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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상상 속에서조차 들어본 적 없는 말 (35/92)


#35. 상상 속에서조차 들어본 적 없는 말
2022.08.01.



 
서로의 소소한 근황들을 전하며 겉보기엔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기가 한 시간가량.

어느새 깔끔하게 정돈된 테이블 위에는 디저트와 커피만이 올려져 있었다.

커피를 몇 모금 머금던 도하는 어느 순간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문득 진지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현서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그가 오늘 보자고 한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을.


“결혼하자, 현서야.”

포크를 쥔 현서의 손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네?”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될 만큼. 잘못 들었거나, 혹은 장난이거나.

뭐가 되었든 그것과는 별개로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놀란 그녀의 반응을 당연히 예상한 듯이 도하는 옅게 씩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명확한 어조로 말해 주었다.


“결혼하자고.”

상상 속에서조차 들어본 적 없는 말이 들리고 있었다.


“…….”

고작 장난이나 치려고 몇 년 만에 만나자고 할 인물은 아닌데, 별안간 이게 무슨 소리인지 싶었다.


“결혼……이요?”

“그래, 결혼.”

“누가 누구랑요?”

“너랑 내가.”

사르르 녹던 디저트 탓에 입안이 달았다. 하지만 도하의 말이 더 달았다.

그러니까 이건. 청혼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왜냐고 묻는 현서를 보며 도하는 또 씩 웃었다.


“채 회장님이 혼사 문제를 언급하셔서 말이야.”

현서는 그 말에 더욱 이해가 안 되었다.


“근데 그게 왜요? 그러니까, 오빠 혼사 문제에 내가 왜 나왔어요?”

“결혼은 너랑 하려고.”

“…….”

4년간 서로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서 이제 이 남자도 비루했던 과거 인연 따위는 잊고 상류층의 생활에 잘 젖어 들어 살고 있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나, 놀리는 거 아니죠?”

내용은 청혼이 맞는데 자꾸 청혼받는 것 같지 않아 실감이 안 났다.


“내가 너 놀린 적 있어?”

그 물음에 현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 번도 제게 짓궂은 적이 없었다. 어릴 때조차도.


“그래도…… 몇 년 만에 나타나서 갑자기 이러면…….”

도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황스럽겠지.”

“……집안에서 권하는 혼처가 있었을 거 아녜요.”

현서는 입안에서 버석이는 모래를 뱉어내듯 말했다.

실은 그런 생각을 자주 해 왔어서 고통스러웠다. 그에게 어울리는 재벌가의 여자와 만나 결혼하게 되는 그의 모습이 자꾸 상상되었던 것이다.

그 상상이 단지 상상이 아니라 곧 닥칠 현실이었기에 더욱 절망적이었다.


“있었지.”

도하는 당연하다는 듯 산뜻하게 대답했고 현서는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거절했어.”

그게 이렇게 간단히 말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의 태도가 놀라웠다.


“너랑 혜수 이모, 잊어본 적 없어.”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내 앞날이 걱정되어서 내가 불편하다고 하셨었지. 그 말을 듣고 고민하다가, 그럼 내 걱정을 안 하셔도 될 만큼 내가 힘을 키우면 다시 나를 만나주실까 하는 생각을 했어.”

“지금은 힘이 있어요?”

“뭐……. 아직 그렇게 대단한 힘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없지는 않지. 적어도 결혼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요?”

“채 회장님이 내 의견을 존중해주시니까. 누구보다도 그분이 밀어주시는 게 중요하지.”

채 회장이 언급되자 현서는 정신이 덜컥 들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와닿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결혼 상대가 나라고요?”

“그래. 내가 회장님한테 결혼은 너랑 하겠다고 말씀드렸어.”

“이미 채 회장님께 내 이야기를 했다고요?”

“잘 모르는 집안 사람들이랑 가족이 되고 싶진 않아.”

그가 차분히 하는 말을 듣고 있다 보니 점점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왜 그가 결혼 상대로 이현서를 떠올리게 되었는지도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의 청혼이 진심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가족은 너랑 혜수 이모여야지.”

너무 벅차올라서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가 아무리 과거에 가족이 되고 싶어 했어도 진짜 결혼을 생각해 낼 줄이야.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난 여동생이라면서요…….”

너무도 서운했던 그 말을 이제껏 담고 있었던 탓일까. 그래서 더 그의 청혼이 믿기지 않았던 것도 있다.


“……기억하고 있었네.”

“그 말을 어떻게 잊겠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그 서러웠던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였다.

도하는 약간의 원망이 담긴 현서의 미소를 보며 바람이 빠지듯 웃었다.


“그래, 그런 말도 했었지. 근데 지금은…….”

그는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현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러곤 담박하게 내뱉었다.


“지금은…… 여동생 말고, 아내 해줬으면 좋겠어.”

그를 바라보는 현서의 눈앞이 일렁거렸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눈물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하는 그런 현서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벨벳 상자를 보는 현서의 눈이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케이스를 열자 영롱하게 빛나는 반지가 보였다.


“승낙한다면…….”

도하는 느릿한 손길로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들며 현서를 보았다.


“당장 끼워주고 싶은데.”

몇 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 무슨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현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울고 또 웃고 하던 그녀는 괜히 뾰로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반지까지 준비했어요? 내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그럼에도 도하는 여유로운 미소만 입가에 걸며 대답했다.


“거절…… 안 할거잖아.”

