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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네 현남편이야? (39/92)


#39. 네 현남편이야?
2022.08.15.


송화궁과 거래를 트면서 송화궁 출입증도 있겠다, 원장실까지 찾아가는 건 그나마 어렵지 않았다.

단숨에 원장실 앞까지 도착했다. 원장실 밖 데스크에는 안내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는데, 도하는 기다릴 새도 없이 성마른 손으로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예.”

현서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라는 현서를 보며 문을 탁 닫았다.


“…….”

비서도 없이 홀로 들어온 그를 보며 적잖이 놀랐는지 현서는 말문이 잠시 막혀 있었다.

그러다 이내 이 어이없는 상황에 엄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예고도 없이 이게 무슨―”

“―유 대표가 네 현남편이야?”

앞뒤 없이 튀어나온 첫 마디였다. 그만큼 도하에겐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질문이었다.

현서는 기가 차서 입이 벌어졌다.

뭐야, 이 사람. 갑자기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어제 유 대표랑 처가에서 나오던 너를 봤어. 유 대표의 아들도 함께.”

현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과 함께 있던 유 대표의 아들이라니.

그건 도현이 분명한데! 그러니까 채도하가 자신의 아들을 보고 만 것이다. 어째서 도현을 루카스의 아들로 착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 찾아왔던 거예요?”

혼자서 무슨 상상을 하다 왔나 했더니 그걸 본 거였나. 그제야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박차고 들어온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아서 현서는 낮게 탄식했다.

호흡이 가쁜 걸 보니 급하게도 들이닥친 모양이다. 그 냉철한 채도하가.

그렇다고 이렇게 찾아오다니.


“……대답해줘. 정말이야?”

차분하고 싶은 머릿속과 달리 가슴은 쿵쿵 뛰어대고 있었다. 답을 재촉하는 전남편의 얼굴엔 수심이 더욱 가득했다.

억측이 지나치다고 대답하려다 현서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옛 동네에 찾아오기까지 하는 남자라면.

어쩌면 그냥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서로에게 차라리 더 나은 일일지도 몰랐다.

일말의 여지도 두지 않도록. 그래서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도록.

그리고 도현을 그냥 루카스의 아이로 오해하도록.


“……언제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거야?”

그게 그렇게 충격이 심한 일이었는지, 채도하는 생각보다 더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현이 워낙 또래보다 작아서 그 나이대로 가늠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 자신의 아이일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못하는 걸 보니.

현서는 그냥 흐르듯이 대답을 맡겼다.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

“…….”

“채 전무님과 저는 진작 상관없는 사이가 되었는데요.”

채도하의 눈가가 조금 붉어지고 있었다. 현서는 그의 얼굴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도하는 붉어진 눈으로 현서를 매섭게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하…….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서하만 했던 아이. 두 돌 남짓 되었으려나.

이혼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다른 놈이랑 결혼해야만 그만한 아이가 있는 것도 가능했다.


“지금 그거 따지려고 아침부터 찾아온 거예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몸을 조금 떠는 남자 앞에서 현서가 쏘아붙였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면 곤란해요, 전무님.”

어찌 되었든 다시 부부로 엮일 일도 없는 남자에게 모질게 대하는 게 그를 돕는 길일 것이다.


“이러지 마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말도 없이 일터에 찾아오지 마시고, 우리 동네도 찾아오지 마세요.”

“…….”

그는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길을 잃은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솔직히 이 남자에게서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런 표정이기도 했다. 현서는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물론 그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이혼한 지도 이제 3년하고도 반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사이에 만약 도하가 재혼을 했다면 저라도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상관없는 사이라고 쏘아붙이면서도 그의 서운한 마음에 공감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한영숙이 그간 아들에게 재혼을 참 많이도 종용했을 거라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많은 거절을 하고 버텨왔을지도 상상할 수 있었다.

현서는 거기에 안도감을 느끼는 역설을 범하고 있기도 했다.

모순이잖아. 이현서.

그의 상처받은 얼굴에 마음이 시큰하면서도 묘한 만족감이 일었다.

무슨 이유에서건, 다른 여자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길 마다하고 몇 년간 이현서만을 오매불망 기다린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어버리기엔 그전까지 봐왔던 모습과의 괴리가 주춤하게 했다.

어쩌면 그는 그저 자신의 인생을 흠 없던 시절로 되돌리고 싶은 욕구가 강한 건지도 모르겠다. 워낙 완벽주의자였으니.

사랑보다는 차라리 그게 더 그에게 어울리는 명분 같았다.


“그래서…… 넌 지금 행복해?”

문득 도하가 떨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현서는 그 질문에 가슴 한편이 욱신대는 통증을 느꼈다.


“왜 자꾸 화를 내세요.”

냉랭하게 대꾸를 던진 현서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게 화가 나요? 난 행복하면 안 돼요?”

그 말에 얼이 빠진 듯 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서는 이 상황을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갔다.


“이만 나가주세요. 저 바빠요. 쓸데없는 이야기할 시간 없다고요.”

현서는 그렇게 말하며 친히 원장실 문까지 열어주었다.

도하는 할 말이 여전히 그득히 많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문밖으로는 당황한 비서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 중에 문이 열린 채 비서가 듣도록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으니 도하는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확인 사살을 당한 후 너덜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는 원장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
.
.

