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그 밤의 강렬했던 그의 고백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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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 밤의 강렬했던 그의 고백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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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 밤의 강렬했던 그의 고백 탓에
2022.09.15.
부드럽게 밀려 들어오는 입술은 아련하게 멀어졌던 감각을 깨웠다.
오랜 갈증 끝에 만난 입맞춤은 금세 격해져 갔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교감이었다.
그러나 현서는 이내 정신을 차리려 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갈 것 같았지만 힘겹게 도하를 떼어냈다. 그러고는 곧바로 뒤돌아섰다.
“미안해요……. 갈게요.”
지금의 그의 얼굴이 어떠할지 너무 궁금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지금은 도현을 향해 앞으로만 나아가야 했으니까.
현서는 더는 말이 없는 도하를 남겨두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식사 거르지 마요.”
몇 걸음 채 떼지 않았을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 말을 덧붙이곤 현관으로 향했다.
***
드디어 송화궁 천연 라인의 화장품이 출시되었다.
SH의 마케팅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첫날부터 완판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품질에 대한 평가에서도 높은 점수를 얻어 연일 놀라운 매출을 기록했다.
애초에 목표였던 매출은 바라던 날짜보다 빠르게 달성할 수 있었고 오늘은 그걸 기념하는 회식 자리였다.
송화궁에서 주최하였고 장소는 송화궁 내 한정식 전문점이었다. 이 건으로 수고해 온 SH와 송화궁의 모든 관련 담당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현서.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SH측이 아직 도착하기 전 미리 장소에 들어가 있던 루카스가 함께 따라 들어온 현서의 안색을 살폈다.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좀 핼쑥해진 거 같기도 해.”
“바빠서 피로가 쌓였나 봐.”
현서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루카스는 그녀를 염려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너무 바쁘게 일하지 마. 내가 눈치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스스로를 너무 극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
“…….”
현서는 그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그랬나. 요새…….
“열심히 일해주면 루카스에게도 좋은 일인데, 뭘.”
“내가 아무리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하고 현서에게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다지만, 건강 망치는 건 안 돼.”
“걱정하지 마, 유 대표님.”
현서는 모처럼 루카스가 진지하게 걱정하자 일부러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동안 수고한 사람들 보양시켜주려고 오늘 기력 회복에 좋은 메뉴들도 준비되어있으니까 현서도 든든히 먹어.”
“그래, 알았어. 고마워, 루카스.”
둘이 담소를 나누는 사이 주위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인사는 나누는 소리들이 입구에서 들리기 시작하여 보니 SH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루카스를 향해 웃고 있던 현서는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내 미소를 지웠다. 방금 막 들어온 채도하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채도하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이미 그녀를 발견하여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심지어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현서는 미리부터 어색해지는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의 생일이었던 그 심란했던 밤 이후 다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다가 오늘에야 다시 보게 된 것이었다.
그날의 채도하가 계속 생각났다. 그 날의 표정, 그 날의 고백, 그 날의 키스. 그 중 무엇 하나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내심 그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 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니 다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는 다가올수록 예의 단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현서는 그 밤의 강렬했던 그의 고백 탓인지 이상하게도 지금의 그의 얼굴마저 슬퍼 보였다.
현서는 그가 그녀가 아닌 대표인 루카스에게 인사를 건네러 오는 것이길 바라면서 슬쩍 자리를 옮겨 피했다.
그런데 더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등지고 있던 그녀의 뒤에서 피했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현서 원장님.”
깜짝 놀란 현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바로 뒤에선 도하가 그녀를 보며 특유의 점잖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갑네요, 원장님.”
작정했다고 선전포고를 하더니 이렇게 대놓고 미소나 날리는 거야?
흘끗 눈을 돌려 루카스를 보니 그새 루카스에겐 다른 사람들이 붙어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현서의 당황한듯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도하는 거침없이 말을 붙여왔다.
“요즘 다른 미팅에는 원장님이 잘 참석을 안 하셔서 뵙기가 어려웠는데, 오늘은 이렇게 원장님을 뵐 수 있어서 정말 반갑네요.”
정중한 얼굴로 반색을 표하는 그의 말에 현서는 더욱 당황하여 괜히 주위를 보았다.
그런데 마침 송화궁 R&D 팀장이 근처에서 그 말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와 넉살 좋은 웃음과 함께 도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채 전무님! 저도 오랜만에 뵙는 건데 이 원장님만큼 반가워 해주실 거죠?”
너스레를 떠는 그의 말에 도하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팀장님도 반갑지만 오늘은 원장님이 더 반갑네요.”
팀장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도하를 보며 현서는 기절할 뻔했다.
기가 막혀. 저렇게 정갈한 얼굴로 뻔뻔하게도.
