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반할 수밖에
(34/92)
34. 반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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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반할 수밖에
2022.07.28.
영숙의 말이 너무 기가 막혀 현서는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엄마가 얼마나 제 아이들을 잘 챙겼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저 아쉬울 때는 그렇게나 살갑게 감기더니.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돌변할 수가 있을까.
옆에서 몸을 살짝 떨던 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나서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일어난 혜수는 영숙이 바라는 대로 도하가 준 선물들을 모조리 찾아가지고 와서 그 앞에 두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한영숙이 바라는 대로 존대까지 해가며 말했다.
“이게 다예요?”
“네.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져가세요.”
“흠. 알았어요. 참, 도하한테는 오늘 내가 왔다는 거 비밀로 해주세요.”
한영숙은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저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영숙이 돌아가고 한참이 지나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던 현서에게 혜수가 한숨 끝에 말했다.
“우리, 이제 도하를 보내줘야 할 것 같다.”
“엄마…….”
“현서야. 너도 힘들겠지만 이만 도하 잊어.”
그 말에 더욱 봇물처럼 눈물이 터졌다. 목소리는 흐느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어떡해…….”
혜수도 허탈감에 빠진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한영숙에 대한 분노나 배신감보다 도하를 못 보고 살아야 하는 슬픔이 더 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도하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도하가 연락해도 끊어내.”
“……어떻게 그래.”
“엄마 말 들어, 현서야. 이러다 더한 꼴 보기 전에.”
“…….”
이후 현서는 실의에 빠진 채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 시기에 살도 몇 킬로나 빠졌는지 모른다.
한 달이 넘어가자 도하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현서는 울리는 전화기 위에 뜬 그의 이름을 보고도 받지 못했다. 너무 반가워서 가슴이 뛰는데 눈물만 나왔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자 대신 문자가 왔다.
[현서야. 어떻게 지내?]
[우린 잘 지내. 오빠 바쁜데 우리 걱정은 말고 오빠나 잘 지내.]
담담하게 대답을 보냈다. 그 앞에선 늘 좋아 어쩔 줄 모르던 현서의 반응치고 달랐을 것이다. 그 온도 차를 눈치챘는지 그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이모도 전화 안 받으시던데.]
[아니야, 없어.]
[넌 요새 바빠?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어?]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하던 현서에게서 소식이 뚝 끊기니 뭔가 이상하다 여긴 모양이었다.
[응. 나 바빠.]
[신입생인데 많이 바쁘네.]
[응. 이것저것 많이 하고 있어. 그리고 나 남자친구도 생겼고.]
그를 죽고 못 살고 따라다니던 여자애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자연스레 멀어질 거라 생각했다.
현서의 그 말에 도하는 약간의 공백 후에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이야?]
[응.]
[누군데?]
[과 동기야. 암튼 그러니까 나 이제 자주 연락 못 할 거야.]
현서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날 도하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다시 그가 연락을 했다.
[현서야. 왜 거짓말했어. 너 남자친구 없잖아.]
[뭐?]
[승진이 통해서 알아보니까 너 과 동기랑 연애 안 한다는데? 승진이가 네 동기들한테도 물어봤대.]
“…….”
현서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승진은 도하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현서의 과 선배이기도 했다.
그녀는 도하에게 답장 보내는 것도 잊은 채 중얼거렸다.
“아니, 그걸 왜 승진이 오빠한테 알아봐…….”
가끔 보면 도하는 좀 이상한 데서 집요할 때가 있긴 했다. 그게 왜 지금 이 일에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친하지도 않으면서 내 연애 여부를 수소문하려고 연락을 다 했단 말이야?”
[왜 거짓말했어? 현서야.]
현서는 곤란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연락 끊으려고 그랬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너랑 이모 나 피하는 거 맞지?]
현서는 끝내 그에게 대꾸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도하가 몇 번 현서와 혜수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두 사람 다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예상치 못했던 어느 주말에 도하가 찾아왔다.
“오빠…….”
현서는 영숙과의 일이 있었던 뒤에 보게 된 도하의 모습이 유독 더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기를 쓰고 참아냈다.
“이모는 계셔?”
“응…….”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었던 거야.”
“…….”
혜수 역시 그 만남이 너무도 어려웠다. 오랜만에 본 도하에게 전처럼 따뜻한 밥이라도 지어 먹이고 싶었지만 물 한 컵도 줄 수가 없었다.
야멸차게 끝내야 이대로 마지막이 될 테니까.
“도하야, 이제 이렇게 오지 않아도 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평소 어지간한 일로는 덤덤하던 도하도 혜수의 단호한 어조에는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다 너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제 너는 너한테 꼭 필요한 관계, 너한테 도움 되는 관계에나 신경 써야지.”
“저도 그런 관계, 안 그래도 신경 많이 쓰고 있어요. 근데 그거랑 제가 여기 오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요.”
