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 필요한 건 너 하나뿐 (43/92)


#43. 필요한 건 너 하나뿐
2022.08.29.



 


-한마디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품들이죠. 예를 들어 처음 불러주신 앰플은 박 모 회원님, 아이크림은 최 모 회원님, 세럼은 장 모 회원님, 크림은 김 모 회원님의 제품으로 확인됩니다. 한영숙 회원님.

“……네?”

당황하던 영숙은 더욱 깜짝 놀랐다. 방금 직원이 분명 한영숙 회원님이라고 했다. 매화 회원인 척하고 있는데…….


“내, 내가 누군지 알았어요?”

-예. 아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전화번호로 회원 정보가 뜹니다.

영숙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이, 이를 어째.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죄송하지만 한영숙 회원님께서는 죽 센터 회원이신데 매 센터의 제품들을 어떤 경로로 보유하게 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 그건 거기에 있는 친구가 준 거예요!”

-좀 전에는 회원님께서 매화 회원이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전화기 속 직원의 목소리가 한결 더 차분해졌다. 이상하게도 냉정하다 싶을 만큼.


“그거야! 가타부타 설명하기 성가시니까 그냥 그렇게 말한 거고! 그냥 제품에 문제가 있어서 제품에 대해 문의한 거뿐인데 내가 어느 등급 회원인지가 중요해요?”

영숙은 방귀 뀐 놈이 성내듯 되려 열을 냈다.


-그럼 매 센터의 어느 회원님께 선물 받으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그……. 갑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아휴, 늙으면 종종 이래! 걔가 그러니까, 내 동창이야. 그 애가 준 거야.”

-한영숙 회원님.

그러나 갑자기 차갑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이름이 불렸고 영숙은 주춤했다.


-그 제품들 모두 금일 분실물로 신고된 제품들로 확인됩니다만.

영숙은 순간 등골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완전히 말려들게 된 그녀는 이제 무어라 말할 수가 없어 입만 어버버했다.


“예? 자, 잠깐만요! 그, 그럼 뭐,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불러주신 번호들은 모두 도난으로 신고된 제품들입니다, 한영숙 회원님.

직원의 목소리는 이제 대놓고 딱딱해져 있었다.

젠, 젠장! 망했다!

영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전화를 그냥 끊어버렸다. 완벽하게 사지에 몰려 달아날 곳이 없었다.


“어, 어쩌지? 이제 나 꼼짝없이 도둑X으로 찍힌 거야?”

혼비백산해서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쪼잔한 여편네들! 돈도 많은 것들이 없어졌으면 그냥 대충 좀 넘어갈 것이지, 쪼잔하게 그깟 화장품, 그거 하나씩 잃어버렸다고 신고들을 해?”

이럴 때마저 그녀는 남의 탓만 하고 싶었다.

울상이 되어 있던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죄인이 되고 나니 괜히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랐다.

발신처는 송화궁이었다. 그냥 끊어버렸더니 또 걸려오는 듯했다.

아아! 무슨 할 말을 더 하려고 이러지?

받지 않자 전화는 끊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걸려왔다.


“아이고……. 이걸 어쩐다?”

영숙은 무서워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송화궁입니다. 전화가 끊어졌네요.

“아아, 네. 그랬나 보네요.”

-한영숙 회원님. 사실 안 그래도 아까 전화 주시기 전부터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매 센터에서의 도난이 의심되는 상황이라 CCTV를 추적한 결과 어제 오후 4시경 한영숙 회원님께서 제품들에 손을 대신 것으로 확인되었거든요.

“그, 그거 저 아니에요! 제 동창이 훔쳐다 줬나 보죠! 화면이 제대로 보이기나 해요?”

