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 한도하에서 채도하로 (33/92)


#33. 한도하에서 채도하로
2022.07.25.



 


“…….”

혜수가 또 넌지시 부추겼다.


“어때? 우리 현서랑 결혼할래?”

현서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도하와 눈을 맞추며 그의 대답을 내심 기다렸다.


“현서는…… 제 여동생이잖아요.”

차라리 그냥 아니라는 말이 나을 것 같았다. 여동생이라는 말은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현서는 너무 속상해서 몇 박 며칠을 밤마다 울었다.

괜히 그런 농담을 해서 그런 대답을 듣게 한 엄마까지 원망스러웠다.

현서가 막 대학교 신입생이 되었을 때 한도하는 채도하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때 현서와 혜수의 곁을 떠나갔다.

영숙은 친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도하가 진성그룹 채현우 사장의 아들이라고 떠들곤 했는데, 그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 아무도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 사실이었다.

영숙이 젊은 시절 조용한 호텔 바에서 일을 했을 때였다. 당시 미혼이었던 채현우가 무슨 고민이 있었던 건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들었어? 방금 식음료부 지배인님 오셔서 하시는 말씀 들었는데, 저기 저 사람이 진성 채만호 회장 외아들이래.”

위에 있던 직원이 알아채고 조심히 모시라고 당부를 한 탓에 직원들 사이에서 은근히 수군대고 있을 때 영숙은 그들 몰래 간도 큰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야간 근무를 해온 탓에 불면증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먹던 약한 수면유도제를 반으로 잘라 기회를 엿보다 그의 술에 타는 데 성공했다.

무슨 힘든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어떤 일행도 없이 울적한 얼굴로 술을 퍼마시고 있었던 게 빈틈이었을까.

이내 축 처져버린 채현우가 다른 누구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한영숙이 친히 그를 부축해서 바를 나왔다.


“손님, 많이 피곤하셔요? 이렇게 자꾸 눈을 감으시니……. 못 참으시겠으면 위층 객실에서 쉬시는 게 어떠실까요?”

인사불성에 가까운 남자를 종용하여 체크인을 하고 그 방까지 부축하여 들어가는 동안 보는 눈이 있었지만 영숙은 개의치 않았다.

기껏 해봐야 직장 잘리기밖에 더하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그보다 더 중요해질지 모를 인연을 만들어보려 한 것이다.

채현우가 선잠에 든 지 한 시간 가량이 지났을 때, 영숙은 그를 억지로 깨웠다. 술기운이 남아 있을 때 사고를 쳐야 했으니까. 이 때문에 수면유도제를 많이는 먹이지 않았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가 정신을 못 차릴 때 덮친다면. 제가 정상 남자라면 넘어가지 별수 있겠는가.

애써 원하는 대로 일을 치른 영숙은 채현우가 다시 잠에 빠져든 후 그의 지갑을 뒤적였다.

역시 그의 명함이 몇 장 있었다. 그중 한 장을 챙겨 그의 연락처를 확보해두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두통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깨어난 채현우를 향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어제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채현우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솔직히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일어났다는 것 정도는 그 역시 알 수 있었다.


“나는 한영숙이라고 하는데 그쪽은 누구실까요?”

모른 척 묻는 질문에 통성명을 하고 영숙의 질문 이후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간 후 채현우가 정중히 말했다.


“미안합니다. 지금은 제가 우선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해서 곧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후 연락이 온 건 그의 비서를 통해서였다. 비서는 수습을 위해 직접 찾아와 섭섭지 않을 금액이 담긴 봉투를 전해주었다.

비록 실수는 함께 저질렀지만 유명한 인물이 더 사리고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영숙은 예상대로 직장에서 해고당했지만 채현우가 준 봉투가 짭짤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내기엔 욕심이 났다.


‘한 번 더 꼬시면 넘어올까?’

이왕이면 그의 애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연락을 해보았다. 그는 의외로 전화는 순순히 받았지만 돌아오는 건 정중한 사과뿐이었다.

