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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아이가 하필 아빠를 (51/92)


#51. 아이가 하필 아빠를
2022.09.26.



“다음엔 아저씨랑 비행기 접는 것도 같이할까? 더 멀리 나는 비행기 만들어 줄게.”

“응! 내일 만들어!”

도하는 채근하는 아이의 까만 눈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근처에서 보고 있던 시터가 괜히 곤란한 표정이 되어선 말했다.


“도현아. 아저씨 바쁘셔.”

“전 괜찮습니다.”

“아저찌 갠찬대.”

“그럼 엄마한테 허락받아야지.”

“알아쪄.”

도현은 도하와 꽤 여러 번 비행기를 더 날리고 난 뒤에야 시터가 겨우 설득하여 집으로 들어갔다.


 

***

그날 밤 엄마의 품에 누워서도 도현은 계속 비행기를 생각했다.


“엄마, 나 오늘 또 비행기 날려쪄.”

“그랬어? 어디서?”

“집 앞에서, 비행기 아저찌랑.”

“어어?”

아이의 말에 현서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도현도 덩달아 일어나 엄마를 보며 제 할 말을 계속했다.


“이모랑 토마토 샀쪄. 근데 아저찌 만나쪄.”

현서는 아이 앞에서도 당혹감을 숨기질 못했다. 그러자 해사하게 웃던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의 얼굴을 살핀다.

작지만 생각보다 눈치가 뻔한 아이라 현서는 어쩔 수 없이 표정을 풀고 어느 정도는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아……. 옆집 사는 아저씨랑 날린 거야?”

“응! 아저찌 진짜 잘 날려!”

“그래?”

“응. 도현이 아저찌 좋아!”

그러나 아이가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그 말에는 울컥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아이가 하필 아빠를 좋아하다니.

묘하게도 그건 도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 온 이후 집 앞에서든 동네 골목에서든 몇 번 마주쳤었는데 제 아이가 아닌 줄 아는 상태인데도 그때마다 도하는 도현에게 남다른 친근함을 보였었다.

원래는 그렇게 남에게 친근한 사람이 아닌데도.

왜 자꾸 마주치고 또 서로를 심하게 반기는지.

서로가 누군지 모르는 두 사람인데도 본능처럼 끌리기라도 하는 걸까.

감정을 내리누르느라 안간힘을 쓰는 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아이는 그저 좋아서 웃었다.


“도현이는 비행기 아저찌가 루카스 삼촌보다 좋아!”

천진하게 터뜨리는 맑은 목소리에 현서는 좌절해야 했다.

아……. 이를 어쩜 좋을까.

어른들의 갈등으로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친부와 생이별을 했고, 이제는 눈앞에 두고도 아빠인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 내가 정말 아이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두 사람은 운명처럼 끌리는데 저 혼자 기를 쓰고 속이고 그 천륜을 끊어내야 하는 사실이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도현아. 엄마가 이래도 되는 걸까?

결국 이렇게 아빠에게 끌리게 된 도현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자책이 되었다.

아가, 엄마가 너무 미안해.

***



“아휴, 이 동네는 오랜만에 와도 정이 안 가네.”

주변에는 새로운 아파트들이 들어서기도 했고 예전에 살던 골목에도 새 건물로 바뀐 곳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영숙은 제 과거가 있는 이 장소를 마치 제 삶의 오점을 보듯이 치를 떨며 대했다.

더구나 혜수가 떠나간 뒤로는 더욱 그녀가 살던 집 근처에도 오기가 싫었다. 찜찜하기도 했고.

그런데 현서가 살고 있다고 하니 오늘은 동태를 살피러 와 본 것이다.


“김 기사. 이쯤에서 세워요. 너무 가까이 가면 티 나니까.”

“예, 사모님.”

이쯤 되면 아직 출근하지 않았겠지.

이제 송화궁에는 출입할 자격조차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저걸 만나려면 이렇게 찾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고 짝퉁이라고 하다니! 어떻게 그딴 말들을!’

다시 생각해도 열불이 뻗쳐서 숨이 거칠어질 정도였다.


“어, 저기 작은 사모님 나오시는데요?”

김 기사가 말해주자 영숙은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다. 열린 대문 앞에 말끔하고 세련된 차림의 현서가 나와 있었다.


“정말 저기 사네. 하여간 궁상은…….”

그런데 그녀의 뒤로 누군가가 또 나왔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고 그 여자는 웬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까만 뒤통수만 보여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뭐야, 저 둘은.”

아이와 여자는 현서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가 손을 흔들자 현서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현서한테 언니가 있는 건 아니었고……. 사촌인가? 웬 애 딸린 여자랑 한집에서 살고 있네.”

그 광경을 본 순간의 영숙의 머리로는 거기까지만 생각이 미쳤다.


“현서 저것이 애를 낳았을 리는 없고.”

애를 가졌더라면 현서가 감히 이혼씩이나 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영숙은 생각했다.


“아니면…… 딴 남자랑 고새 살림을 차려서?”

그렇다면 현서의 아이인 것도 가능한 이야기라 생각했다.


“아니야, 저건 분명 딴 남자랑 새 출발을 한 분위기는 아니야. 그랬다면 남편까지 저 옛날 집에 끌고 들어가 살 이유가 있나.”

영숙은 골몰히 생각에 잠겨 혼잣말을 흘려댔다.


“흐음…….”

여기로 출발할 때만 해도 저 면상이 보이면 박차고 나가 못다 푼 화를 풀고 싶었는데, 갑자기 다른 인물들이 보이니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

휴일 오후, 도하는 운동을 가기 위해 현관을 나섰다.