“도하야. 너 지금 많이 바쁜 거 다 안다. 넌 이제 사는 세계가 다르잖니. 이제 그만 새로운 네 삶에만 충실하렴.”
그러나 혜수는 전에 없던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 집안 친척들, 너에 대해 말이 많았다며. 네 과거에 대해 자꾸 말 나와봐야 안 좋게 입방아에나 오르내리지 않겠니. 네 앞길 흠집 내고 싶지 않다.”
“흠집일 리가 없잖아요.”
“…….”
“혹시 그 집안 사람들이 뭐라고 했어요?”
“아니야. 우리가 뭐라고……. 그 사람들이 우릴 알기나 하겠니. 그런 거 아니다. 그냥, 이러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뭐가 좋은데요.”
“도하야, 우리도 이제 너 불편해!”
“…….”
도하는 그 말에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진성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나 무거웠던가. 10년을 친모보다 더 친하게 지냈는데 불편하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서는 어떤 말도 더할 수가 없었다. 어울리지 않게 모진 엄마의 태도에 도하보다도 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때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도하가 고개를 돌려 현서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다른 어느 때보다도 놀란 현서는 외면하듯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도하를 끊어내라는 엄마의 말만을 기억하며.
이제 보지도 말고 연락도 하지 말고 살자는 혜수의 말이 그날의 결론이었다.
평소엔 표정이 별로 없던 도하가 그날은 꽤 굳어진 얼굴로 돌아갔다.
그렇게 도하와의 인연은 끊어져 버렸다. 4년이 지나도록 그에게선 연락조차 없었다.
현서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나름 선호하던 기업에 취업하여 사회 초년생으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도하가 자주 궁금했고 그의 생각을 자주 하던 현서는 아직 그를 잊지 못했다는 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연인 사이도 아니었는데 뭐가 이리도 긴 그리움을 남기는 건지.
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너무나 보고 싶었고,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첫사랑의 여운이 참으로 질기기도 했다.
여전히 집에서는 혜수와 함께 도하 이야기를 종종 입에 올리곤 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보는 아스라한 심정으로 말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렇게 그는 점점 멀어져가는 과거의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현재의 그는 이제 정말 현서 모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머나먼 존재가 된 듯하였다.
진성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앞으로 더욱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겠지.
현서는 알 수 있었다. 도하라면 무리 없이 진성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란 걸.
이제 보니 도하가 영숙을 하나도 닮지 않고 그렇게 혼자 잘날 수가 있었던 건 다 채현우 회장님을 닮아서였나 보다.
그러니 그는 무리 없이 제 능력을 발휘하여 언젠가는 진성의 회장 자리에까지 오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할 때마다 현서는 늘 눈물을 짓게 되었다.
이제 이런 궁상은 그만 떨어야지. 누가 알아준다고…….
그런데 어느 날,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울리던 전화기를 무심코 바라보던 현서는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랍게도 발신인이 도하였다. 무려 4년 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속수무책으로 가슴이 널뛰어댔다. 멍하게 화면을 바라보던 현서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서야.
한층 더 굵직해진 목소리였지만 분명 도하의 목소리였다.
“…….”
-현서 맞지?
“네.”
-……오랜만이야. 현서야.
떨어져서 지낸 먼 시간이 무색할 만큼 그는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러게요.”
-별로 반갑지 않나 보네.
“그렇다기보단…… 너무 오랜만이라 좀 놀라서……. 근데 무슨 일이에요?”
-혹시…… 주말에 시간 돼?
별안간 그가 물었다. 현서는 내내 벙한 상태로 대꾸했다.
“주말……. 토요일에 되긴 하는데……. 왜요?”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만나서 이야기하자.
무슨 일이지?
아무리 상상해보아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조차도.
다만 몇 년간 보지 못했던 도하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고 있었다.
현서는 혜수에겐 이 사실을 숨긴 채 결국 주말에 도하를 만나러 나왔다. 약속 장소에 가보니 그곳은 매우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리고 드디어 도하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현서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그를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장을 입은 그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느덧 스물일곱이 되어 있던 그는 이제 정말 어른다운 남자였다. 성숙함을 물씬 풍기게 된 그의 모습은 더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변해 있었다.
심장이 정신없이 뛰었다. 다시 그에게 반할 수밖에 없을 것처럼.
예전보다도 더 곤란한 건, 철모르던 어린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진지한 마음으로 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이야, 현서야. 넌 그대로네.”
“그래? 오빠는…… 많이 변했네.”
“내가? 난 잘 모르겠는데……. 일단 앉자.”
우선 뭘 좀 먹으라며 그는 이것저것 많은 요리를 주문해주었다. 음식은 매우 훌륭했으나 긴장한 탓에 맛에 집중이 썩 잘 되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를 알아 오면서 그 앞에서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몇 년의 공백이 분위기를 더 서먹하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그가 너무 근사해져서 떨리는 것인가.
긴장이 되는 와중에도 현서는 그에게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