솔직히 그가 뭐가 아쉬워서 무슨 밤을 보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여자를 만나려 하겠는가. 아깝지만 영숙은 한 번 뜯어낸 돈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채현우는 집안에서 정해둔 여자와 결혼했다. 혼기가 찬 부잣집 도련님에게 정혼자가 있는 건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문에서 그의 결혼 기사를 읽고 입맛을 다시고 있던 영숙에게 얼마 뒤 천운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뱃속에 그의 씨를 품고 있던 것이었다.

영숙은 혹여라도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고이 아이를 지켜서 낳았다. 그러고는 몸을 풀자마자 당시 사장이 된 채현우를 찾아가 아들을 보여줬다고 했다.

채현우의 부모인 채 회장 내외가 함께 살고 있던 본가는 당연히 덜컥 뒤집혔다.

노발대발한 선대 회장님의 요구로 영숙은 아들의 친자확인까지 하여 입증했다고 한다.

결국 채현우가 제 아들로 올려 키우겠다고 했는데, 영숙이 아들을 데려가려면 자신도 함께 들이라고 떼를 썼다고 했다.

그러나 버젓이 있는 본처를 내보내고 자신을 처로 맞아달라고 억지를 쓰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질 리는 만무했다.

대신 채 회장의 집에선 영숙에게 아이와 지낼 집을 한 채 사주고 양육비를 주었으며, 그 덕에 영숙은 그 돈을 흥청망청 쓰며 지내올 수 있었다.

도하를 키운다는 명분으로 받는 돈이었기 때문에 늘 도하를 제 집에서 함께 살게는 했다.

실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주혁을 더 편애했지만, 영숙이 육아에 서툴렀던 탓에 막상 어린 시절의 주혁은 친척 집이나 친부의 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하만큼은 한 번도 다른 집에 보낸 적이 없는 걸 보면 모정보다 돈줄이 더 중요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도하가 스물세 살이 되었을 때 채현우 사장은 회장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인은 병으로 죽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부부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영숙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한영숙의 인성 하나를 놓고 보면 아무리 친자를 낳은 여자였다 해도 그녀를 한 집안으로 들인다는 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채현우 회장이 도하의 아기 시절 이후 두 번째로 도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오래전 영숙의 품에 안겨서 왔던 갓난아기를 본 게 전부였었기에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의 아들이었다.

죽은 처와는 자식이 없었던 탓에 자식에 대한 부성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채현우 회장에게는 도하와의 재회가 아주 신선한 경험과도 같았다.

더구나 자신의 모습을 많이 빼닮은 채 장성한 아들이라니. 후계자가 없어 훗날 조카에게 기업과 유산을 물려주게 생긴 그로서는 굉장한 고민에 빠질 만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대화를 해보니 의외로 도하는 교양 없는 어미와는 달리 점잖았고 또 무엇보다 놀랄 만큼 똑똑했다.

그런 어미 밑에서 자랐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성을 갖춘 아들은 일을 가르치기에 손색이 없어 보일 만큼 특출나게 잘난 아이였다.

한마디로, 철저하게 친탁을 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채현우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그의 장점을 많이 닮은 아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유일무이한 핏줄에 대해 끓어오르는 뜨거운 부성이 결국 한영숙까지 집안으로 들이게 했다.

도하가 이미 성인이었으므로 한영숙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들을 채씨 가문에 올릴 수는 있었으나 그래도 도하에겐 홀로 그를 키워준 어미일 테니 그를 배려하여 한영숙까지 들일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어차피 세상이 모르던 아들이란 존재가 갑자기 생겼으니 혼외자라는 낙인은 피할 수도 없을 텐데 후계자로서 도하의 입지를 생각해도 그 어미가 채 회장의 집에서 안주인 노릇을 해주는 게 나을 터였다.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는 하지 않아 서류상 재혼은 아니었으나 그런 속사정을 세간이 알 리는 없었고 영숙으로선 집안에 들어앉아 호사를 누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할 입장이었으니 채 회장 맘 변하기 전에 냅다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도하는 오랜 고향을 떠나갔다. 개천에서 용 났다며 떠드는 사람들로 인해 한동안은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혜수는 너무 잘 되었다며 진심으로 그의 인생을 응원했다. 현서는 그에게 잘된 일에 대해선 함께 감격했지만, 한편으로는 멀어져 버릴 그를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허전함에 슬프기도 했다.

