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 의혹 (41/92)


#41. 의혹
2022.08.22.



 


“송화궁 원장은 선물을 받은 거야, 만 거야!”

영숙은 주혁, 혜미 부부와 함께하는 저녁상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받았으면 받았다고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아무 말이 없으니까 오히려 받은 게 아닐까요? 다시 되돌아오지는 않았잖아요.”

“그런가?”

그럼에도 영숙은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댔다.


“내일 가면 확인해 봐야지, 안 되겠어.”

“그래요, 어머니. 제가 같이 가 드리면 좋을 텐데 내일은 선약을 도저히 뺄 수가 없네요.”

“괜찮다.”

둘이서 도란거리고 있던 그때, 식탁으로 채 회장이 다가왔다.


“지금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거냐.”

“아, 아버님 오셨어요?”

“어서 앉으셔요, 회장님.”

영숙와 혜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표정을 바꾸며 채 회장의 물음을 피했다.

채 회장은 뚝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그는 영숙과 혜미가 이런저런 작당을 하고 사고를 칠 때마다 곤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혁아.”

“네, 회장님.”

주혁은 채 회장 앞에선 늘 꼬리 내린 강아지 같은 태도를 보였다.

친아들도 아닌데 채 회장이 도하를 얻기 위해 영숙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거두어들였으나, 사실 법적으로도 아들은 아니었다.

서류상으로 주혁의 모친은 영숙이었고 부친은 채 회장이 입양을 하지 않아 여전히 그의 친부로 기록되어 있다.


“이번에 또 좋지 않은 이야기가 들리더구나.”

“아……. 그게……. 죄송합니다.”

채 회장이 도하의 동생인 그를 나름 챙기느라 작은 계열사의 한 자리에 앉혀주고 아쉽지 않은 연봉도 주고 신혼집도 장만해주었으나, 씀씀이가 도하보다도 커서 늘 모자라다며 영숙와 도하를 뜯어먹기가 일쑤였다.

회사 일도 중간만 해주면 좋겠는데 종종 철딱서니 없는 행동으로 채 회장과 도하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회사엔 보는 눈들이 많다. 언제까지 경거망동할 거야. 몇 명 되지도 않는 직원들이랑 그리 불화를 일으켜서야 되겠니.”

이번에 몇 되지도 않는 직원들이 여러 명 퇴사했다. 그것도 그나마 쓸 만한 인재들만.


“…….”

“네가 새로 시작한 일의 실적이라도 좋았다면 어느 정도 커버되는 부분이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잖니.”

“정말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아이구, 회장님. 그래도 얘가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회사 생각을 얼마나 하는데요.”

그럴수록 어쩔 줄 모르는 건 영숙이었다. 어쩌다 함께 식사를 함께하게 될 때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흠…….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이랑 얘를 참아줄 거란 착각은 하지 않았으면 해.”

채 회장이 냉정하게 일갈했다. 식사 시간 내내 영숙과 주혁은 꿀 먹은 벙어리로 음식만 씹었다.

***

다음 날, 영숙은 송화궁에 도착하자마자 마음이 급해서 죽 센터에서의 서비스가 시작되기도 전에 원장실 앞을 기웃거렸다.


‘선물도 받았다면서 뭐가 이렇게 싱겁게 지나가지? 그것도 모자란 거야? 워낙 쟁쟁한 사모들을 만나는 여자라 그런 거야, 뭐야.’

원장실 앞에서 비서가 이상하게 쳐다보자 그녀는 헤실거리며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전에 원장님한테 물건 전해줬었는데 기억하세요?”

“아아, 네, 안녕하세요? 그때 원장님께 전달 드렸어요.”

“그래요? 그럼 원장님이 받으신 거 맞죠?”

원장의 손에 건네졌다는 사실에 영숙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물었다.


“네, 아마 확인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별말씀 없으셨나요.”

