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사랑하더라
(47/92)
47. 사랑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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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사랑하더라
2022.09.12.
지금 눈앞의 이현서는 그에게 좀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래도 너무 좋다. 네가 와서.
속없이 웃는 도하의 얼굴을 보며 현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웃는 낯짝에 대고 화를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리 기사도 그냥 보내고 끝내 직접 걸음을 하게 만드는 남자 앞에서.
“내가 정말…… 생일만 아니었어도…….”
생일날 혼자서 처량 맞게 술이나 푸고 있을 그를 혼자 두느니 그냥 와서 직접 처리하는 게 속 편하지 싶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야? 그러네…….”
“뭐라고요? 후……. 어이가 없네요. 진짜.”
정말 몰랐다는 듯 웅얼대는 도하 앞에서 현서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예전부터 본인의 생일을 자주 잊곤 했다. 현서가 말해주고 챙겨주어야만 깨닫곤 했다.
현서는 남편의 생일날만큼은 직접 만든 요리들로 생일 파티를 해주고 싶어서 몇 날 며칠 전부터 구상하고 고심하곤 했었다.
그랬으니 당일에 또 바쁜 일들로 무산되지 않도록 미리 그녀가 귀띔해주어야만 했다. 그때마다 그는 그제야 제 생일인 걸 기억해내곤 했던 것이다.
어릴 적에는 영숙이 챙겨주지 않아서 혜수가 챙겼었고, 자란 뒤에는 현서가 챙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혼자서 이게 뭐야.
토요일이라고 비서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을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을 텐데.
“축하해주는 사람들 없었어요?”
“오늘은 전화기 안 봤어. 너랑 통화할 때만 빼고…….”
“하, 진짜! 자신한테 관심 좀 갖고 살아요. 왜 아직도 이래요?”
아니, 예전처럼 일에 치여 그랬다면 차라리 나았지. 그때는 이렇게 술에 절어 있지 않았고 절제라도 했었으니 나았지.
“일어나요,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계산도 이미 끝냈으니까 더 마실 생각하지 말고요.”
현서는 두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대리 기사는 거부했던 도하는 현서의 손길에는 순순히 일어섰다.
순간 휘청거리긴 했지만 현서가 그의 팔을 그녀의 어깨에 둘러 도와주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한 걸음씩 떼며 밖으로 나가면서 현서가 투덜거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어울리지 않게. 어휴, 무거워.”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어쩌다 한 번쯤은 있을 수도 있다지만, 채도하는 이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왜인지 그가 이러는 건 정말 싫었다.
“왜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요?”
“그러게. 왜 이럴까, 내가…….”
도하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댔다. 현서의 부축을 받아 나가는 게 민망하면서도 가까이 있는 게 좋아서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현서는 도하와 함께 제 차에 도착하자 뒷좌석 문을 열어 그를 태우려 했다.
“아니야. 앞에…….”
그러나 도하는 비척대는 몸으로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뒤에서는…… 네 얼굴 잘 안 보여.”
헛웃음을 내쉬던 현서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그를 내버려 두고 운전석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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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 아파트에 들어선 현서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아까보다도 더 인사불성에 가까워진 채도하는 정말 무거웠다.
“들어가요.”
현서는 도하와 함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향했다.
침대도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 위에 술이 떡이 된 채도하를 눕혔다.
털썩 쓰러지듯 누운 도하는 현서와 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현서가 빼려 했지만 그가 꼭 잡은 탓에 잘 빠지지 않았다. 현서는 한탄을 내쉬며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도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을 닫았다.
현서는 잠시 동안 도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얼굴이 고단하면서도 평온해 보였다.
그 와중에도 꼭 잡은 손에는 힘을 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작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걸로 안심하는 듯이 잠들어서는.
현서는 어쩌질 못하는 기분에 젖어 있었다.
이렇게 절제 없이 마신 채도하를 보니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가 망가져 가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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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들자 점차 오감이 돌아오며 후각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익숙했지만 정말 오랜만인 냄새였다. 이 집에서는 더욱이 생소해져 버린.
몸을 일으키는데 침실로 현서가 들어왔다.
“너 아직 안 갔구나, 다행이다.”
“그런 소리 하는 거 보니 아직 취했네요.”
현서의 핀잔에 도하가 나직하게 웃었다.
“미안…….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야?”
“한 시간쯤?”
“근데도…… 아직 안 갔네.”
“안 그래도 이제 가려고요.”
그 말을 내뱉곤 돌아서서 침실을 떠나는 현서의 뒷모습을 도하는 반사적으로 따라 나갔다.
거실을 지나가다 보이는 식탁을 발견한 순간 도하는 냄새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미역국 끓여놨으니 한술 떠요.”
미역국과 밥, 그리고 몇 가지 찬이 있었다. 손이 빠른 현서라지만 제가 잠들어 있을 한 시간 동안 바삐 움직였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단출하지만 그래도 생일상이에요.”
“이 시간에 뭘 그런 고생을 했어…….”
“아까 보니 안주도 제대로 안 챙겼던데. 7시에 술에 절어 있었으니 저녁도 거른 거잖아요.”
