“그럼 내 아들 앞에서 내가 아빠라는 진실을 평생 밝히지 말라는 말이야?”

“어른들의 과오 때문에 도현이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도하는 그 부탁에 수긍할 수가 없었다.


“과연 아빠를 평생 모르는 게 아이에게 더 좋은 일일까?”

현서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질문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미안해요, 오빠. 그렇지만 제발 부탁해요.”

 

***

도하는 새벽처럼 일어나 출근하던 평소와는 달리 늦게까지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9시가 넘어서야 집 앞으로 나갔다. 어제처럼 제집 담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자 옆집에서 아이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예준이랑 안 싸우꺼야!”

“오, 그래? 도현이 의젓하네.”

마당을 나서며 시터와 함께 재잘거리는 도현의 목소리에 도하는 애틋한 감정에 젖어 옅게 웃었다.

이내 대문이 열렸고 도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아저찌!”

“도현이 안녕?”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예, 안녕하세요.”

태연한 척 즐거운 미소를 짓기는 어려웠다. 진실을 알고 난 이후엔 이렇게 도현을 볼 때마다 격해지는 감정을 억누르기가 어려웠으니까.


“아저찌는 어디 가?”

“아저씨는 회사 가.”

현서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고 있을 아이. 어쩌다 지금 아이도, 자신도 아저씨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운 사이가 된 걸까.


“아저찌도 엄마처럼 회사 다녀?”

“응.”

“아저찌 회사도 가보고 싶다.”

“놀러 와, 도현아. 언제든지…….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

도현은 동그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엄마가 허락하지 않을 게 뻔한데도 아이의 바람이 진심으로 보여서 더 안타까웠다.


“응. 도현이는 어디 가?”

“도현이는 어린이집 가!”

“어린이집 재밌어?”

“응. 재밌져.”

문득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달콤해서 참을 수 없이 뭉클한 감격이 밀려들었다.

언젠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될 날이 올 수 있을까.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도현아.”

“응.”

“아저씨가 귀여운 도현이 한번 안아봐도 될까?”

“응! 높이 안아줘!”

동의를 구하듯 시터를 쳐다보자 시터도 빙긋 웃었다.

아이를 안아 들자 팔에 감기는 아이의 감촉이 보드라웠고 아이의 체온은 따뜻했다.

발 앞에 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아이의 얼굴이 그를 향해 빵실 웃고 주고 있었다.


“와, 아저찌 크다! 높아!”

“더 높이 올려 줄까?”

“응!”

“안 무섭겠어?”

“안 무서워, 도현이 용기 있어!”

도하는 도현을 단단히 안고 공중에 높이 올렸다. 꺄르륵 웃는 도하의 입 모양이 함지박처럼 크게 벌어졌다.

도하의 입가도 한껏 올라갔다.

우리 아들…….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감사해야 하는 걸까.


 

***



-그리고 이현서 씨한테는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지난번 연락했던 업체에서 며칠 만에 다시 연락이 왔다.


“뭐예요? 허! 세에상에나! 그럼 걔, 걔가 제 아이가 맞았구나.“

설마 현서가 낳은 아이일 줄은 생각지도 못한 영숙이 괘씸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설마설마했는데.


“고것이 그새 결혼을 한 거야?”

-아니요, 남편은 없습니다. 아들만 하나 있는데 이도현이라고 엄마와 성이 같은 걸 보면 싱글맘일 수도 있겠죠.

“그, 그래요?”

갑자기 영숙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다.

아니, 가만 있어 봐. 그럼 이거 설마?


“잠깐, 싱글맘? 결혼을 안 해? 아, 아이가 몇 살이에요?”

-만 3세네요. 20XX년 7월 12일생.

영숙은 삽시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 알겠습니다. 수고했어요.”

전화를 끊고 난 영숙은 달력까지 펼쳐가며 열심히 계산하고 머리를 굴렸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럼! 우리 도하 아이야? 내 손자였던 거야?

고게 바람을 피우지 않았던 이상 도하의 아이인데.

이혼 직전의 그녀의 생활을 떠올려 보면 주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고 바람을 피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지, 그야 모르는 일이니까. 고것이 그렇게 좋아하던 도하를 떠난 거 보면 딴 놈 애를 가져서인지도 모르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영숙은 결국 벌떡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내가 직접 봐야지, 안 되겠네.”

 

***

오후 4시가 다 되어갔다. 이 시간 이후부터 흔히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라면 이즈음 문 앞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이 빠지게 쳐다보고 있을 때 대문이 열렸다.

누가 나오나 살펴보니 현서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본 그 여자인 듯했다.


“어린이집에 가는 건가?”

영숙은 결심한 듯 김 기사에게 말했다.