“저는 전달만 해드려서 그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하, 그래요. 저……. 그럼 혹시 제가 직접 원장님 좀 뵐 수 있을까요?”

영숙이 사람 좋은 척 미소를 지으며 묻자 비서의 표정에 곤란함이 물들었다.


“원장님께서 워낙 바쁘셔서 미리 시간 약속을 하신 분들하고만 만나 뵙고 계십니다.”

“아, 그래요. 그건 아는데…….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실망을 감추지 못한 영숙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저… 근데 매화 회원 되기가 원래 이렇게 하늘의 별 따기인가요?”

“저는 서비스 등급 시스템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알지 못해요. 제 업무가 아니라서요.”

“그래도, 가까이서 원장님을 모시다 보면 얻어듣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혹시 빨리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이나 팁 같은 거라도 알고 있으면 나한테 귀띔 좀 해주면 안 될까? 딱히 기준도 없고 돈 많다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음……. 팁은 특별히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 매화 회원님들 과반수 이상의 찬성이 있으면 바로 입성 되시는 것 같아요. 실제로 그렇게 들어가신 분들도 계시고요.”

“에엥? 과, 과반수?”

한숨부터 나왔다. 그 말을 듣자 새삼 더 매화 센터의 장벽만 더 높게 느껴질 뿐이었다.

영숙은 일명 쟁쟁하다는 인맥을 많지 쌓지는 못했다. 채 회장 가문에 들어온 이후 나름 열심히 쌓아왔지만 그녀를 우습게 보는 이들이 많아서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수로 매화 회원 과반수의 마음을 살까.

결국 영숙은 별 소득 없이 돌아서야 했다.

죽센터로 터덜터덜 향하던 영숙은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눔의 매 센터……. 이러다 영영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그런데 저 멀리서 강옥희 여사의 모습이 보였다. 괜히 죄인처럼 간이 쪼그라들어서 영숙은 전각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역시나 강 여사는 매 센터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럽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영숙은 자괴감에 젖어야만 했다.

지난번엔 금방 쫓겨나서 제대로 구경도 못 했는데 다시 한번 들어가 보기라도 하고 싶었다. 못 가진 거에 대한 갈증이 사람을 구질구질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만……. 들어가는 것까지는 해볼 만하지 않을까?

잠깐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영숙은 결심한 듯 발걸음을 돌렸다.

.
.
.



“좀 전에 들어가신 강옥희 여사님이 부르셔서 왔습니다.”

“아, 매화 회원님의 초대십니까?”

강옥희의 이름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출입 권한이 없는 듯이 보이던 영숙이 입구에 다가가자 직원이 경계 어린 표정을 보였는데, 강옥희 석 자를 듣는 순간 표정이 풀어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럼 잠시 이쪽 라운지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강옥희 회원님께 확인하고 다시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역시 지난번과 같았다. 강옥희 초대로 왔다고 하면 보내줄 거라더니 이번에도 통과했다.

하지만 확인을 한다고 했으니 확인이 되면 나가라고 하겠지.


“휴우…….”

언제 쫓겨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한번 둘러볼까?

우선 라운지에 들어가 앉는 시늉을 하던 영숙은 유리벽을 통해 보이는 직원이 어딘가에 전화를 넣는 모습을 보았다.

영숙은 직원이 그녀를 보지 않고 있는 틈을 타 라운지의 입구 쪽 문이 아닌 내부 복도로 통하는 문으로 빠르게 나갔다.

처음 가까이서 보게 된 매 회원들의 공간은 죽 센터보다 훨씬 더 넓었는데도 불구하고 훨씬 더 조용하고 한적했다. 확실히 VVIP 회원 수가 더 적다는 게 느껴졌다.

영숙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역시나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죽 센터에는 없는 종류의 방들도 많았다. 신기하게 이곳저곳 바라보던 영숙은 그러다 어느 한 장소에 눈길이 사로잡혔다.

