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도대체 어떤 여자야? (44/92)


#44. 도대체 어떤 여자야?
2022.09.01.


영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원, 원장님이 나를 만나준대요?”

“예, 그렇습니다.”

비서가 직접 원장실 문을 열어주려 다가오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난동 부리는 소리가 들렸나 보지?

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어쨌든 통했으니 다행이었다.

끝내 탈퇴를 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지가 궁금해서라도 원장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으니 말이다.

바짝 긴장한 영숙은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대강 다듬고 머리칼도 두어 번 쓰다듬고는 원장실 앞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당장 만나자니까 급격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그 고고한 면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탈퇴만은 하지 않도록 설득해볼 마지막 기회였다.

비서가 열어준 문으로 영숙이 성큼성큼 들어가자 비서와 보안요원들도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영숙은 눈동자를 굴리며 원장의 자리를 찾았다.

도대체 어떤 여자야?

그러다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한 세련된 분위기의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영숙은 반사적으로 정중히 인사를 건네려 입을 뗐다.


“안녕하…….”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여자의 얼굴이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

너무 의외의 인물이라 믿어지지 않아서 제가 아는 인물이 맞는지 멍해지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심하게 닮은 사람인데 실수라도 하면 안 되니까 명패로 눈동자를 내렸다.

[원장 루나 리]

루나 리. 성은 같은데 이름이 현서는 아니고 얼굴은 아무리 봐도 이현서인데.

귀신에 홀린 것처럼 얼이 빠져 있는데 원장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한영숙 회원님.”

영숙의 눈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목소리까지 같을 리는 없었다. 이현서가 맞구나!


“너, 너!”

“저를 만나고 싶어 하셨다고요?”

태연하게 묻기는 하나 영숙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눈치는 아닌 걸 보니 더더욱 현서가 틀림없었다.


“네가 왜 거기 앉아 있어?”

영숙은 뒤통수를 크게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뻐끔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현서는 흐린 미소를 띠었다.


“제가 송화궁 원장, 루나 리입니다.”

영숙의 입이 절로 딱 벌어졌다.


“뭐어? 네, 네가?”

왜 원장 자리에 앉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딴 말을 믿을 줄 알고 저러나 싶어 어이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어른 이런 식으로 놀리는 거 아니다. 농담도 통할 만한 농담을 해야지. 원장……은 어디 있는 거야? 내가 좀 급해서 원장부터 좀 봐야겠다.”

영숙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곁에 서 있던 비서는 그 둘의 사정을 몰라 다른 의미로 함께 놀라고 있었다. 민망해진 비서가 슬쩍 영숙에게 말해주었다.


“회원님. 실례지만 이분이 루나 리 원장님 맞습니다.”

영숙은 그 말을 한 비서를 휙 돌아보았다.


“……예?”

그리고 다시 한번 현서의 얼굴을 보았다. 서늘한 표정의 현서가 그녀에게 묻는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죠?”

“…….”

 

 
영숙은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진짜 송화궁 원장이라고? 어떻게?”

“회원님. 저, 시간 얼마 없어요. 아시다시피 예정에 없는 일정이라서요, 지금.”

“허어, 허!”

영숙이 헛웃음을 쳤다. 정말 기함할 노릇이었다.


“너! 세상에! 너 출세했구나? 어머나, 언제 이렇게 성공한 거니?”

영숙은 금세 기조를 바꾸었다.


“사람 일 모른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사담할 시간은 없고요. 어서 용무를 말씀하셨으면 좋겠네요.”

“아니, 얘! 그건 둘째치고! 너 이렇게 잘 나가는데 왜 우리한테는 연락 한 번이 없었니?”

“그게 서운하세요?”

“아유, 그렇다는 건 아니고.”

영숙은 어쩔 줄을 몰랐다.


“뭐, 그래. 우리 이야기는 차차 할 기회야 많겠지. 이렇게 만났으니까. 지금은 네가 바쁘니까 용무……를 먼저 말해야겠지?”