현관을 닫고 마당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담벼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쪽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현서의 집이 있었다.

이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옆집이니만큼 우연히 마주칠 확률도 높아진 것만으로도 좋았다. 실제로 현서나 그녀의 아이를 꽤 여러 번 마주치기도 했고.

비록 그때마다 현서는 찬바람을 쌩쌩 풍기긴 했어도 도현과는 늘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현서 없이 아이가 시터하고만 있을 때는 아이와 함께 비행기도 날리고 놀곤 했다.

이렇게 자주 마주치면서 현서에게 진심을 보여주려 더 노력한다면 현서도 점점 마음을 열어주지 않을까.

버리지 못한 희망과 함께 혼자서 실없이 웃으며 도하는 대문을 향해 발을 뗐다. 하지만 그때 담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덜컥―.

현서의 집 현관이 열리는 소리였다. 이내 타박타박 바삐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현서의 것이 분명한.

그리고 그녀 집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경쾌한 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곧 반응하는 낯선 중년 여성의 목소리도 들렸다.


“루나! 도현아!”

“할무니!”

회장님?

도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저 인자한 목소리 톤을 가진 여자 손님이 회장님인 듯한데. 혹시 그럼 GLP 회장 그레이스 박?

현서를 루나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그레이스 박이 맞는 것 같았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회장님.”

“할무니 멀리서 와쪄?”

“응, 우리 강아지 보러 할무니가 미국에서 왔지!”

“할무니 우리 집에서 자고 가꺼지?”

“그럼 그럼.”

이윽고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그들은 마당을 지나가는 듯했다.


“좋은 곳에서 쉬셔야 하는데 누추해서 어떡해요.”

현서의 사근사근한 어조가 들렸다.


“어머니가 도현이라면 껌뻑 넘어가시잖아.”

루카스 유의 목소리도 들렸다. 어머니라고 부르는 호칭에서 역시 그레이스 박임을 확신했다.


“그렇지! 오늘은 우리 도현이랑 같이 코 자야지!”

“할무니. 미국 언제 가?”

“우리 도현이 많이 보고 가야지. 크리스마스 때도 함께하자, 우리 강아지!”

쫑알쫑알 도현의 말소리가 귀여워 도하는 혼자서 미소를 지었다. 현서 모자가 그레이스 박과 루카스 유 모자와 저 정도로 각별한 줄은 몰라 한편으로는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우아! 그럼 할무니랑 크리스마스 파티도 하꺼야?”

“그러엄! 같이 파티도 하고 우리 도현이 선물도 줘야지. 그러고 보니 우리 도현이 두 돌 때 생일 파티하고 할무니가 출장이 많아서 파티라는 걸 오랫동안 못 했네.”

“벌써 그렇게 되었나? 도현이 두 돌이면 작년 7월이잖아.”

“아이구, 그러네! 우리 도현이 벌써 세 돌이 넘었네. 할무니가 올해 생일 땐 못 와서 미안해요?”

화기애애한 재회의 분위기 속에서 무심코 지나칠 뻔했던 도하는 얼마 가지 않아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잠깐, 도현이가 세 돌이 넘었다고? 생일이 7월?

불과 두어 달 전에 현서는 분명 아이가 두 돌이 조금 넘었다고 했다. 그런데 방금 저들의 대화에서는 1년이나 더 많다고 했다. 현서도 아무런 정정을 하지 않았다.

도하의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렇다면, 현서가 나한테만 거짓말을?

7월이면 그러니까, 나랑 이혼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 아닌가.

해외 지사에서 돌아왔던 날은 가을이었다. 그날 밤이 그녀를 안았던 마지막 밤이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 이현서!

울컥, 파도 같은 뭉클함이 치밀어 올랐다.

눈가가 뜨거워져 갔다. 참을 도리도 없이 눈가에는 점차 눈물이 스며들었다.

틀림없어. 도현이는 내 아들이 틀림없는 거야.

***



“도하야! 네가 웬일이니?”

기별도 없이 도하가 본가에 들이닥치자 영숙이 허둥지둥 나왔다. 그만큼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발길을 하지 않는 곳이었다.

도하는 모친의 질문에는 대꾸할 정신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성마른 걸음으로 자신이 쓰던 서재로 올라갔다.


“얘! 도하야! 무슨 일이니?”

서재로 들어간 도하는 영숙이 귀찮게 하기 전에 문부터 잠갔다. 그러고는 부지런히 눈을 돌려 책장을 살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한쪽에 꽂혀 있는 오래된 앨범을 발견했다.

영숙은 진성가 사람들에게 아들이 그들의 핏줄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게끔 아들의 어린 시절, 때에 따라 사진을 한 번씩 찍어 보냈다.

메일로도 보내고 인화해서도 보냈지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정도의 용도였을 뿐, 다른 부모들처럼 아들에 대한 애정이 지극해서는 결코 아니었으므로 아들의 사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도하에게는 그 많지 않은 사진이 유용한 정보와도 같았다.

앨범을 꺼낸 그는 긴장되는 손으로 첫 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많은 채도하가 있었다. 신생아 시절의 채도하, 백일 기념 사진 속 채도하, 한복을 입고 찍은 돌 무렵 사진. 그렇게 시간 순서대로 채도하는 자라갔다.

그리고 다음 장을 넘긴 뒤 두 돌에서 세 돌 정도로 자라가는 자신의 사진들을 보는 순간 도하는 고통스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린 자신의 여러 얼굴에서 전부 도현의 얼굴이 발견되었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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