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비행기 아저찌 (50/92)


#50. 비행기 아저찌
2022.09.22.



 


“얼핏 얘기만 들었을 때부터 현서 남편이 참 싫었어. 자기 가정도 못 지킨 놈이라고 생각해서.”

“…….”

“현서 같은 사람한테 문제가 있어서 헤어졌을 리는 없잖아. 어떤 문제가 있었건 간에 그놈이 잘했더라면 현서는 떠나지 않았겠지. 오죽하면 아이를 가진 채로 이혼을 했겠어.”

과거의 현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레이스와 루카스는 묻지 않았다.

뻔히 아플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기에 현서가 먼저 말해준 것들만 아는 정도였다. 그녀가 이혼했고 전 시댁이 한국에서 꽤 큰 기업의 오너가라는 것 정도.

아무 말이 없는 현서에게 루카스가 이어서 물었다.


“나 앞으로도…… 계속 그놈 싫어해도 돼?”

하지만 현서는 조금 초조해 보였다.


“루카스는 그냥 모르는 척해줘. 그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현서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앞으로도 또 달라질 게 없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확고할지 모르겠으나 그것과 상관없이 그녀는 좀 슬퍼 보였다.

루카스는 그녀를 이렇게 애잔하게 만드는 채도하가 더 싫어질 것 같았다.

현서는 그저 미안한 듯이 말했다.


“SH랑 좋은 성과 냈잖아. 난 괜히 나랑 그 사람 문제가 비즈니스에 차질을 줄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야.”

하지만 루카스는 그녀가 그와의 문제로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 현서 걱정 안 끼치게 할게.”

“고마워, 루카스.”

루카스 역시 비즈니스를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도 채도하도 일에 대해선 냉정한 프로였다.

다만 이현서란 여자에 대해서만큼은 그러지 못하고 자꾸만 유치하게 굴고 있을 뿐.

채도하가 그렇게 현서에게 들이대고 있는데 아이의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 문제 아닌가. 자랄수록 더 그를 닮아갈 텐데.

***

현서는 오프인 주말을 맞아 모처럼 도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 나 그네 먼저 타꺼야!”

“응, 그래. 그네 많이 밀어줄게.”

“너무 세게 밀면 무셔워.”

“알았어. 살살 재미있게 밀어줄게?”

“응!”

옷을 단단히 입혀 데리고 나온 도현의 손을 잡고 놀이터를 가는 길이었다.


“다 왔다!”

저편에 놀이터가 보이자 도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해맑게 까르르댔다.


“그러네.”

현서도 웃으며 아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렇게 경쾌하게 두 사람이 발걸음에 속도를 더할 때였다.

놀이터 앞에 있는 공원에 막 발을 들였을 때 현서는 걸음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공원 운동 기구 위에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반사적으로 도현의 손을 끌어 뒤로 숨겼다.


“안녕.”

굵직한 목소리를 들으니 환영은 아닌데.

하필 가장 마주치기 싫은 얼굴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왜 채도하가 여기에?

방금 도현을 숨기는 모습이 더 부자연스러워 보였을 것 같단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 도현과 함께 있다가 그의 앞에서 보인 건 처음이라 당황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여,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운동. 보다시피.”

채도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왜 여기 있냐는 거예요.”

피하다 피하다 이제는 여기에서 마주치다니.


“다니던 좋은 헬스장 놔두고 뭐 하는 거예요?”

“난 여기가 더 좋은데.”

“우리 동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동네까지 쫓아오면 도현과 이렇게 마주칠 확률이 커져서 더 불안한 것이었다.

그녀의 원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하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 내 동네이기도 해.”

“네에?”

“이사 왔어.”

“농담하지 말아요.”

설마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이사가 보통 일도 아니고 좋은 아파트 두고 뭐하러 이런 동네에 이사까지.


“어제 이사 왔는데 몰랐어?”

“네?”

어제라고? 설마……. 설마!

