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내 아들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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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내 아들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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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내 아들이잖아
2022.09.29.
그때 문 손잡이가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금 장치에 막히자 이내 노크를 한다.
똑똑-.
“도하야! 너 무슨 일 있니? 응?”
궁금한 건 못 참는 영숙이 문밖에서 채근했다.
“아니요. 별일 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도하는 사진 중 가장 도현과 많이 닮은 사진 한 장을 빼서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앨범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네.
초인종을 누르자 인터폰 속에서 시터가 대답했다. 현서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옆집인데요, 도현이한테 줄 게 있어서요.”
-아, 그러셔요? 잠시만요.
본가를 떠난 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현이를 봐야겠다는 생각뿐.
그래서 백화점에 들러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서 이곳으로 직행했다.
“아저찌! 내가 문 열어줄게!”
대문이 열리기도 전에 조르르 달리는 도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의 목소리만 들어도 이제 도하는 남다르게 가슴이 미어졌다.
곧 열린 대문으로 시터와 도현이 나와 도하를 맞았다. 도하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날 뻔해서 어렵게 참아야 했다.
“아저찌!”
“안녕, 도현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별거 없는 듯한 이웃 간의 인사가 누군가의 가슴을 미칠 듯이 타게 했다.
해사한 아이의 얼굴을 보자 먹먹하기만 해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도하는 주섬주섬 손에 있던 상자를 도현에게 내밀었다.
“백화점에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건데 도현이가 생각나서…….”
“우와! 비행기다!”
상자 위 비행기 사진을 보고 알아본 도현이 상자를 받아들고 깡충깡충 뛰었다. 도하는 환하게 웃는 도현의 동글동글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현아……. 네가 정말 내 아들이니?
***
근처에 주차를 마치고 집을 향해 걸어가던 현서는 소스라치게 놀랄 뻔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얼핏 보곤 몰랐는데 담장 그림자 속에 사람이 서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채도하였다.
그의 집 앞에 서 있던 그는 마치 걸어오던 그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 안에 서 있던 탓인지 그의 표정도 굉장히 암울해 보였다.
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 현서가 물었다.
“여기 서서 뭐해요?”
“보시다시피.”
그의 손에 담배가 들려 있었다.
“끊은 거 아니었어요?”
그 광경에 이마를 찌푸리던 현서는 저도 모르게 속상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어쨌든 전에도 그녀 앞에서는 피우지 않던 그였기에 지금도 그녀가 다가오자 담배를 껐다.
그걸 지켜보며 현서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다. 요즘 그에게선 옅은 담배 향조차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지난번 그…… 키스에서조차.
“요새 다시 피우는 거예요?”
“참을 수 없이 심란할 때만.”
“하아……. 뭐, 그래요. 이제 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피우든지 말든지.”
현서는 어차피 자신이 말릴 사이도 아니라고 속으로 되뇌며 다시 걸음을 떼려 했다.
“이현서.”
그때 도하가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자기 집으로 향하던 현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하를 쳐다본 현서는 새삼 흠칫 놀랐다. 어쩐지 도하가 저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탄식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랑 이야기 좀 할까?”
“……네? 또 무슨 이야기를요.”
그가 이럴 때마다 현서는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어서 또 긴장부터 했다. 그러나 발을 뺄 준비부터 하는 그녀를 눈치챈 듯 도하는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말했다.
“지금 당장 천재지변이 일어난대도, 난 지금 너랑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어.”
“…….”
그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피할 수 없다 여긴 현서는 어쩔 수 없이 대수롭지 않은 척 내뱉었다.
“해요, 그럼…….”
“여기서 말하긴 곤란할 텐데?”
그러나 도하가 하는 말에 현서는 문득 좋지 못한 직감이 들었다.
“우선 내 집으로 들어가자.”
무슨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제의에 현서는 고개를 찬찬히 주억거렸다.
도하는 제집 대문을 열어주어 현서가 먼저 들어간 뒤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집 안으로 들어간 현서는 눈에 보이는 풍경을 둘러보았다. 리모델링을 거쳐서 더 깔끔해진 집은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이 집은 정말이지 몇 년 만인지 모른다. 한도하가 채도하가 되기 전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녀가 스무 살 때였다.
올 때마다 설렜던 도하의 집. 십 년도 더 지나 방문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더불어 그는 왜 이 집에 이사까지 감행하면서 저를 따라왔는지 그 마음을 가늠해 볼 수가 없었다.
“앉아.”
“됐어요. 얼른 들어가 봐야 해요.”
현서가 세우는 철 같은 벽에 도하는 더 권하지 않았다. 그 역시 거실 가운데 선 채로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현서야.”
도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어떻게 시작할지 말을 고를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네가 얼마나 나한테 정이 떨어졌는지는 잘 알겠더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거짓말했어…….”
현서는 주춤,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도하가 괴로운 얼굴로 씹어뱉었다.
