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현서의 아이
(40/92)
40. 현서의 아이
(40/92)
#40. 현서의 아이
2022.08.18.
지난번에 김 실장이 선물을 도로 돌려주었으니 김 실장에게 전해주기는 민망했다. 단호했던 태도를 보면 다시는 받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영숙은 원장실 앞을 기웃거렸다.
주위가 조용한 가운데 원장실 바로 앞까지 다가가 보니 데스크에 직원이 있었다.
“저…….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저, 이거……. 원장님 앞으로 전달된 물건인데 여기에 두고 갈게요.”
“예? 저기―”
의아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듣던 비서가 무슨 말을 할 새라 영숙은 상자를 두고 후다닥 뒤돌아서 나왔다.
“원장이 볼까요?”
영숙을 따라 나온 혜미가 뒤를 흘끗 보며 물었다.
“일단 원장한테 전달이야 되겠지.”
“이렇게까지 애써야 해요?”
“그러게 말이다.”
“어머니가 누구한테 이렇게 공들이시는 거 처음 봐요.”
“내 기어이 그 비싼 면상 한 번만 좀 봐야겠다.”
“혹시 어머니 선물만 안 받는 건 아니겠죠?”
“그런가? 근데 그럴 리가 있겠니.”
고개를 갸우뚱하던 영숙은 한숨을 내쉬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후 차에 오르자 영숙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혜미에게 말했다.
“이, 혜미야. 너 먼저 집에 내려주고 난 다른 일 좀 봐야겠다.”
“어디 가시게요?”
오지랖 넓은 혜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자 영숙은 또 한 번의 한숨을 쉬었다.
“도하한테 좀 가봐야겠어. 주말이니 집에 있겠지.”
“아주버님한테는 왜요?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있으면 같이 갈까요?”
혜미는 도하를 볼 기회라면 늘 군침을 흘렸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연스레 엉겨 붙었다.
“너도 같이 갈래? 바쁘지 않아?”
“바쁘긴요. 가족 일인데 가능하면 함께해야죠. 아주버님 지금 짝도 없으신데 혼자 살기까지 하시니까 저도 걱정이 많이 돼요.”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가는 거야. 이번에야말로 내가 가서 드러누워서라도 맞선 자리에 내보내든지 해야지.”
“예? 그 문제…… 때문이었어요?”
“그래, 도하 얘는 대체 몇 년을 혼자 저러고 있는 거야. 그간 좋은 자리도 많이 들어왔는데 다 차버리고.”
“요새 뭐 혼자인 게 흠인가요. 하하……. 혼자서도 잘 사시면 되죠.”
혜미가 떨떠름하게 훈수를 두었지만 영숙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야. 늦기 전에 어서 새로 장가보내야지. 저렇게 혼자 둬서 쓰겠니. 마침 너도 시간 난다니까 잘 됐다, 얘. 네가 같이 가서 설득 좀 해줘.”
“아아……. 네, 어머니.”
.
.
.
오랜만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지 않으려다 요즘 자주 피했던 터라 오늘은 받았다.
“네.”
-도하야, 너 지금 어디니?
“집이에요.”
-집이면 문 좀 열어라.
“예?”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
전화가 끊어졌고 대신 초인종이 울렸다. 도하는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요새 좀 피했더니 이제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셨다.
그는 하는 수없이 영숙과 혜미의 얼굴이 떠 있는 화면을 터치하여 공동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얼마 뒤 집 안까지 들이닥친 영숙과 혜미를 보니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이세요?”
영숙은 벼르고 온 듯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너 박 부사장 딸 아니?”
도하는 한숨부터 나왔다.
이럴 줄 알았지.
“뭐 마실 것 좀 드려요?”
회피하듯 돌아서며 도하가 물었다. 주말엔 가사를 돕는 아주머니도 없으니 그 핑계로 직접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 아주버님! 제가 도울게요!”
혜미가 쪼르르 따라 들어오더니 도하를 향해 활짝 웃었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도하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할게요! 어머님은 달달한 종류 좋아하세요. 어디 보자……. 뭐가 있나?”
곧 다과들이 담긴 쟁반을 하나씩 들고 혜미와 도하가 거실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며 영숙이 입꼬리를 올렸다.
“혜미 네가 웬일이니. 주방엔 생전 안 들어가는 애가…….”
“아아, 어머님 드실 건 제가 잘 아니까요!”
혜미는 괜히 뜨끔해서 얼버무렸고 영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휴, 그래. 네가 아들보다 낫다. 집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결혼할 생각도 안 하는 얘보다!”
“결혼이 뭘 그렇게 중요해요, 어머니.”
