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바뀌어버린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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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바뀌어버린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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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바뀌어버린 호칭
2022.07.14.
그렇게 독하게 맘먹고 그를 떠났는데 이깟 말들에 흔들릴 수는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아요.”
칼같이 잘라내자 주춤하는지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그러니까… 안 만날래요.”
조용히 있는 그가 더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이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연락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이만 끊을게요.”
그래서 그의 마지막 대꾸는 듣지도 않고 통화를 종료해버렸다.
그대로 전화기를 책상 위에 뒤집어 놓고 현서는 위를 향해 고개를 젖혔다.
목 안쪽에 꼭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한없이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하……. 일이나 해야지.”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똑똑-
“원장님, SH에서 방문하셨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현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안으로 모시세요.”
그녀는 곧장 손님을 맞기 위해 문 앞으로 향했다. 곧 송화궁 안내 직원이 문을 열었다.
“어서 오…….”
그러나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인물을 본 그녀는 인사 한마디를 채 끝내지 못했다.
그 문 안으로 채도하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 원장님, 안녕하셨습니까.”
끊겨버린 그녀의 인사를 곧바로 도하가 이었다.
“여긴…… 웬일이에요?”
“오늘 우리랑 미팅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왔다고요?”
“예.”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현서는 그들 근처에서 눈치를 보고 서 있는 안내 직원을 흘끔 보았다.
“……일단 앉으세요.”
원장실 안 소파에 앉기 위해 움직이자 그제야 직원이 제 할 바를 하려 했다.
“음료 가져다드릴까요? 한방차나 녹차도 있고, 커피도―”
“괜찮아요, 필요하면 제가 직접 가져올게요.”
“예.”
정중한 얼굴로 깔끔하게 직원을 내보내자마자 현서는 정색하고 전남편을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도하가 옅게 웃으며 말을 던졌다.
“나한테는 차 한 잔도 주기 싫은 거야?”
현서는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물었다.
“담당 직원은요? 오늘 오기로 한 분은 아직인가요.”
“내가 온 거야.”
“…….”
뻔뻔한 대답에 현서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허 벌리고 말았다.
“……채 전무님. 할 일 없어요?”
그 물음에 왜인지 도하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채 전……무님?”
질문의 내용보다 호칭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현서는 담담한 얼굴로 대꾸해주었다.
“뭐, 마음에 안 들면 채 대표님이란 호칭도 있고요.”
“…….”
도하는 잠깐 동안 현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결같던 호칭이 이제는 바뀌어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수없이 불렸던 예전의 그 호칭은 주로 다정한 미소와 함께였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아이 시절부터도…….
처음엔 잘 알지도 못했던 낯선 옆집 아이가 부르는, 무의미한 느낌의 호칭이었다.
‘오빠.’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엔 여동생이 부르는 듯, 친숙해진 느낌이었다.
‘오빠.’
그다음엔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오빠.’
그 모든 때가 참으로 아득해져 버렸다.
도하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편할 대로 불러.”
작게 긴 숨을 내쉰 현서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타박했다.
“아니, 근데 무슨 이런 일로 대표가 직접 와요?”
도하의 미소가 조금 더 또렷해졌다.
“내가 이 사업에 좀 진심이라…….”
현서는 연신 어이가 없어 시선을 돌려버렸다.
“로열티 최대한으로 맞춰줄게. 넉넉히 불러.”
그 말에 현서는 눈동자만 움직여 그를 보았다.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받지 않을 거예요.”
“내가 주는 것도 아닌데 그래. 회사가 주는 거지. 이건 비즈니스잖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예요. 채 전무님 사업가 아니에요? 단가를 높이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따져 묻는 현서를 보며 도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지금 내 걱정하는 거야?”
“네? 제가 채 전무님 걱정을 왜 하나요? SH에 좋은 조건을 내거는데도 이러니까 그렇죠.”
픽 웃던 도하는 끄떡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단가가 조금 높더라도 고급화 전략이라 그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이현서라면 합리적인 선에서 책정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
현서는 그가 왜 이러는지 물론 알 것 같았다.
“위자료 못 줘서 뭐라도 더 주고 싶은 거예요? 근데 나도 이제 더는 돈이 아쉬운 사람이 아니라서요. 보다시피.”
도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이현서 고집을 꺾은 적은 없지.”
“아셨으면 이제 그만 이 일은 마무리하고 가보세요.”
방금까지 도하의 얼굴에 걸려 있던 옅은 미소가 그녀의 말에 지워졌다.
그는 일어나는 대신 현서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현서야.”
그는 일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한결 더 심각해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현서는 무엇일지 모를 그 질문을 듣기가 조금은 두려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뭔데요.”
그러나 지금 그녀보다 더 두려운 기분이 드는 건 도하였다. 그는 근심 어린 얼굴을 숨기지도 못한 채 물었다.
“너 혹시…….”
그는 일전에 만난 적 있던 남자아이를 떠올렸다. 웃는 얼굴이 사랑스럽던―그러니까 루카스의 아들이었던―아이를.
“……결혼했어?”
그 아이의 엄마가, 그러니까 루카스의 아내가 너는 아니라고 제발 말해주길 기다렸다. 그것만은 절대 아니어야 했다.
