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 자기 가정도 못 지킨 놈 (49/92)


#49. 자기 가정도 못 지킨 놈
2022.09.19.



 
구급차가 왔을 때 도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동행하려 했다. 그런데 응급조치를 하는 사이 루카스가 걱정 어린 얼굴로 끼어들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유 대표님은 이 자리의 주최자신데 여길 지키셔야죠. 대표님마저 안 계시면 분위기가 어떻겠습니까.”

도하가 냉정한 얼굴로 끊어냈다.


“예?”

“이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수고하신 분들의 노고가 있는데 전부 취소하시려고요? 비록 좋지 않은 일이 생겼지만 그래도 유 대표님은 남은 분들과 최소 식사는 마치셔야지요.”

“아…….”

그 말도 맞는 말이었기에 루카스는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채도하에게 듣고 있는 건 또 못마땅했다.

아니, 그럼 저는 뭔데 현서의 보호자로 나서?


“그런데 채 전무님이야말로 왜 직접 함께 가시려는 걸까요? 같이 갈 만한 송화궁 직원들도 많은데. 여자 직원도 있고요.”

도하가 그 말에 잠시 루카스를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루카스는 그가 꼭 저를 노려보는 것 같다고 느껴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채도하는 한숨을 작게 내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씹어뱉었다.


“지금은…… 나를 말리지 마세요, 유 대표님.”

그 모습이 묘하게 위태로워 보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하지만 말은 하지 않는 듯 보이는 묘한 표정 앞에서 루카스는 그의 말대로 차마 말리지 못했다.

쓰러진 현서 앞에서 누가 더 그녀를 걱정하는지에 대한 경쟁으로 더는 실랑이를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채도하는 그대로 뒤돌아 구급차에 올랐다.

현서와 함께 차 안에 들어간 그는 이후론 현서의 얼굴만 응시할 뿐이었다. 서둘러 차 문이 닫혔고 이윽고 차가 출발했다.

채도하와 함께 현서가 사라지는 모습을 루카스는 맥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야. 내가 모르는 새 둘이 저렇게 가까워진 거야?”

현서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현서……. 채 전무에게 관심 없는 척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거야?

깨어나면 말해줘, 현서. 어서 깨어나.

지금은 답을 들을 수도 없어 답답했지만 당장은 현서의 안위가 더 중요했으므로 그 걱정이 앞섰다. 그녀가 무사하길.

***

당장에 보이는 바로는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했다.

도하가 요청해서 이런저런 검사 몇 가지는 마쳤지만 일반적으로 금방 알 수 있는 검사 결과들로는 이상이 없었고 그 외에 검사 결과들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 했다.

의식은 아마 얼마 후면 깨어날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는데도 도하는 걱정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현서의 곁만 지키기를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침대 앞에 앉아 있던 도하는 현서의 창백한 얼굴을 미동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서의 이렇게 내리감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결혼 생활 중엔 매일같이 보던 모습이었는데.

한참을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던 도하는 그 긴 속눈썹 위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는 감촉에 안타까운 기분이 차올라 그는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현서의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갔다.

그 광경을 발견한 도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현서야.”

도하의 얼굴을 올려다본 현서는 이내 자신이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예요, 병원인 거야?”

“그래. 너 갑자기 쓰러졌어.”

“하아……. 회식은요.”

현서는 자신이 어느 시점에 쓰러진 건지 알 것 같아 너무도 곤란함을 느꼈다.


“지금은 거의 끝나서 정리 중일 거야.”

“내가 분위기를 망쳤겠네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혹시 어디 아픈 데 있는 거야?”

도하가 다그치듯 물었고 현서는 도리질을 쳤다.


“아니에요. 그냥 오늘 좀 피곤했는데 그래서 그런 걸 거예요. 요즘 일을 많이 해서 과로인가 봐요.”

“몇 가지 검사는 했는데 나중에 다시 와서 더 정밀한 검진 해보자. 혹시 모르니까.”

현서는 눈을 돌려 도하를 보았다. 이렇게 깨어났는데도 여전히 잔뜩 그늘진 얼굴을 보니 그녀에 대한 걱정을 지우질 못하고 있는 듯했다.


“오빠가 나 데려온 거예요?”

“응. 당연히 그래야지.”

덕분에 사람들 앞에서 보기 좋은 그림을 연출했겠구나.

가서 또 무슨 말로 수습을 해야 할지 머리를 써야 하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걱정이 가득한 채도하에게 면박을 줄 수도 없었다.


“……고마웠어요. 오늘…….”

현서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만 가 줘요.”

순식간에 도하의 눈빛에는 실망의 기색이 어렸다.


“깨어나자마자 밀어내기네. 그럴 줄은 알았지만…….”

“그러게, 왜 오빠가 지키고 있어요.”

“나보다 더 너를 걱정할 사람이 또 누가 있는데. 나갈 때까지 자리 지킬 거야.”

도하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팔짱만 꼈다. 현서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만류했다.


“지금 나갈 거예요. 지금은 이렇게 멀쩡한데 오래 있을 생각 없어요.”

“그럼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다시 송화궁 들어가 봐야 해요. 차도 전화기도 가지러 가야 해서.”

“하루쯤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쉬지 그래.”

“오빠 같으면 그럴 수 있어요? 본인도 못 하면서…….”

아플 때도 편히 쉬지도 않아서 걱정 끼쳤던 게 누군데…….