-회원님, 입구에서부터 작은 사각지대조차 전혀 없는 곳이 매화 센터입니다. 회원님의 모든 동선이 다 드러났기 때문에 더는 거짓말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영숙은 이제야 제가 얼마나 심각한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작은 화장품 하나씩이었어도 매화 센터의 물건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매화 등급씩이나 되는 회원들이 화장품 하나 잃어버렸다고 CCTV까지 확인해서 잡아낼 줄이야.


“아…… 아, 죄, 죄송합니다. 내가 훔치려던 건 아니었고 잠시만 빌렸다가 다시 가져다 놓으려고 했어요.”

-그런 말씀은 통하지 않는다는 거, 이제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영숙은 당장이라도 경찰이 들이닥칠 것 같아서 새가슴처럼 심장이 졸아붙어 있었다.


-다행히 루나 리 원장님께서도 송화궁 관련하여 이런저런 말들로 외부까지 시끄러워지는 건 원치 않으셔서 조용히 넘어가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아! 그, 그래요? 정말이에요?”

-예. 대신…… 한영숙 님께서 송화궁에서 영구 탈퇴하시는 조건입니다.

“네에에? 아, 아니, 탈퇴라뇨! 저기! 그것만은 안 돼요!”

탈퇴라니! 영숙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길길이 뛰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일 없이 넘어가 주시겠다는데 이보다 더 관대한 처사가 있을까요?

“아니, 그래도! 내가 송화궁에 어떻게 가입했는데에! 내가, 내가 그 화장품값 다 지불하면 되잖아요. 다시 새 걸로 구매하시도록 돈 드린다고 해주세요!”

-저희는 송화궁 내의 교양 수준을 높이고 클린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절도범을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완강한 태도 앞에서 영숙은 좌절했다. 강제 탈퇴를 당하면 당장에 지화자 여사나 혜미에게는 또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영숙은 이제는 그저 빌다시피 했다.


“아휴, 그래도 한 번만 봐주세요! 영구적으로 탈퇴라니, 그럼 다시는 송화궁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앞으로 한영숙 회원님께서는 송화궁의 모든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없게 됩니다.

“아니, 저기요, 선생님! 그것만은 절대 안 돼요!”

특히 혜미 앞에서 도둑질을 했다고 불 수는 없는데. 그토록 극찬해 마지않던 곳에 갑자기 발길을 뚝 끊으면 누가 봐도 이상하기 짝이 없을 텐데.


-죄송합니다, 회원님.

“아니,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벽처럼 막혀 좌절하자 이제는 모든 게 원망스러워서 짜증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깟 화장품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렇게 얼굴만 뒤집어놓고 말이야!”

-개개인에 맞춰 커스터마이징된 제품이었습니다. 안 맞는 남의 물건을 쓰셔서 생긴 부작용에 대해선 저희가 책임져드릴 수가 없습니다. 혹시 센터 내 보관함에 소지품들 넣어두셨다면 그건 이번 주 안에 찾아가 주시면 됩니다. 이후론 출입이 제한될 예정이라서요.

“아아!”

끝내 영숙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말씀하신 대로 처리되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전 시모 한영숙을 드디어 탈퇴시켰다. 재미있을 것 같아 가입시켜놨더니, 한영숙은 생각보다 더 진상이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한다. 절도죄까지…….


“후…….”

직원이 나가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영숙은 경찰서에 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냥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채도하를 생각해서 그나마 참았다. 영숙을 경찰에게 넘기게 되면 영숙의 온 가족이 알게 될 것이고 채도하도 알게 될 것이니까.

안 그래도 어릴 적부터 현서는 한영숙 같은 사람을 모친으로 둔 도하를 불쌍하게 생각해왔다. 그런 모친이 도둑질까지 했다는 걸 알면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겠는가.

그것도 모친을 쫓아낸 게 그의 전부인이니, 이런 상황을 알게 되면 그는 진흙탕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 들 것이다.

가뜩이나 요즘 이현서 앞에서 절절매는 채도하인데. 그의 마음은 더 엉망진창이 되겠지.


“참, 그러고 보니 저것도 돌려보내야 하는데…….”