현서는 잠시 벙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엄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내 개인사에 대한 질문은 안 받을게요. 일에 관한 것만 물어보세요.”
긍정은 하지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은 현서를 보며 도하는 꽤 충격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그리 당황스러운 질문도 아니다. 가깝지 않은 사이에도 흔히 물을 수 있는.
결혼한 게 아니라면 보통은 그런 오해를 받기 싫어서라도 오해를 풀지 않나.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그러나 해소되지 않은 의문에 갑갑함을 느낀 채 도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 여부는 나중에라도 알 수 있을 테니.
지금은 우선 붙잡을 수 있는 여지라도 남겨두려 했다.
“그럼, 일에 관한 건 물어봐도 돼?”
물론 전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래요.”
그녀는 그마저 번거롭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필 거래처였으니. 그것도 하필 유 대표가 공들이는 사업의 거래처였으니.
“그럼 이 원장님. 같이 점심 드시러 나가실까요? 좋은 원료를 무상으로 제공해주시는데 좋은 식사라도 대접하게 해주시지요.”
현서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개인적인 대화를 거부하니 참 사무적으로도 묻는다.
“아니요. 오늘은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은 없어요. 간단히 해결해야 해요.”
“그럼 저녁 식사는 어떻습니까?”
“저녁엔 약속이 있어요.”
“그럼 내일 점심은요?”
“이보세요, 채 전무님.”
끈질기게 묻는 채도하를 현서가 끊어내듯 불렀다.
“우리가 둘이 앉아서 식사하게 생겼어요?”
거절당할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 도하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다소 초연한 듯 보이기도 했다.
자존심이 센 사람이라 저게 정말 초연한 건지, 초연한 척 부단히 애를 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긴. 나랑은 차 한 잔도 하기 싫은 이 원장님이 식사를 같이할 리는 없겠죠.”
그는 여유롭게 웃어 보이기까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바쁘신 이현서 원장님이 바라시는 대로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기회는 또 만들면 되죠.”
“그럴 기회는 없을 거예요.”
“아니요, 있을 겁니다.”
현서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당당한 건 알고 있었지만 원래 이렇게 낯짝이 뻔뻔한 남자였나?
“안녕히 가세요, 채 전무님.”
더는 말이 통하지 않을 거 같아 현서는 그를 내쫓듯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도 채도하는 피식 웃었다.
속도 없는 사람처럼 왜 저래.
현서는 외면하듯 시선을 휙 돌려버렸다.
“다음에 봐요. 이 원장님.”
너무나 짧은 미팅에 도하는 아쉬운 마음을 어쩌질 못했지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시선을 돌린 그의 전처는 문이 닫히기까지 끝내 그의 얼굴을 봐주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온 도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할 일도 많아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집무실로 복귀해야 했건만 그는 느린 발걸음으로 입구를 향해 유유자적 걸어갔다.
어쩐지 시린 눈으로 송화궁의 전경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난번에도 방문했었지만 그때는 무신경하게 지나쳤었던 풍경이었다.
이제는 이 송화궁이 이현서의 작품이라는 걸 알고 난 다음이라 그런 걸까. 보이지 않던 소소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웅장하게 늘어선 나무들뿐 아니라 곳곳에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소담한 꽃들까지. 현서의 성격상 허투루 지나친 건 없었을 거란 걸 안다.
그녀의 애정이 묻어났다 생각하니 송화궁이 유독 더 아름다워 보였다.
“어? 채도하 전무님?”
감상을 깬 건 이제는 그리 반갑지 않게 된 목소리였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돌담길을 따라 루카스 유 대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 유 대표님. 안녕하세요.”
반색을 보이는 거래처 대표에게 어쩔 수 없이 인사를 건네지만 전처럼 마냥 호의적이긴 어려웠다.
정중함은 몸에 뱄으나 그렇다고 가식을 떨지는 못하는 성격이었다.
“채 전무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속도 모르는 루카스 유는 걸음도 멈춰선 채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현서를 만나러 왔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서 도하는 적당히 상대했다.
“볼 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오셨는데 왜 저한텐 연락 안 하셨나요. 오신 김에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지. 아, 곧 점심시간인데 시간 맞으면 같이 식사라도 하실까요.”
“아닙니다. 이후 일정이 많아서요.”
도하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고는 루카스가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전 이만.”
끝까지 정중함을 잃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인 도하는 잠깐 멈췄었던 걸음을 다시 뗐다.
“아, 예, 그럼 들어가세요.”
루카스는 하릴없이 인사와 함께 그를 보내주었다.
잠깐의 시간 낭비도 허용 못 하는 사람마냥 가버리는 도하의 뒤통수를 보며 루카스는 들리지 않게 구시렁댔다.
‘너만 바쁘냐?’
그러나 이내 대수롭지 않게 그는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갔다.
도하는 아까와는 달리 바삐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발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루카스 유는 어딜 가는 거지?
예전 미팅 때 느꼈던 불쾌한 기분이 다시금 올라와서 뒤를 돌아보니 기분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저쪽은 원장실로 가는 샛길인데.
설마……. 현서랑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인가.
“저, 유 대표님!”
도하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