“얘가 어디가 모자라서 혼자 이러고 있는 건지.”
“에이, 모자란 사람들이라고 혼자 사나요? 요즘엔 그런 것도 아닌데요.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도 많고요.”
“글쎄, 난 혼자 사는 게 좋아 보이진 않더라.”
“아주버님처럼 잘난 사람이 혼자 살면 그것도 매력적으로 보일 거예요.”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갑자기 영숙이 눈을 치뜨고 혜미를 보았다.
“넌 도와주러 왔다며.”
“네? 아, 아니 전…… 뭐든 아주버님께 좋은 게 제일 중요하니까…….”
“흠, 아무튼 도하야. 박 부사장 딸 본 적 있어?”
도하는 성가신 내색을 숨기지도 않으며 대꾸했다.
“얘기는 들었지만,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기억도 안 나요.”
본사 부사장의 딸은 계열사에서 일한다고 듣긴 했는데 그 회사는 본사 건물에 있는 것도 아니라 솔직히 누군지도 모르겠다.
“그, 그래? 잘 모르는구나. 그 집 딸은 너를 봤는지, 너한테 관심이 있다고 하는데.”
영숙의 말에 혜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약간은 서운한 표정이었지만 영숙이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 한 번 다녀온 거 요샌 흉거리도 아니고, 도하 얘 만한 남자가 어디 흔하니. 박 부사장 딸내미가 보는 눈은 높아가지고, 남자 볼 줄 아는 거지.”
그러나 도하는 딱딱한 어조로 거절을 놓았다.
“어머니, 저는 생각 없으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 하세요.”
안 그래도 현서 일로 좌절감에 빠져 있는데 맞선 종용이라니. 타이밍도 참 혹독하다.
“아니, 얘.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만나보면 어떠니. 누군지 잘 모른다면 한 번 보기라도 하면 되잖아.”
“후…….”
도하는 혼담에 관해서는 아예 더 말을 꺼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처럼 돌아서려 했다.
“얘, 너 혹시 현서 때문에 그러니?”
그런데 돌연 영숙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에 도하는 걸음을 떼던 두 다리를 멈칫했다.
서늘한 얼굴로 돌아서는 도하를 보며 영숙이 쏘아댔다.
“너 아직도 걔 기다리는 거 아니지? 어디 있는지 생사도 모르는 걸 언제까지 유령처럼 붙잡고 살 생각이니?”
도하는 가만히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직 현서의 소식을 모르는 모양이다.
“더구나 고것이 그렇게 내 속을 뒤집어 놓고 나갔는데!”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지금 알아봐야 괜히 일만 그르칠 수도 있으니.
“안부 한 번 전하지 않는 걸 봐라. 네 생각은 하지도 않고 어디서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고 있을 텐데 너 혼자만 못난 놈처럼 이러지 마라.”
도하는 친모의 말이 가시처럼 가슴을 찔러 아팠다. 이현서는 정말 제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잘 먹고 잘살고, 잘 연애하고 잘 결혼해서 아기까지 낳았다.
도하는 혼자서 비탄을 삼키며 괴로운 얼굴로 돌아섰다.
“제가 어젯밤에 잠을 못 잤더니 좀 피곤해서 쉬어야겠어요.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얘! 도하야!”
영숙이 아들을 붙잡을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혜미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말리고 들었다.
“놔, 놔두셔요, 어머니. 피곤하시다는데.”
영숙은 얼굴에 짜증을 한가득 담고선 도하의 멀어져가는 뒷모습만 보았다.
“어쩌겠어요. 남녀 문제가 억지로 될 일도 아닌데.”
“아니, 근데 아까부터 가만 듣고 있자니, 너는 오늘 도와주러 온 거니, 방해하러 온 거니?”
“아이쿠, 어머니. 당연히 도와드리러 온 거죠!”
넉살 좋게 웃는 혜미를 보고도 영숙은 탄식만 했다.
“하여간, 저놈은 어미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요. 평생 내 말을 들은 적이 없어!”
***
드디어 송화궁 라인 제품의 샘플이 나왔다.
오늘 미팅에서 그 샘플을 공개하며 더불어 광고의 방향과 광고 모델에 관한 안건이 다루어지고 있었다.
SH 코스메틱 사무실에서 진행 중이던 회의에는 채도하 전무와 루카스 유 대표도 참석 중이었다.