현서가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사이, 팀장이 껄껄 소리 내어 웃으며 도하의 말을 되받아쳤다.
“와아, 부럽네요, 이 원장님. 역시 어디서든 인기쟁이셔서.”
“하하……. 너무 오랜만에 뵈었나 봐요.”
현서가 자연스레 넘어가려 얼버무리는데도 도하는 그녀에게 자꾸만 당당하게 미소와 함께 말을 던졌다.
“송화궁 제품 매출이 이렇게 좋으니까 탄력받은 김에 다른 라인도 또 빠르게 개발해주셔야죠. 앞으로도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원장님.”
“……아아, 네. 저희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송화궁 센터 매출도 더 상승했어요.”
“그랬습니까? 정말 잘 되었네요.”
도하가 현서와 대화를 이어가자 팀장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러 자리를 떴다. 또다시 둘만 남자 현서는 더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네. 감사한 마음에 오늘 저희가 준비한 자리니까 부디, 편히 즐기다 가셔요, 전무님.”
그 말과 함께 현서는 자연스레 고개를 꾸벅 숙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도 도하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계속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현서는 돌아서서 다른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방금 도하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그 역시 조금은 수척해진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변화인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도하는 그에게서 멀어진 현서의 뒷모습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한 인물이 선선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채 전무님?”
도하는 현서를 보던 표정과 달리 별로 좋지 않은 얼굴로 돌아섰다. 루카스 유였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세요?”
루카스는 평소 그답게 능청스러운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도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하는 언제 방금까지 웃었냐는 듯 서늘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 표정 그대로 루카스의 물음에 착실하게 대꾸까지 해주었다.
“유 대표님의 아내도 아닌, 유 대표님의 여자도 아닌 사람을 보고 있었습니다.”
“허, 허…….”
거짓말을 들켰다는 걸 깨닫자 루카스는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채도하……. 좀 더 약 올려 주고 싶었는데.
“미혼이신 분께선 왜 아이 아빠로 오해받고 싶어 하셨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같은 오해를 받길 원하는 입장이니까요.”
그 유연한 루카스마저 방금 도하의 말에는 적잖이 당혹감을 느꼈다.
이 사람이……. 이제 주위에서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이건가.
다행인지 뭔지 주위 인물들은 조금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말을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걸 채도하가 신경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채 전무님께 이렇게 저돌적인 면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저 역시, 유 대표님한테 사람을 그렇게 가지고 노는 재주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하하…….”
루카스는 그답지 않게 꽤 당황했고 도하는 그런 그에게 조금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유감이었지만, 비즈니스 파트너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신 분이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오늘 모쪼록 좋은 시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도하는 유유히 그의 곁에서 멀어져 그를 위해 마련된 자리로 갔다.
연구소장과 담화를 나누던 현서는 도하를 흘끗 보았다. 그 역시 눈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소장과 대화 중 눈이 마주치자 다시 조용히 눈을 피한 현서는 태연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제 소장님도 앉으셔요. 지정석으로 가시면 됩니다.”
“예, 가시죠.”
소장을 안내하며 뒤따르던 현서는 실내 전경을 한번 둘러보았다.
지금은 조명을 남김없이 다 밝혀서 많이 밝은 편인데 좀 더 편한 저녁 식사 분위기를 위해 조명을 낮추는 게 좋을까 고민하며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불빛이 참…… 쨍하다.
묘하게 어지럽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몽롱하게 밀려드는 현기증과 함께 주변 시야와 소리가 점멸되어갔다.
“현서야!”
도하가 어느 누구보다 가장 빠르게 그녀에게 달려왔다. 그녀와 바로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아닌, 조금 떨어져 있던 그가 먼저 주저앉아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현서야, 현서야!”
도하는 현서의 얼굴을 감싸며 그녀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모두가 놀라 현서를 둘러싸며 걱정에 웅성거렸다.
그리고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들은 도하의 모습을 보며 또 크게 놀라고 있었다. 둘의 사이를 모르는 그들이 보기에 다분히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기에.
도하가 현서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들은 루카스가 한발 늦게 발견하곤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현서!”
루카스는 재빨리 몸을 굽혀 현서의 손을 잡으려 했다.
“만지지 마!”
그 순간 도하가 매섭게 소리쳤고 루카스는 주춤했다.
루카스가 벙쪄 있는 사이 도하는 다시금 현서를 살폈다. 현서의 의식이 바로 돌아오지 않자 그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매출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던 자리.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모두가 현서의 몸에 별 탈이 없기를 바라면서 수심 어린 얼굴로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하는 내내 황폐한 표정으로 현서의 얼굴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채 전무와 이 원장의 사연을 모르는 루카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런 도하의 모습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너무도 심각한 분위기에 차마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