구시렁대는 현서의 얼굴을 보면서도 도하는 씩 하고 입가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이현서가 내 걱정해주는 거 오랜만이네.”
“생일이라 한 번 선심 쓴 줄이나 알아요.”
“이현서가 걱정해주니까 왜 이렇게 감동적이지? 매일 생일이었으면 좋겠네.”
“이제 마지막이에요. 내년 생일부턴 국물도 없어요.”
철없는 아이 같은 소리나 하고 있는 도하에게 현서가 쏘아붙였다.
도하는 현서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도 감격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이런 감격이 오래전에는 당연한 듯이 제가 가졌던 것이었다. 현서가 마음 써주는 크고 작은 부분들이.
그게 전부 이렇게 감동적인 것들이었는데.
그런 걸 누릴 줄도 모르던 바보였던 거다, 나는.
무엇에 그리도 미쳐 살았나. 그 빌어먹을 일에 빠져 살아 더 중요한 걸 망쳐놓았나.
그때도 현서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걸 이루어야 제 삶에 들어와 있는 현서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던 걸까.
현서는 그런 걸 바란 적이 없었는데.
채도하란 인간은 채 회장님에겐 아픈 손가락 같은 자식이었지만 남들에겐 그저 어딘가에서 굴러먹다 나타나 진성을 거저먹으려 하는 운 좋은 낙하산이었다.
그 선입견을 박살 내고 싶었다. 그래서 모두가 저를 진성의 후계자라는 걸 자연스레 인정하는 날이 빠르게 오길 바랐다.
어쩌면 채 회장님의 면을 서게 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제 가족이 당당하도록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조금은 평범하지 않은 출생 탓에 상처 입은 제 자존심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수군대는 이들에게 보란 듯이 결과를 내놓음으로써 자신을 입증하려 했던 이유가.
그가 제 자리에서 성과를 낼수록 그마저 회장님에게서 받은 유전자가 칭찬받았을 뿐이었다.
물론 진성 오너가에서 유전된 비상한 능력 덕도 있겠지만 노력 없이 가능할 리는 없었다.
어찌 보면 노력하는 근성도 유전이었으려나.
그러나 채현우 회장님도 그러했지만 채도하는 한술 더 떠 지독할 정도로 일에 집착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다 변명 같았다. 그때도 지금도 이현서보다 소중한 건 없었는데.
왜 그 목표를 그토록 서둘러 이루고자 했을까. 그걸 이룰 때까지 이현서는 기다려주지 않았는데.
“우리……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현서야…….”
맥락도 없이 도하가 읊조렸다. 그가 눈을 돌려 현서를 보니 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얼마 전처럼 마냥 차갑지만은 않았다.
이것도 내 생일이라 그런 건가.
“갈게요, 너무 늦었어요.”
현서는 가슴 일렁이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시터에게서 방금 도현이 잠들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제 삶은 그곳에 있었다. 채도하와 저는 이제 섞일 수 없었다.
생일이라고 느슨해지는 건 여기까지였다. 더는 위험했다.
그러나 현서는 두어 걸음조차 떼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 뜨거운 온기가 감긴 탓이었다.
“가지 마…….”
우뚝 멈춰선 채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현서의 등에 도하의 가슴이 닿았다. 이내 그는 두 팔 가득 현서를 안았다.
그에게 안기는 순간 현서는 그 품이 얼마나 오랜만인지를 실감했다. 얼마나 따뜻했었는지도.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도하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러지 마요.”
꼼짝없이 안긴 채 현서가 말했다. 그러나 도하는 그녀를 더욱 꼭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현서야…….”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부드럽게 감겼다. 현서는 당황하여 잠시 주춤했다.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하더라…….”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현서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사실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 같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의 고백에 어쩔 도리없이 눈가가 촉촉해져 갔다.
“사랑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거 같아.”
현서는 떨리는 기분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너무 떨려서 더 듣기가 두려워지는 고백이었다.
한때는 세상 무엇보다 가지고 싶었던 게 이 남자의 마음이었다. 이런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었던가.
그런데 왜 지금인 걸까.
아무리 참아도 속절없이 눈물은 흘러내렸다.
“평생 이렇게 너를 사랑할 거야.”
도하의 목소리에 고통이 묻어났다. 이렇게 절망적인 고백이 또 있을까.
“이런 식의 취중 고백……. 내일이 되면 후회할 거예요.”
“술김에 하는 말 아니야.”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어요.”
“내가 다시 좁힐 거니까 괜찮아.”
현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다가가고 내가 노력할 거니까.”
현서는 눈물만 머금은 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럴 수가 없는지, 왜 그를 거절해야만 하는지 그는 모른다. 그에게 다 할 수 없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는 모른다.
우리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우린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걸 언젠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도하는 잠잠해진 현서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녀를 향해 서며 그녀의 몸을 돌렸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 대신 눈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도 마음이 아픈 듯 보였다.
그와 눈을 맞추지 않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한없이 가슴이 옥죄어들 것 같았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현서의 얼굴을 보며 울컥 치미는 감정에 사로잡힌 도하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입술을 내렸다.
현서의 내리떴던 눈이 갑작스러운 키스에 들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