첫인사부터 둘 다 웃지도 않고 악수도 안 하더니 회의 시간 내내 극도로 사무적인 태도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그 아래 직원들은 두 상사가 다 저기압으로 보였으니 회의의 내용에 문제가 있나 염려를 할 정도였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다 중간에 루카스 유 대표가 전화기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둘러 회의실 밖으로 나가며 전화를 받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하는 루카스가 나가고 문이 닫히기까지 그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보통 급한 전화가 아니면 회의 시간에 받지 않을 텐데, 혹시 저 전화가 현서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회의에는 현서가 오지 않았다.
내가 불편하게 해서인가?
공개될 샘플이 궁금해서 빨리 보고 싶었을 텐데, 보았다면 이 자리에서 할 말이 많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루카스가 없이 잠시 회의가 주춤한 사이 도하가 끝내 참지 못하고 현서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현서 원장님은 오늘 못 오셨네요.”
“아, 예. 원래 오늘 함께 오시려고 했다가 다른 일정이 생기셔서 불참하셨습니다.”
속 모르는 송화궁 측 팀장이 산뜻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셨군요.”
도하는 역시 현서가 저 때문에 이곳 미팅 일정을 취소했다는 생각에 확신을 했다.
“뭐, 남편분께서 잘 전달해 주시겠죠.”
그는 갑갑함에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며 태연을 가장한 얼굴로 말했다.
“남편……분이요?”
그런데 송화궁 팀장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유 대표님이 전해주시지 않겠나요.”
도하는 하기 싫은 말을 입에 담으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유 대표님이요? 설마 우리 유 대표님이요?”
“그럼 다른 유 대표님이 또 있어요?”
가뜩이나 싫은 유 대표 이야기를 자꾸 못 알아먹고 묻는 팀장이 성가셔서 도하는 조금 까칠하게 되물었다.
“유 대표님께서 물론 전해주시기야 하겠지만 좀 전에 남편분이라는 말씀, 하시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도하는 뭔가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 대표님이 이현서 원장님 남편인 걸 혹시 아직도 모르고 물으시는 겁니까?”
“예에? 우리 유 대표님이요? 두 분은 부부가 아니신데요. 전무님께서 오해를 하셨나 봅니다.”
크게 놀라는 팀장을 보며 도하는 순간 몸이 굳었다.
“두 분이 워낙 친하시긴 한데 그런 사이는 아니세요. 아니면 유 대표님, 우리 모르게 비밀 결혼하셨나? 하하하.”
팀장이 너스레를 떨자 옆에 있던 송화궁 마케팅 담당자도 끼어들었다.
“그러실 리가. 두 분이 왜 비밀로 결혼을 해. 하시려면 당당하게 하지. 두 분 친한 것도 다 아는데.”
“그러게요. 더구나 채도하 전무님도 아시는 결혼을 우리가 모를 리는 없는데, 하하.”
막상 오해를 한 장본인인 도하는 그 대화를 멍하게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둘이 부부가 아니야?
그럼 둘이 날 가지고 논 거야?
이현서, 이렇게 오해까지 이용해서 날 떼어놓으려고?
“그런 거였습니까? 유 대표님에게 아들이 있어서 제가 오해를 했나 보네요.”
“아들이요? 유 대표님 아들 없는데.”
뭐야? 아이도 없어?
도하는 혼란스러워서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송화궁에서 유 대표님이 자기 아이라고 말하던 아이를 봤는데, 그 아이가 그럼 유 대표님 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아아, 송화궁에서 보셨으면 이현서 원장님 아들일 거예요. 저도 전에 한 번은 본 적 있는데 유 대표님이 워낙 예뻐하시는 거 같긴 했어요. 전에 듣기로 유 대표님이 그 아이 대부를 자처하셨던 같아요.”
“우리 대표님 쭉 미혼이셨는데 이런 오해까지 오고. 원장님이랑 진짜 결혼하실 거 아니면 적당히 친하게 지내셔야겠네, 하하.”
“그러게. 애 아빠 오해까지. 유 대표님 혼삿길 막히면 안 되는데.”
어느새 도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송화궁 사람들이 웃으며 떠드는 소리에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가 순식간에 전보다 더욱 복잡하게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루카스의 아이를 현서가 낳은 건지 아닌지를 고민했던 게 애초에 틀린 접근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현서의 아이라니. 루카스의 아이는 아닌, 현서의 아이.
“…….”
루카스가 아닌 현서에게서 태어난 아이로 접근을 시작하는 동시에 그 아이가 그럼 누구의 아들일지, 그 의문이 자동적으로 떠오르자 심장이 싸하게 당겨왔다.
아아……. 혹시…….
그러기엔 아이가 작아서 어려 보이긴 했어도 그래도 나이는 아직 정확히 모르는 거니까.
이현서. 너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