얼마 전에 옆집이 집을 비웠고 한동안 리모델링이다 뭐다 공사를 하는 것 같더니 어제 아침에 이사 트럭이 골목 앞에 들어왔었다.

현서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럼 그게?


“설마, 우리 옆집?”

도하는 환하게 웃음으로서 대답을 대신했다.


“미쳤어요?”

그녀의 반응에도 도하는 뭐가 좋은지 자꾸 웃기만 했다.


“아니, 멀쩡하게 좋은 집 놔두고 왜 그 옛날 집으로 다시 이사를 와요?”

“너도 이제 더 좋은 집 살 만한 경제력 있는데도 지금 옛날 집에서 살고 있잖아.”

“그거야…….”

“네가 너의 옛집에서 사는 것처럼 나도 내 추억이 깃든 내 예전 집에서 지내보려고.”

“아니, 진짜! 원래 이렇게 능글맞은 사람이었어요?”

그를 짝사랑하던 소녀 시절에 옆집 사는 사이였었다가 둘 다 여길 떠나 그 풍파 많은 결혼 생활을 마치고는 다시 옆집 사는 사이로 돌아온 거야?

그 결혼에 지쳐서 떠나고 나니 이게 무슨! 무슨 2회차 옆집 생활이야!

이 작은 동네에서 바로 옆집이면 이래저래 마주칠 상황이야 생기고도 남았다.


“걱정이나 끼치지 말던가, 이현서……. 무리해서 쓰러지기나 하고.”

도하는 한결 진지해진 얼굴로 현서를 보며 투덜댔다.


“하…….”

현서는 너무 기가 차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누가 휘둘릴 줄 알고?


“어? 비행기 아저찌다!”

현서가 흥분해서 화를 내는 사이 손을 놓쳤는지 뒤에 있던 도현이 옆으로 나와 있었다.


“도, 도현아! 너 언제!”

현서는 기겁을 해서 외쳤다.


“비행기 아저찌!”

도현이 웃으며 도하에게 걸어가려 하자 현서는 서둘러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비, 비행기?”

동시에 의아하게 여긴 현서가 안아 든 아이에게 물었다.


“응. 엄마 일하는 데서 저 아저찌랑 비행기 날려쪄!”

아이의 얼굴을 보던 현서는 놀란 표정을 한 채 도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하는 운동 기구에서 일어나 도현을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현서는 저도 모르게 경계하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현서의 경계 어린 눈빛에도 그는 꿋꿋이 다가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게 기억나?”

“응. 아저찌 비행기 잘 날려쪄.”

도하의 얼굴에는 그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온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음에 또 같이 날릴까?”

“응! 오늘!”

“도현아! 오늘은 안 돼.”

현서는 도현의 뒷머리를 감싸며 도하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애썼다.


“이름이 도현이야?”

도하의 질문에도 현서가 대답하지 않자 도현이 돌아보며 대신 대답했다.


“응! 이도현이야!”

현서는 도현이 한 번 본 도하를 놀랍게도 기억하고 반가워해서 더욱 난감했다.


 
그때 지척에서 낯선 노년 여성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유, 아이가 아빠를 많이 빼닮았네.”

지나가는 사람의 오지랖에 현서는 질겁했다. 순간 도하의 눈치를 살펴보니 그 역시 그 말이 아리송한 듯 보였다.

현서는 그가 괜히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못 들은 척 큰 소리로 말했다.


“어서 놀이터 가야지, 도현아.”

그리고 멈췄던 걸음을 서둘러 다시 옮기며 아이를 얼렀다.

그렇게 지나치는 와중에도 도하와 도현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질 않았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지만 현서는 멈추지 않았다.


“도현이, 안녕. 다음에 또 보자.”

“응. 아저찌, 안녕!”

두 사람의 다정한 인사에 현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늘을 보고 눈을 깜빡이며 꾹 참아냈다.

