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다른 남자의 아내
(38/92)
38. 다른 남자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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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다른 남자의 아내
2022.08.11.
예전의 이현서는 그가 보여주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도 감동을 느끼고 기뻐하던 사람이었더랬다.
“그만큼 너한테는, 나와의 결혼생활이 별로였던 모양이야. 그만둔 데에 아무런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치가 떨렸던 모양이야.”
현서는 의미 없는 손짓으로 물잔만 어루만지고 있었다. 꼭 감정적으로 체할 것만 같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채 전무님. 이제 그만 하세요.”
이 남자가 하는 말이 다 무엇인지 듣고도 모르겠다. 다 감당할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거 잘 알고 계신 거 같으니, 더 말씀하지 마세요.”
“…….”
그녀의 말에 도하는 말을 멈추었다.
현서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애잔한 눈빛이 싫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자리 끝까지 못 지켜드려서 죄송해요.”
그녀는 끝내 사무적인 어투로 그 자리를 마무리 짓고는 가방을 들었다.
나가는 동안에도 도하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쳐다보지는 않았다.
***
지난 며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채도하와의 만남 이후 자꾸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해지기가 일쑤였다.
그날의 대화가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꼭 꿈을 꾼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현서는 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지우려 애써야 했다.
그렇게 멍한 상태로 맞이한 토요일. 오늘은 오프였던 토요일이었는데 마침 깜짝 손님이 찾아왔다.
“어? 루카스! 어쩐 일이야?”
“도현이랑 놀고 싶어서 연락했었는데 연락이 안 되더라고. 아직 아침이니까 집에 있을 것 같아서 들러봤어.”
“그래? 전화했었어? 아, 나 무음이었나. 우선 들어와.”
“이거 도현이 좋아하는 빵이야.”
“뭘 이런 걸 사 왔어. 고마워!”
현서는 뒤늦게 전화기를 찾아 집 안을 서성였고 루카스는 빙긋 웃는 얼굴로 도현의 방에 들어갔다.
“우리 귀염둥이 도현아, 아빠랑 놀러 가자!”
“우아, 어디?”
“날씨 좋으니까 놀이 공원 갈까?”
“응! 도혀이 갈래!”
“루카스! 또또, 아빠란다!”
***
도하는 아침부터 차를 몰고 나왔다.
며칠 전 현서와의 대화가 순탄하지 못한 이후로 며칠 내내 마음을 둘 데가 없이 맴도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약속도 없었다. 그래서 더 머리가 복잡했다.
차에 오른 도하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차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습관처럼 옛 동네로 차를 몰았다.
풀리지 않는 고민에 부딪힐 때면 가끔 가곤 했던 그곳에 오늘도 또 가고 있었다.
가지 않겠다던 다짐은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옛 동네에 간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도. 이제 현서가 거기에 사는 것도 아닌데도.
지금 현서는 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 걸까.
현서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도하는 막연히 옛 처가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
“도혀이, 노이공언 갈래!”
“도현이도 가고 싶어?”
현서는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날씨가 좋긴 했다.
“현서 피곤하면 내가 혼자 데리고 나갔다 올게.”
“잠깐도 아니고 몇 시간 동안 루카스 혼자서 얘를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아? 애도 안 키워봤으면서.”
“도현이는 엄마랑 잘 떨어져 있으니까 괜찮아. 내가 끝내주게 재밌게 놀아줄 수 있어.”
“고맙지만 내가 같이 가야지. 기다려! 나도 준비할 테니까.”
그녀의 말에 루카스와 도현이 둘 다 동시에 환호를 터뜨렸다.
“우와, 도현아! 오늘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놀러 갈 수 있다! 신난다!”
“와아! 에헤헷.”
도현은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모르고 천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빨리 가자, 엄마!”
“그전에 우리 도현이 밥부터 먹어야지이?”
현서는 서둘러 주방으로 가서 도현이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손이 빠른 현서는 뚝딱뚝딱 식탁을 채웠다.
“루카스, 같이 먹을래?”
“난 먹고 왔어. 이따 점심이나 같이 먹어.”
“그래.”
“와, 근데 아침부터 도현이 밥은 진수성찬이네. 현서가 음식을 잘하긴 하지만.”
식탁 위를 내려다보는 루카스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러자 현서가 멋쩍게 웃었다.
“요즘엔 시터 아주머님이랑 같이 해서 나도 슬슬 만들어.”
“그게 이 정도야? 도현이는 좋겠네.”
이혼 전에는 시댁 식구들 먹일 음식도 매일 그렇게 정성껏 해댔는데, 금쪽같은 자식 먹이는 일에야 소홀할 리가 없는 현서였다.
아무리 바빠도 영양 균형이 잡힌 식단을 도현에게 먹이기 위해서 그녀는 부단히 노력해왔다.
“골고루 잘 먹여야 해, 도현이는.”
더구나 아이가 같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작은 편이라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작게 태어나더니 여전히 그랬다.
“금방 자랄 거야, 걱정하지 마.”
“알아……. 그래도 엄마는 늘 미안할 뿐이야.”
현서는 도현을 임신했을 때 워낙 자신이 힘들었어서 아이가 많이 자라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늘 했다.