너무 어색하고 놀라웠지만 그래도 그 어렵게 생각했던 송화궁 원장이 전 며느리라니, 생판 모르는 남보다야 오히려 유리할 것 같았다.

원래 착했던 애니까 어떻게든 구워삶으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런데 그러고 보니! 그럼 뭐야.


“가만 있자, 그러니까 네가 날 탈퇴시킨 거니?”

“뭐, 최종 결정은 제가 한 게 맞죠.”

그렇게 생각하니 영숙은 순간 열이 뻗쳐 흠칫 눈동자를 떨었지만 이내 유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 그랬구나. 뭐, 운영하는 책임자로서 네 입장이란 게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렇게 이해해주시니 다행이네요.”

“후……. 뭐, 그래. 어찌 보면 경찰에 연락 안 한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겠지. 그것도 원장이 너니까 나를 봐 준 게 아닌가 싶긴 하네.”

“그렇죠.”

“네가 원장이었으면 처음부터 네가 나한테 직접 말하지 그랬니. 괜히 직원이랑 입씨름했잖아.”

현서는 여유로운 눈길로 영숙을 바라보았다.

집구석에서의 제 포지션을 권력인 양 휘둘렀던 한영숙이 이제는 이 송화궁 내 권력의 정점인 이현서 앞에서 설설 기고 있자니 참으로 코미디다.


“아무튼 나를 봐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한영숙은 정말이지 가식적으로 잘도 웃었다.


“그런데 이왕 봐준 거……. 조금만 더 봐주면 안 될까? 이제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도 보게 되었는데 말이야.”

현서는 잠시 침묵한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원장실 밖에서 원장을 만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칠 때부터 예상했던 그림이었다.

원장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도 한영숙은 이렇게 염치없게 굴었을 사람인데, 원장이 옛 며느리니 얼마나 질척일지는 뻔했다.


“사실 원장이면 뭐, 네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이잖아. 나 탈퇴는 막아줄 수 있잖아. 강옥희 여사님 얘기대로면 가입도 네가 시켜줬던데.”

살살 웃는 영숙의 면전에 대고 현서는 냉정한 얼굴로 잘랐다.


“죄송하지만 그 일에 대해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영숙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져 갔다.


“아, 아니. 그러지 말고 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줘!”

단호하게 막힌 영숙은 현서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보안요원들도 그녀를 바싹 따라붙으며 경계하듯이 바라보았다.


“탈퇴만큼은 안 되게 해줄 수 있잖아. 매화 욕심 안 낼게, 이제. 응? 죽 센터 서비스라도 받을 수 있게 해줘. 내가 정말 조용히 다닐게, 현서야.”

애걸복걸하는 영숙의 얼굴이라니. 이런 날이 올 줄을 그녀 자신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현서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느른하게 말을 뗐다.


“저희는 도난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비밀에 부쳤지만 매화 회원님 중에 목격자가 계셨는지 이미 소문이 퍼진 모양이에요.”

“뭐? 어, 언제 그렇게!”

“아시다시피 그런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퍼져나가잖아요. 죄송하지만 매화 센터뿐만이 아니라 이미 송화궁 내에 소문이 파다해진 것 같아요. 그런 상황인데 절도범이 여전히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두면 다른 회원님들이 가만히 계실 거 같아요?”

영숙은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로 숨을 씩씩거렸다.


“뭐어? 절, 절도범?”

“틀린 말인가요?”

딱딱한 어조로 되묻는 현서의 얼굴을 보며 영숙은 삐딱한 심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 너, 지금 말본새를 보니 그 소문 혹시 네가 낸 거 아니야? 너 나 아직 미워해서 네가 그랬지? 나 엿 먹어 보라고!”

“제가 그런 일로 송화궁 이미지에 먹칠할 필요가 뭐 있나요? 좀 전에 말씀하신 대로 형사 처벌 없이 지나가도록 회원님들 설득하는 것도 힘들었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너랑 한집에서 살았던 남편을 낳아준 나한테!”

그 말에 비서와 보안요원들이 놀라서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켰다.