“도현이, 내 아들이잖아.”
그 찰나 현서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뚝 떨어졌다.
어떻게…… 안 거지?
결국 이렇게 채도하가 직접 그의 입으로 ‘내 아들’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아, 아니에요.”
“더는 속일 생각하지 마.”
현서는 그저 부정해보지만 이미 도하의 말은 너무도 큰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요란하게 뛰었다.
“도현이, 두 돌이 아니라, 세 돌 지났다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현서는 더는 숨길 수 없는 진실에 압도되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에요. 누가, 누가 그래요.”
“도현이가.”
“…….”
현서는 끝내 어쩔 도리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아이는 거짓말을 못 하지.”
아까 비행기 선물을 하며 아이에게 자연스레 물었었다.
‘그런데 도현이는 몇 살이야?’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답해주었었다.
‘네 살!’
물론 시터도 부정하지 않고 도현의 곁에서 웃기만 했다.
한국식 나이로 네 살이면 생일이 7월인 아이는 당연히 세 돌이 지난 게 맞았다.
“나이 속여 미안한데 오빠 아이 아니에요, 정말.”
현서는 두려움에 몸이 떨렸지만 그의 말을 부인했다.
사실, 채도하와 이렇게 얽히게 된 이상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을 것 같아 불안한 요즘이었다.
그리고 이제 올 것이 온 것이다. 하지만 현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고 있을 때쯤이면 더는 이렇게 만날 일도 없을 줄 알았다. 그가 저를 찾는 일은 더더욱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마치 운명처럼 그와 재회했고 그가 그의 아들을 보고 말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 양 이렇게 되고 말았다.
“내가! 내가 오빠 몰래 바람을 피웠어요. 그러니까 이혼 전에요…….”
“현서야…….”
“정말이에요. 그거 들키기 싫어서 아이 나이 속인 거예요.”
도하는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쉬며 그녀를 보았다. 그는 더 말을 하는 대신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현서를 보여주었다.
“너도 본 적 없는 내 어린 시절 사진이야.”
현서는 떨리는 눈을 내려 사진을 보았다. 이내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도현의 나이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 사진은 도현만 아는 사람이 보았다면 도현으로 착각할 정도로 닮아 보였다.
“제 눈에는 별로 닮아 보이지 않는데요.”
고여 드는 눈물을 숨기지도 못한 채 현서는 당황하여 거짓을 어물댔다.
그러자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던 도하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럼…… 친자확인 요구해도 될까?”
“…….”
현서의 말문이 우뚝 막혔다. 크게 뜨인 눈이 도하를 향했다. 커다란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이렇게 잔인해요.”
체념에 도달한 현서는 흐릿해진 시야 속 도하를 보며 울먹였다.
“우리 좀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어요?”
“이현서!”
더는 숨기지 않는 현서의 모습에 도하는 가슴이 참을 수 없게 옥죄어들었다.
“어떻게 네가…….”
정말 도현은 제 아들이었다! 확신하고 있었는데도 현서의 실토 앞에서 그는 너무도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걸 숨겨!”
현서는 서럽게 흐느꼈다. 그녀는 차마 도하의 얼굴을 더 볼 수가 없는 듯이 눈을 내렸다.
모두 드러난 진실 앞에서 온몸에 힘이 풀려 그녀는 서서히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마터면 난 평생 내 자식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를 뻔했어!”
도하가 격앙된 목소리로 토로했다. 세상이 무너진 듯 주저앉아 우는 현서를 내려다보던 그는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왜 그랬어, 현서야.”
고개를 들지 않는 현서의 어깨를 잡고 도하는 그녀에게 달래듯이 물었다.
“왜 나한테 숨기고 혼자서 떠난 거야.”
과연 이현서가 그토록 남편이 싫어져서 떠난 거였을까. 아이까지 숨기면서, 아이에게 친아빠를 포기시키면서까지 떠날 만큼 싫어졌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도하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모질 수 있는 사람이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꼭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 거야?”
현서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그녀는 도하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게 그를 위한 길이었다.
이렇게 떠난 게 그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는 걸 그는 평생 알 수 없겠지만.
“그런 거 없어요.”
현서는 붉어진 눈을 들어 도하를 보았다.
“바쁜 남편에 외로워서, 재벌가 며느리 노릇에 지쳐서 떠났어요. 왜요, 그 정도 이유는 충분하지가 않나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현서를 보면서도 도하는 석연찮은 기분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너 외롭게 둔 거, 내가 할 말이 없어. 진성 며느리로 사느라 너 그렇게까지 지치도록 힘들었던 거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았어야 했는데…….”
도하는 간절하고 또 간절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한테 다시 기회를 줘.”
이제는 더더욱 현서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아주 중요한 이유가 또 한 가지 생기지 않았는가.
“난 다시 잘해보고 싶어, 현서야.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네가 힘들어했던 거 이제 더는 그런 식으로 힘들 일 없게 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