도하는 당연히 이전처럼 오지 못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회사 일도 배워야 했던 그는 정말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도 현서는 그와 연락이 끊기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녀가 연락할 때마다 비록 늦게라도 도하는 답을 주었다.

거기에 만족해야 하는 사실에 상실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그마저 끊기면 마치 호흡이 끊기기라도 하는 양 현서는 그와의 인연을 간신히 이어갔다.

자신은 도하를 사랑하는 입장이었지만 도하는 그것도 아니었으니. 짝사랑하는 주제에 뭘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버린 도하에게 말이다.

옆집 사는 한도하를 짝사랑할 때도 어려웠는데 진성 황태자가 된 채도하를 짝사랑하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그건 그야말로 연예인 덕질이나 다름없었다.

도하의 가정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후 첫 명절이 되었을 때, 현서 모녀는 반가운 손님을 맞을 수 있었다. 몇 달 만에 찾아온 도하였다.


“오빠!”

“어머, 도하야! 이게 얼마 만이니!”

“안녕하셨어요?”

그는 이전에는 스스로 살 수 없었던 값비싼 명품 브랜드의 물건들을 잔뜩 사 가지고 와서 현서와 혜수에게 선물했다.


“이모가 저한테 베풀어주신 친절에 비하면 시시한 선물이죠. 이건 네 거야, 현서야.”

모녀는 민망해했지만 도하의 정성이라 어색해하며 받았다.


 
모처럼 오랜만에 만난 도하와 모녀가 눈물겹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영숙이 갑자기 집에 찾아왔다. 옆집에 살 때는 혜수의 친절에 의지하여 그토록 두 아들을 잘 떠넘기던 영숙이, 떠난 이후로는 단 한 번의 연락도 없다가 웬일로 옛 동네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전보다도 더 요란하게 치장을 하고 나타나더니 이상한 말을 했다.


“정혜수 씨. 이제 우리 도하,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언니언니 하며 혜수를 따르던 영숙은 갑자기 호칭과 말투도 바꿔가며 낯설게 굴었다.

게다가 뭐? 도하를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실 거라 생각해요.”

영숙은 이어 혜수 곁에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현서를 향해서도 고개를 돌렸다.


“현서 너도 이제 우리 도하 만나지 마라. 연락도 하지 말고.”

스무 살의 앳된 현서는 그렇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알다시피 이제 우리 도하는 수준이 달라졌잖아? 이 동네 사람들이랑 어울릴 레벨이 아니라는 건 말 안 해도 알지?”

“…….”

한영숙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가 왜 이러는지 너무도 잘 알 것 같아서 더 현서는 서글펐다.

별안간 벌어진 일에 혜수 역시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았다. 10년간 아들처럼 아껴왔던 도하를 끊어내길 강요받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영숙아…….”

“아, 그리고 정혜수 씨. 이제 저한테 호칭도 좀 조심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이제 저도 더이상은 정혜수 씨가 그렇게 함부로 이름 불러도 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

영숙의 경악스러운 태도에 현서와 혜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얼마 전에 우리 도하가 여기 다녀간 거 알아요.”

상처 입은 모녀 앞에서 한영숙은 한술 더 떴다.


“바쁜 녀석이 왜 백화점까지 가서 손수 뭘 그렇게 사나 싶었는데 여기다 퍼주려고 그런 거였더라고. 난 또 지 엄마 선물 사는 줄로만 알았더니만…….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영숙은 그게 그렇게 못마땅한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댁들한테는 어울리지도 않을 물건들이니 내가 가져갈게요. 도로 주세요.”

영숙이 얌체 같은 성격인 줄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 밑에서 자라는 도하가 불쌍해서 혜수는 더 도하를 잘 챙겨주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혹시 도하가 또 찾아오거나 연락하거든 먼저 끊어줬으면 좋겠어요. 뭐, 애들 어릴 때 이 집 밥상에 우리 애들 숟가락 좀 몇 번 얹어줬다고 해서 이제 와 생색을 내고 싶은 건 아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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