도하는 비척거리며 주차장까지 나왔다. 어제부터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정신적으로 큰 충격에 휩싸여 있자니 몸에 힘이 빠지는 듯했다.

그런데도 정신만은 너무 맑아서 더 미칠 것 같았다.

운전석에 오른 도하는 송화궁을 쉬이 떠나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동을 걸고도 멍한 얼굴로 운전대만 잡고 있던 그는 결국 운전대를 놓고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상대는 늘 그렇듯 경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예, 채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유 대표님……. 바쁘신가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 뭐든지 말씀하세요.

암울한 얼굴로 전화기를 들고 있던 도하는 경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유 대표님……. 이현서 원장님이랑 무슨 사이예요?”

-…….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 서론도 없는 직선적인 질문에 현서가 그랬듯 루카스 유 역시 벙찐 듯했다.


-예?

다짜고짜 이러는 게 정말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제 그런 체면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세상이 무너졌는데. 심지어 거래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현서가 채도하의 전처인 것까지 유 대표가 아는지는 모르겠다. 둘이 부부라면 그런 과거까지 알 만도 한데 느낌에 모르는 듯도 하였다.

알든 모르든 이제는 피차 서로 경계할 만한 사이임은 틀림없었다.


“이현서가 유 대표님에게 뭐냐고 묻는 겁니다.”

다시 한번 돌직구를 던지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듯한 루카스 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도하는 애꿎은 허공만 쏘아보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음……. 전무님.

마침내 루카스 유가 진지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현서는 내 여자입니다.

“…….”

도하는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현서를 다른 남자가 ‘내 여자’라고 부르는 걸 듣는 순간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채 전무님께서는 그게 왜 궁금하실까요?

도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루카스 유도 더이상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도하는 빈정거리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루카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채 전무님이 현서한테 사심이 있다는 건 진즉 눈치채고 있었습니다만.

도하의 미간이 움찔 떨렸다. 루카스가 계속 덧붙였다.


-내 여잡니다. 내 아이의 엄마고요.

도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러니까, 채 전무님. 내 여자한테 수작질은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도하는 루카스의 마지막 말에 대한 대꾸도 없이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전화가 끊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충동적으로 전화기를 던져버렸다. 날아간 전화기는 차 앞 유리에 부딪혔다 떨어졌다.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도하는 끝내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화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난관이었으니까.

***

현서는 직접 닫은 문가에 기대선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도하가 나간 지 꽤 한참이 지났는데도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왜 이렇게 저 사람 앞에서 유치해지고 마는 건지.

루카스와 부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어차피 오래가지 않아 알게 될 진실이다.

그냥 잠시라도 그를 괴롭히고 싶은 걸까.

그 사람의 반응이 보고 싶어서?

그 사람과 다시 시작할 일은 절대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에 흠집을 내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현서는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그가 정말 그녀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그녀 때문에 애태우게 될 사람인지가.

그것은 어릴 적부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 그가 망가지는 모습이었다.

유치하게도 거기에 흡족함을 느꼈지만 우습게도 그의 상처가 부메랑처럼 그녀에게 되돌아오는 것 같기도 했다.

3년이 훌쩍 지났지만 채도하는 제게 얼마만큼 흐려진 것일까.

너무 오랫동안 한 사람을 바라왔었다.

그 탓이야.

***

영숙과 혜미가 송화궁에 가는 날이었다.

김 기사가 운전하는 영숙의 차에 탄 혜미가 영숙의 손에 들린 고운 상자를 보며 물었다.


“어머니, 이건 뭐예요?”

“업그레이드된 선물이야.”

“송화궁 원장한테 줄 거요?”

“그래. 더 좋은 걸 줘봐야지.”

실은 첫 선물을 퇴짜맞은 이후로 또 다른 선물을 준비하여 송화궁 원장실 앞으로 택배를 보냈는데 다시 고스란히 택배로 되돌아왔다.

영숙은 상자를 슬쩍 열어 혜미에게 보여주었다.


“어머, 어머니. 이건 언제 구하셨어요?”

“주말에.”

“그렇게 빨리요?”

“매장에 재고가 없어서 누구한테 부탁을 좀 했지.”

“너무 예뻐요.”

“본적은 없지만 느낌에 루나 리 원장에겐 버킨보단 켈리가 어울릴 것 같아.”

“이렇게까지 잘 보이셔야 할까요.”

혜미는 내심 부러워하는 눈길로 가방을 보았다. 영숙이 마련한 건 에르메스 악어가죽 켈리백이었다.


“저한테 주신 거보다 이게 더 예뻐 보여요.”

괜히 질투심이 들어 그러는 건지,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몰라도 제 것보다 더 예뻐 보였다.


“얘는……. 이게 나만 좋자고 하는 일은 아니잖니. 내가 올라가면 나 혼자 올라갈까.”

“어머니는 정말 최고예요.”

가방은 남 주기에 좀 아까웠지만 매 센터 승급을 생각하면 기분이 들떴다. 서비스가 얼마나 럭셔리할 지 궁금해 죽겠다.

죽 센터에서의 일정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주위를 살피며 원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어머니,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 넌 가만히 보고 있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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