현서는 한영숙이 보냈던 마지막 선물이 들어 있는 상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자꾸 선물을 보내서 우스웠는데 이제 그 짓거리도 볼일이 없을 것이다. 선물도 우습지만 아부가 가득한 편지를 꼭 동봉해서 읽을 때마다 속이 역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매 센터에 가고 싶어 하는 그 속을 모르지 않아서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는 게 더 웃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매 회원은 커녕 죽 회원도 못 해 먹게 되었으니 지금쯤 아마 약이 단단히 올라 있을 것이다.

늘 남을 무시하고 자격지심과 콤플렉스로 인해 억지로라도 위로 올라가고 싶어하는 그 허영심은 늘 꼴불견이었다.

현서는 조용히 혼자서 비소를 입에 머금으며 지금쯤 분통해하며 드러누워 있을 한영숙을 떠올렸다. 오늘 이렇게라도 그 자존심을 박살 내버리고 나니 꽤 고소했다.

한때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잘해준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변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녀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

그 생각을 하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속을 진정시키며 앞에 있던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골칫거리 하나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다음 일을 해볼까.


“아…….”

그런데 현서는 잠시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즘 너무 무리해서 일했나.

아무래도 과부하에 걸린 것 같았다.


 

***



-어머니, 뭐 하고 계셨어요?

“어어, 난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왔어.”

며칠간 혜미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더니 먼저 전화가 왔다.


-아, 그러셔요? 송화궁 가시자고 하려고 했는데. 그럼 내일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응? 아, 아니. 나 이제 거기 지겨워서 그만 가고 싶어.”

-네? 지겨우시다고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좋아하셨잖아요.

“그냥 이제 다니는 것도 좀 귀찮기도 하고, 갑자기 그러네.”

-그러셔요? 갑자기 왜…….

혜미의 실망하는 목소리에도 영숙은 해줄 말이 없었다.


“아무튼 지금은 밖이라 끊을게. 나중에 통화하자.”

대답도 듣기 전에 후다닥 전화를 끊은 영숙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실 그녀는 지금 이미 송화궁에 와 있었다. 여기서 보관하고 있는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마지막 방문을 한 것이었다.

이대로 가야 하는 거야?

아니야! 안 되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할 수가 없었던 영숙은 보관함으로 향하던 걸음을 끝내 돌렸다.

곧 원장실 앞에 도착한 영숙은 비서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다급하게 말을 뗐다.


“나, 원장님 좀 한번 만나게 해줘! 응?”

이판사판이었으니 영숙은 제가 비서에게 반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것도 주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이다.


“제발 부탁 좀 할게!”

“죄송합니다, 회원님.”

“아니, 그 고고한 얼굴은 끝까지 보여주질 않는 거야?”

영숙은 원장실을 향해 들으라는 듯 일부러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선물까지 받아먹어 놓고 사람 내쫓았으면 최소 얼굴은 한 번 내비치는 성의는 보여야지, 앙?”

그때 남자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이러시면 안 됩니다.”

큰 소리가 나자 주변에 있던 보안요원 두 명이 다가와 그녀를 저지했다. 그러자 영숙은 이번엔 아예 작정한 양 보안요원 한 명을 밀치고 원장실로 돌진하려 했다.


“비켜!”

그러나 곧 다시 그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이거 놔!”

점점 난동이 심해지는 중에 비서 데스크의 키폰이 울렸다.


“네, 원장님.”

영숙은 고개를 돌려 전화를 받고 있는 비서를 보았다.


“예, 죄송합니다, 원장님. 밖이 많이 소란스럽죠?”

원장의 전화라는 걸 알자 영숙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저 전화기를 빼앗아서라도 원장과 통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 원장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영숙이 막 보안요원들을 뿌리치려고 할 때였다. 비서가 전화를 끊고 영숙에게 말했다.


“한영숙 회원님. 원장님께서 지금 뵙자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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