현서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더욱 불퉁해진 입술로 중얼거렸다.


“못 됐어, 정말……. 옛날이나 지금이나…….”

재수 없는데 맞는 말이어서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서민이었던 시절의 어린 한도하도 꽤나 오만해 보였었는데, 지금은 진성 총수의 후계자가 된 어른 채도하여서 그런지 몰라도 현서의 눈에 그는 더한 자신감에 차 있는 듯 보였다.

누구 앞에서나 당당했던 그녀였지만 언제나 그 앞에서만큼은 작아지곤 했다. 다시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어찌해도 그저 기뻤다. 그가 청혼했으니까.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날이니까.


“끼워줘요, 반지…….”

현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하는 아까보다 좀 더 환하게 웃으며 현서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도하의 웃는 얼굴을 현서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원래는 잘 웃지 않는 그가 그녀의 승낙에는 기뻐하는 것 같아서 꿈만 같았다.

나한테 어떻게 이런 날이 오지?

현서는 손을 눈앞에 들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냥 좋아해도 되는 걸까.

그의 어머니가 한영숙인데. 은혜도 모르던 한영숙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 결혼의 실현 가능성이 과연 몇 프로나 될까 염려가 되었다.


“오빠 어머니는…… 많이 반대하시지 않아요?”

“그건 걱정하지 마.”

도하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부정은 않는 걸 보니 역시 영숙의 반대를 해결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네가 끝까지 날 따라와 주기만 한다면 이 결혼은 결국 성사될 거야.”

“그럴 수 있을까요?”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 나 없는 데서 방해를 받는다고 해도 네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았어요.”

현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도하의 곁에 평생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견디지 못할 것은 무엇도 없었다.


“어떤 방해에도 굴하지 않을 거예요.”

현서의 강직한 대답에 도하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청혼받은 날 현서가 집에 가서 도하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현서만큼이나 놀랐던 혜수는 곧 땅이 꺼지게 걱정을 내비쳤다.


“엄마는…… 너무 걱정된다, 현서야. 이건 아닌 거 같아.”

“내가 도하 오빠 많이 좋아했던 거 누구보다 엄마가 잘 아시잖아.”

“내가 도하가 싫어 이러니?”

며칠 동안 혜수는 극구 반대를 하며 말렸지만 며칠 뒤 도하가 정식으로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혜수를 찾아왔다.


“이제는 어머님이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오랜만에 만난 도하의 모습에 혜수는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짠하던 옆집 소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듬직한 남자가 되어 찾아와 딸을 달라고 하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했다.


“현서랑 결혼하면 저도 가족이 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게다가 도하에게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런 말을 건넸던 건 그녀 자신이지 않았는가.

이제 남부러울 게 없이 다 가지게 되었으면서도 그녀와 가족이 되고 싶다던 그 마음을 여전히 간직한 채 나타난 도하를 어찌 더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따지고 보면 그는 사실 친모, 친부도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도 외롭게 자랐다. 그를 방치한 이기적인 어미와 성인이 되도록 얼굴도 모르던 아비, 둘 다 평범하게 그를 길러주었다 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어릴 적엔 잘 만난 적도 없던 망나니 동생까지, 평범한 우애를 나누긴 어려웠다.

그의 가족은 결핍된 부분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는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옆에서 모두 세심하게 지켜본 게 혜수였다.

부잣집으로 떠나가서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이제쯤이면 아쉬울 게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이 집을 잊지 못하고 또 찾아왔다.


“도하야. 그럼 우리 현서,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

“네, 평생 노력할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꼭 현서 편이어야 해.”

“물론이죠.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일찍 남편을 보내고 외동딸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신 분이다. 도하는 그 애틋한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나야 언젠가 너희보다 먼저 세상을 뜨지 않겠니. 그때도 네가 평생 우리 현서 손 놓지 않아야 해.”

“왜 벌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약속해 줘, 도하야.”

“약속할게요.”

그리고 현서가 예상했던 대로 얼마 뒤 영숙은 도하 몰래 현서의 집을 찾아와 또 둘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도하와 약속했던 대로 현서는 버텼고, 도하가 채 회장에게 그녀를 소개하는 자리까지 갈 수 있었다.

채 회장 옆에 앉아 있던 한영숙은 세상 유순해진 모습으로 온화한 미소만 짓고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이후 상견례 자리에서 혜수가 채 회장과 한영숙을 만나기까지도 풍파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현서는 이 모든 일을 도하에게 티 내지 않았다.

무난한 분위기 속에서 상견례를 마친 직후 현서는 오히려 도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빠. 어머님께서 비록 나를 반기시진 않지만 나는 어머님이랑 꼭 친해질 거예요. 오빠 부모님도 이제 내 부모님이잖아요.”

도하는 고맙다는 말 대신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제 무려 예비 신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둘 사이엔 별다른 스킨십이 없었던 터라 현서는 가슴이 선득거렸다.

자신을 선택해 준 그의 마음이 사랑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많은 좋은 혼처를 제치고 와줄 만큼 외롭던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와 그의 가족을 사랑하며 진심을 보여주려 노력한다면, 언젠가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오빠. 내가 사랑하는 거 알죠?”

“응…….”

그때 도하는 현서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처음으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현서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질끈 감았다.

안 그래도 사랑 고백의 여운에 젖어 있던 그녀는 숨 막히게 벅찬 감격을 느꼈다. 그날의 첫 키스를 겪으며 비로소 자신이 도하에게 여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둘은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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