현서는 영숙의 무슨 말에도 타격이 없는 듯 담담한 얼굴을 일관하고 있었다.


“한때 남편이었던 사람을 낳아주신 분이니 이 정도에서 넘어간 거죠. 채 회장님이랑 채도하 씨에게 알려지지 않게 해 드리려고 제 선에서 처리될 줄이나 아세요.”

영숙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록 아들과 이혼하고 자신과 헤어지는 순간이 좋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나 있었다. 몇 년 만에 만났으니 예전의 갈등도 유야무야 넘어가길 바랐는데.

저것이 오히려 전보다 더 독해져 있었다. 새댁 시절 이현서라면 제 말에 죽는시늉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언제 저렇게까지 변한 건지 혀가 내둘렸다.


“하! 너 잘 났다! 너, 참 많이 컸구나!”

“네, 저 많이 컸어요. 그래서 많이 바쁘고요. 회원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으니까, 오늘 저희 할 말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안녕히 가세요.”

“야!”

버럭 언성을 높이자 가까이 서 있던 요원들과 비서도 잔뜩 긴장을 하고 들었다.


“너, 나인 줄 알고 일부러 가지고 놀다가 내쫓았지? 곯리는 기분으로! 아주 재밌었니?”

이제는 정말 이판사판이었다.


“그래서 속이 후련했니?”

어차피 망했다. 송화궁에 더 붙어 있기는 이미 텄고, 저것이 저렇게 기고만장하게 나오니 저게 원장으로 있는 한 치사해서 더 붙어 있고 싶지도 않았다.


“너!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어차피 내 평판 바닥난 거 내가 이놈의 송화궁의 더럽고 치사한 운영 방식에 대해서 다 까고 다닐 거야!”

“영업방해죄까지 추가하시려고요? 회원님은 여전히 참 대단하세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놈의 회원님 소리! 너 자꾸 그렇게 부르지 마!”

“하긴. 이제 곧 탈퇴 되실 테니 회원님 소리 들으시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원치 않으시면 지금부터 부르지 않을게요, 아줌마.”

“뭐, 뭐? 아줌마?”

“회원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면서요. 전에는 또 사모님이라고도 부르지 말라고 하셨죠, 아줌마.”

“이게 정말!”

영숙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현서에게 달려들려 돌진했다. 그러나 그녀는 현서의 털끝 하나에도 손댈 수가 없었다.

한 발을 떼는 순간 너무 쉽게 보안요원들에게 저지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거 안 놔!”

소리를 꽥 지르며 영숙은 그들을 뿌리치려 발악을 했다.


“놔!”

“송화궁 밖으로 내보내세요.”

“가시죠.”

현서의 냉랭한 지시에 따라 보안요원들은 영숙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한 요원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악!”

발버둥 치던 영숙이 요원 한 명의 팔을 물어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도 영숙은 계속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놓으라고 했잖아!”

그러자 할 수 없이 나머지 요원 한 명이 과격하게 몸싸움을 벌여 그녀를 넘어뜨린 후 뒤에서 그녀를 완전히 포박하듯 단단히 잡았다.

본의 아니게 영숙은 꿇어앉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보며 현서는 한숨을 쉬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하……. 정말.”

이내 그녀는 전화기 속 상대에게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네, 수고하십니다. 여기 영업 방해를 하며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있는데요.”

영숙은 눈을 부라리며 현서를 노려보았다. 현서 역시 지지 않고 동시에 영숙을 노려보며 꿋꿋하게 통화를 마쳤다.


“아줌마. 곧 경찰이 올 거예요. 순순히 나가시면 다시 취소해 드리죠.”

“야! 이제 나를 협박까지 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어찌 이래!”

너무 약이 올라 악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러나 현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조곤조곤 말 몇 마디로도 영숙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아, 그리고 아줌마. 이거 도로 가져가세요.”

현서는 책상 아래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영숙의 발 앞에 휙 던졌다. 툭 하고 떨어진 물건을 본 영숙은 그게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