한쪽 벽면이 다 선반이었는데 여러 사이즈의 유리병에 담긴 화장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와……. 이게 다 뭐야?”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반짝이는 작은 금장 판에 회원들의 이름이 각인으로 적혀 있었다. 회원 개개인의 제품인 듯 보였다.


“이런 식으로 관리받는구나. 좋긴 하겠네.”

영숙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에 사람이 몇 보였지만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고 제 가까이엔 아무도 없었다.

끝내 영숙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남의 제품에 손을 댔다. 들고 있던 가방 안에 화장품 몇 개를 빠르게 넣었다.

한 회원 걸 다 털기는 좀 그래서 여러 회원 거에서 하나씩 골라 담았다. 그러곤 누가 볼 새라 얼른 출구로 향했다.

***

무슨 정신으로 회의를 마쳤는지 모르겠다.

꽤 중요한 안건이었는데도 그냥 유한 반응으로 일관하며 지나갔다. 그래야 빨리 회의가 끝날 테니까.

회의는 6시쯤 끝이 났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 둥 하고 집무실로 돌아와 차 키를 챙겨 나왔다.

그리고 성마른 걸음으로 주차장에 다다라 차에 오른 뒤엔 곧장 현서의 옛집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현서의 아이가 있는 그 집으로.

현서가 엄마인 건 확실한데 아빠는 아직 누군지 모르는 아이.

그 아이를 떠올리며 속절없이 가슴이 뛰었다.

이현서. 너 설마.

자꾸만 피가 뜨겁게 끓어오를 것 같았다. 만약 이 직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현서야, 난 너에게 너무 미안해서 어떡하지?

너 혼자서 내 아이를 낳고 너 혼자서 키워왔다고 생각하면, 난 나를 죽이고 싶어질 것 같아.

도하는 괴로운 얼굴로 인상을 구겼다.

그럼에도 표현할 수 없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이 직감이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너무도 기쁠 텐데. 미안함과 미어지는 마음을 앞서는 게 기쁨이었다.

그 아이가 내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그런데 만약 그 아이가 남편의 아이라면 아내가 이혼에 재고의 여지를 두었을 법도 한데 현서는 그러지 않고 끝까지 이혼을 감행했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음에도 현서가 그를 떠난 거라면, 그녀의 마음은 그만큼 더 멀리 떠났었던 거라고 이해해야 했다.

그만큼 싫어졌던 거였니, 내가…….

만약 그런 거면 나는 네 마음을 어떻게 다시 되돌려야 할까.

너를 어떻게 다시 데리고 와야 할까.

우선 아이에 대해 진실을 알아야겠다. 지금 당장 물어봐야겠다.

밖이 어둑해질 즈음 집 앞에 도착하자 불 켜진 집이 보였다. 분명 지금 집 안에 그 아이가 있을 것이다.

도하는 망설임 없이 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현서는 받지 않았다.

받을 때까지 걸 생각으로 한 번 더 걸었다.


-무슨 일이에요.

두 번째 시도에 현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물어볼 게 있어. 잠깐 시간 좀 내줘.”

-업무 관련된 거예요? 오늘은 곤란해요. 벌써 퇴근해서 집에 왔어요.

“집 앞이야.”

-네?

“잠깐이면 돼.”

-급한 일이에요?

“그래. 정말 급한 일이야.”

-오늘 회의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요?

송화궁 제품 관련 회의가 있던 날이었던 만큼 추측할 만한 일이 그런 것이었나보다. 현서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해졌지만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밖에 시간 못 내요.

“알았어.”

잠시 후 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따라 저 모습이 눈이 시렸다.

현서가 다가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에 탔다. 그녀는 도하를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앞유리를 응시하며 말했다.


“가족들이랑 시간 보내는 중이었어요. 짧게 끝내요.”

그러자 도하는 그런 현서의 옆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입을 열었다.


“네 아이……. 참 귀엽더라.”

현서의 표정이 일순 굳어지는 게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