지난날을 회상하며 현서가 구시렁대자 도하는 피식 웃었다.


“이제 안 그럴게. 그러니까 너도 그러지 좀 마.”

“이제 괜찮다니까요. 전화기라도 가지러 가야 해요.

“알았어, 그럼 송화궁으로 같이 가.”

“혼자 택시로 갈래요. 자꾸 남들 앞에서 오빠랑 있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

순간 도하는 가슴을 쿡 찌르는 통증을 느끼며 말을 멈췄다.

풀이 죽은 듯 보이는 도하를 보면서도 현서는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 과거 알려지는 거 싫어요.”

“…….”

“오늘 오빠가 나 병원에 데리고 오기까지도 분명 남들 보기엔 이상해 보였겠죠. 그러니까―”

그런데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현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발자국 앞에서 다가오는 루카스를 보며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현서, 깨어났네? 좀 어때?”

“나는 괜찮아. 회식은 잘 끝났어?”

“나는 먼저 나왔어. 현서가 걱정되어서……. 내가 빠졌으니 뭐, 남은 사람들은 오히려 편하게 술잔 기울이고 있겠지.”

“그래…….”

“갑자기 쓰러지니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내가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갑자기 등장한 루카스 덕에 도하는 김이 샜다.

오려면 좀 더 있다 올 것이지.

다정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도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그걸 또 현서가 흘끗 보곤 사무적인 미소를 짓는다.


“채 전무님 가신대요, 유 대표님.”

도하는 그 말에 더욱 인상을 구겼다.

뭐야, 그럼 내 차가 아닌 루카스를 차를 타고 돌아가겠다는 거야, 지금?


“아아, 채 전무님. 그러세요. 우리 이 원장 보살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술 더 떠 활짝 웃는 루카스까지 가관이었다.

현서는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자연스레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채 전무님. 좋은 일 축하하시려고 오신 자리에서 제가 폐를 끼쳤어요. 바쁘신데.”

도하는 굳어진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더는 시간 뺏으면 너무 죄송해서 안 될 것 같아요. 유 대표님도 오셨으니까 들어가세요.”

불편할 게 뻔한데도 잘만 웃는 현서는 참 노련했다. 씁쓸하게도.

도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녀의 고용주 앞에서 몸도 안 좋은 그녀를 더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으니.

마음 같아서는 보쌈해서라도 내 차에 태우고 싶지만.


“그래요. 그럼 몸조리 잘하시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
.
.

송화궁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현서는 루카스에게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미안해, 루카스. 나 때문에 여러모로 오늘…….”

“무슨 그런 말을 해. 일 열심히 하다 과부하 걸린 현서한테 내가 미안하지.”

“아니야. 일이야 내 욕심이기도 했는데, 뭘.”

“산재 처리해야지.”

현서는 풋, 하고 웃어넘겼다.

그리고 이후 현서는 내내 말이 없었다. 루카스는 한동안 운전만 했지만 실은 망설이고 있었다.


“현서.”

“응.”

현서가 먼저 말해주지 않으니 묻고 싶은 말을 언제 물어도 되는지 망설이게 된 것이었다.


“현서…… 나 모르는 사이…… 채 전무랑 썸으로 발전하기라도 한 거야?”

“…….”

루카스는 결국 주저하던 질문을 던졌다. 채도하가 아닌 현서의 입을 통해 답을 듣고 싶었다.

멈칫하던 현서의 입술이 열렸다.


“루카스…….”

“말해줘, 현서.”

부정하지 않는 현서를 보며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확실히 알고 싶었다.


“하…….”

현서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마침내 대답해주었다.


“그 사람이…… 도현이 아빠야.”

끼이익―

별안간 길 한 편에 차가 급정지했다.


“미, 미안해, 현서!”

차를 멈춘 루카스는 옆에 앉은 현서를 휙 돌아보며 급히 물었다.


“그런데 방금 뭐, 뭐라고?”

놀라 있던 현서는 잠시 어이없어하다가 이내 민망해하는 표정을 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루카스.”

“아, 아니. 현서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지.”

대만에 있을 때 현서의 전남편이 한국의 어느 재벌이라고는 들었지만, 누군지는 알지 못했었다.

현서가 다시는 남편을 볼 일 없을 것처럼 굴었던 터라 더욱 관심이 없었다. 진성이라는 기업이 있다는 것도 한국에 와서 알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라고?

루카스는 믿고 싶지 않은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채 전무가…… 도현이 아빠라니! 하…….”

그런데 이렇게 얽혀 있었다니. 전남편이 하필 진성가 사람이었다니.

진성의 계열사인 SH와 협업을 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요새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더 불안했다.


“그렇게 듣고 보니 정말 도현이랑 닮은 거 같네.”

“그 사람은 아직 몰라, 루카스.”

“뭐?”

“나랑 그 사람 사이에 아이 있었던 거…… 도현이가 자기 아이인지 아직 몰라. 영원히 말할 생각 없고.”

“정말이야?”

“나, 저 사람 모르게 하려고 도망치듯 이혼한 거야.”

현서는 난감해하며 말했고 루카스는 그녀의 얼굴에서 괴로운 표정을 읽었다.

채도하가 하는 양을 보면 그는 현서에게 미련이 있는 게 200프로 확실했고, 둘 사이에 아이까지 있으니 현서만 흔들리면 재결합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나는 말이야, 현서.”

루카스는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말을 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