“현서도 작은 키가 아니니 잘 클 거야. 도현이 친아빠가 작지만 않다면…….”
“…….”
불쑥 언급된 인물에 현서는 급작스레 가슴 한편이 불편했다.
할 말을 잃은 채 반찬을 놓고 있으니 루카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왜? 혹시 도현이 친아빠는 키 작아?”
“아……. 아니. 키 커. 많이…….”
“그렇구나. 어디 보자, 그럼 우리 도현이도 크겠네? 친아빠가 얼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빠만큼은 커야겠지?”
“아빠 소리 좀 그만하라니까!”
현서가 버럭 외치자 능청스레 웃음을 던진 루카스는 안고 있던 도현을 유아용 의자에 앉혔다.
“우리 도현이, 밥 먹자!”
***
어느새 차는 옛 처가 앞에 서 있었다.
차창을 조금 열자 맑은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몇 달 전에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담장 밖으로 퍼져 나왔었는데 아직 그 가족이 살고 있겠지?
덧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집 대문이 열렸다.
차 안에 앉아 있던 도하는 괜히 긴장을 했다.
어른 남자의 뒤통수가 먼저 보였고 그에게 안겨 있는 아이의 팔다리가 보였다. 막 나왔을 때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어린아이였구나.
서하가 딱 저맘때쯤 세상을 떠났다.
딸아이를 생각하며 고통에 가까운 그리움이 북받쳐 오르려던 찰나였다. 어른 남자가 아이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돌연 도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옆모습은……. 루카스 유?
아는 얼굴임을 깨닫는 동시에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역시나 지난번 송화궁에서 보았던 루카스 유 대표의 아들이었다.
순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불길함이 파도처럼 온몸을 덮쳐왔다.
그럼 그때 담장 너머 들리던 소리가 저 둘의 것이었어? 루카스 유가 저 집에서 살고 있는 거야?
설마.
눈앞이 새하얘진 채, 유 대표가 저 집에 살고 있지 않은 경우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영락없이 주말 아침에 집을 나서는 아빠와 아들의 모습이었다. 지난번에 마당에서 놀던 소리 역시 둘의 것이 틀림없는 것 같고.
그렇다면 루카스 유 같은 부유한 남자가 저 집에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저 집이 현서에게 어떤 집인가. 돌아가신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집이다.
더구나 이 동네에는 현서의 얼굴을 아는 이웃들이 여전히 꽤 많이 살고 있는데, 현서가 특별한 의미도 없는 남자와 아이를 한집에 살게 할 리가 있겠는가. 괜한 소문을 만들 리는 없었다.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댔다.
그래도 혹시, 현서 없이 부자 둘만 살고 있을 가능성도 없진 않은 건지, 돌아버릴 것 같은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그리웠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나타나 주지 말았으면 했던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에 이어 대문 밖으로 나온 건 밝은 얼굴의 현서였다.
“엄마!”
루카스에게 안겨있던 아이가 현서를 향해 외치며 두 팔을 뻗었다. 현서는 더욱 환한 얼굴로 다가가 아이를 건네받고는 품에 꼭 안았다.
엄마라고 불렀다. 분명히.
루카스가 차 뒷문을 열어주었고 현서는 아이를 카시트에 앉혔다. 루카스는 이어 현서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현서는 미소와 함께 다가가며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거래처 관계자의 영업용 미소가 아닌 모처럼 설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으로 익숙한 저 미소는 아련할 만큼 오랜만이었다. 저 따스한 미소가 사무치게 그리웠는데 이제는 더 이상 저를 향해 보여주지 않는 미소였다.
차종을 보니 지난번 미팅 때 송화궁 주차장에서 보았던 현서의 차였다.
그 차의 운전석에 오늘은 루카스가 오르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차오르는 물기로 시야가 일렁였다.
정말 부부였나,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좌절감이 몰려왔다. 어린애처럼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흐르는데 막을 길이 없었다.
도하는 태어나서 겪은 가장 깊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벌어져 버린 이 상황에 불같은 분노가 일었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니.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니.
이혼했잖아, 이제 남이잖아, 얼마든지 새로운 사랑을 하고 다시 결혼하고 다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거잖아, 라는 등 이성적인 납득 따위는 지금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저 절망스러웠고 그저 화가 났다. 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현서를 낚아채 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어금니를 물고 노려보는 사이 그들의 차가 움직였다.
누군가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그들은 가차 없이 떠나가고 있었다.
단란한 가족을 태운 차의 뒷모습에선 행복의 기운이 나오고 있었다.
***
밤새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현서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평일도 아닌 주말에 채도하가 거는 전화라야 봤자 업무 관련된 일도 아닐 거라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다시 현서의 집으로 찾아가 만나서 묻고 싶었지만 남편이 있는 집으로 찾아가봤자 만나줄 리가 없었다.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고 난 뒤 도하는 다시 집을 나섰다.
일요일이었지만 송화궁에는 오히려 많은 손님이 활발히 드나들 주말이었으니 원장인 현서는 출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토요일인 어제는 쉬었으니 주말 중 하루는 나오지 않을까.
루카스 유를 피해 그녀를 만나기에도 집보다 오히려 그녀의 독립된 공간인 원장실이 나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