“김 기사, 문 좀 열어요.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김 기사는 여기서 기다리고.”

“예? 아, 예, 사모님.”

영숙은 문을 살살 닫고 현서의 집에서 나온 여자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오늘은 일부러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왔다. 괜히 꾸미고 나오는 것보다 이편이 이 동네에서 다니기에 자연스러워 보일 것 같아서였다.

동네 산책하는 아주머니인 척, 아까 그 여자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쫓아가자 예상대로 여자는 어느 어린이집 앞에서 멈춰 섰다.

여자의 눈에 띄지 않을만한 곳에 선 채 영숙은 그곳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개중 한 아이가 교사로부터 방금 그 여자에게 인계되는 게 보였다. 영숙은 곁눈질로 그 모습을 쏘듯이 보았다.

아이는 여자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영숙의 눈이 커져 갔다.


“어머머!”

영숙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이후 아이와 여자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멍한 얼굴로 내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세상에! 도하 어릴 때랑 완전히 붕어빵이잖아?”

그녀는 비틀거리며 멀찍이서 그들을 쫓았다. 너무 기가 막혀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손을 잡은 여자의 얼굴을 한 번씩 올려다보는 아이의 옆모습이 너무도 친숙했다. 도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안 그래도 컸던 현서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이현서 이 X을 그냥! 어떻게 우리 집안 씨를 배 놓고 그걸 숨겨? 그것도 아들을!”

 

***

영숙은 옷차림이 트레이닝복이든지 말든지 당장 도하의 회사로 달려갔다.

평소 겉치장을 그토록 중요시하고 특히 채 회장과 아들의 회사에 발을 들일 때는 온갖 값비싼 옷과 악세서리와 가방 등으로 그야말로 빡세게 꾸미고 가는 그녀였는데 말이다.

그만큼 숨이 넘어가게 급한 일이었으니 어찌할까. 비서가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도하의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도하야!”

도하의 사무실에서는 다른 직원이 한창 보고 중이었다.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린 도하는 인상을 구겼다.


“어머니. 지금 저 회의 중입니다.”

“지금 회의가 문제가 아니야, 야! 지금 엄청난 일이 생겼단 말이야!”

영숙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도하는 사뭇 당황했다. 설마…….


“이 차장님, 미안합니다. 이따가 다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네요.”

“예, 전무님.”

이 차장이 자리를 무르기가 무섭게 영숙은 도하에게 바짝 다가와 앉았다.


“도하 너! 너는 알고 있었지?”

맥락 없이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에도 도하는 불길했다.


“또 무슨 일이세요. 요즘 자꾸 왜 이러시는 거예요.”

“현서 고게 네 아들 낳았잖아!”

밖으로 들릴 수도 있을 만큼 큰 소리였다. 도하는 시선을 피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오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오늘 그 아이 보고 왔다!”

아연한 도하는 다시 눈을 돌려 제 어미를 보았다.


“……예? 누굴 봐요?”

“그 애, 네 아들이 확실해.”

“현서 아이를 만나셨다고요?”

“만난 건 아니고 나 혼자 보고만 왔다.”

도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이 앞에서 알은 체는 안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


“그 애는 또 어떻게 보게 되신 거예요.”

“내가 현서 고게 괘씸해서 조사를 좀 했다.”

도하는 불현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곤 차분히 영숙에게 전하려 애썼다.


“제 아이 아니래요. 다른 남자 아이예요.”

왜 이런 거로 현서 편을 들어야만 하는지 씁쓸했지만, 도하는 지금 당장은 영숙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씨알도 안 먹혔다.


“다른 사람들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너 어릴 때 모습을 제일 많이 본 게 나야. 그 애가 얼마나 너 어릴 때랑 닮았는지는 너도 현서도 모를걸?”

“…….”

도하는 이미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더는 숨길 수가 없다는 걸.

영숙이 그 아이의 존재를 안 이상 이미 비상사태였다. 솔직히 이제 더이상 비밀은 없다고 봐야 했다.


“내가 그저께 너 살던 아파트에 갔었는데 너 언제 또 이사한 거니? 네 비서에게 물어보니 너 이사 간 동네가 어릴 때 살던 동네던데, 왜 그런 거야?”

영숙의 질문은 순수한 질문이 아니었다. 추궁이었지.


“솔직히 말해봐라. 멀쩡한 고급 아파트 놔두고 그 동네로 다시 온 거 현서랑 네 아들 때문 아니야?”

“여기 회사예요, 어머니. 목소리 좀 제발 낮추세요.”

“뭐, 좋다. 네가 잡아떼니 현서 이 썩을 것을 찾아가서 직접 물어봐야지.”

“어머니! 제발 가만히 좀 계세요!”

도하는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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