***



-해외에서의 행적은 자세히 알아보기가 쉽진 않을 것 같고요.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로는 대만에 있는 송화궁의 본사 격인 센터에서 부원장이었다고 합니다. 국내엔 올 상반기에 정착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영숙은 의뢰했던 업체 직원이 풀어주는 말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었다.

송화궁에서 쫓겨난 영숙은 원장이 현서라는 사실에 더더욱 이를 갈다가 최근에 막 그녀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그래요? 어쩜 그렇게 갑자기 용이 된 거야.”

-현재 거주하는 곳은…….”

영숙은 직원이 불러주는 주소지를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뭐야, 이 익숙하고도 지긋지긋한 동네 이름은?


“아니, 뭐라고? 그러니까 거기가…….”

영숙은 눈을 크게 뜨고 본인이 다시 한번 주소를 똑똑히 불러주었다.


“여기가 맞는 거예요?”

-네, 맞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생각보다 궁상을 떠네, 얘가. 더 좋은 집에 살고 있을 줄 알았더니만…….”

송화궁의 원장씩이나 되어서 그 오래된 집에 또 들어가 살고 있다고?


-아무튼, 며칠 더 기다려주시면 더 자세한 정보도 알려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부탁합니다.”

전화를 끊은 영숙은 현서에 대한 생각만 해도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제가 아무리 용이 되었어도 그렇지, 감히 나를 그렇게 무시하고 망신을 줘? 뭐? 짝퉁이 어울려? 이걸 그냥! 내가 가만히 있나 봐라.”

 

***

현서는 오늘 오후 출근을 해서 밤에 돌아온다.

저녁 식사를 마친 도현이 토마토가 먹고 싶다고 해서 베이비 시터가 그의 손을 잡고 근처 마트에 데리고 갔다.


“맛있겠다.”

토마토를 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도현은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맛있겠지? 우리 도현이가 좋아하는 토마토가 빨갛게 잘 익었네.”

“빨리 가서 먹으꺼야!”

그러던 중 거의 집 가까이까지 도착했을 때 도현이 갑자기 소리쳤다.


“어? 비행기 아저찌!”

퇴근하여 제집 앞에 막 주차를 한 뒤 차에서 내리던 도하는 아이의 귀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저찌이!”

“도현아.”

모르는 남자와 도현이 인사를 하자 시터는 의아해져선 도현을 보며 물었다.


“우리 도현이 아는 아저씨야?”

“응! 비행기 아저찌야. 옆집 살아서 많이 봤어.”

몇 번 본 것도 자주 본 것 같은가보다. 도현이 옹알옹알 소개를 해주자 도하가 웃으며 직접 나섰다.


“안녕하세요, 지난주에 옆집으로 이사 왔습니다.”

“아아, 그러셨어요? 옆집 분이셨군요.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 같습니다.”

“네, 반가워요.”

“아저찌! 나 또 비행기 있져.”

그때 도현이 생각났다는 듯이 점퍼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작은 비행기를 꺼냈다.

너무도 해맑게 웃는 도현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도하는 아이의 그 해맑은 미소에 동화되어 저절로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 저번에는 노란 비행기였는데 오늘은 빨간 비행기네.”

“오늘 접어쪄.”

그러자 곁에 서 있던 시터가 쿡쿡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래서 우리 도현이 요즘 나갈 때마다 비행기 가지고 나간다고 한 거구나? 비행기 아저씨 만나면 보여주려고?”

“응. 아저씨, 또 날려줘!”

“그럴까?”

“응!”

“날아가면 아저씨랑 같이 주우러 가자.”

도하는 도현의 고사리같이 작은 손이 건네주는 빨간 비행기를 받아 빈 공간에 던졌다.


“우아아! 멀리 간다!”

비행기는 포물선을 그리다가 떨어졌다. 도하는 도현의 손을 잡고 아이의 쪼르르 달려가는 발걸음에 맞춰 함께 달려주었다.


“아저찌 잘 날린다! 도현이보다 멀리 날려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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