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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녀와의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 (26/92)


#26. 그녀와의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
2022.06.30.


어떤 종류의 돈이건 진성이 주는 돈은 받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그게 마땅한 권리에서 오는 돈일지라도.

그 집안과 아이와의 인생을 분리하느라 양육비는 커녕 위자료도 포기할 만큼 모든 걸 내던지고 나왔다. 철저히 자신의 힘으로만 기르고 싶어서.

채 회장님이 주신 진성 주식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서하를 생각해 주시는 채 회장님의 마음을 내칠 수가 없어서 받아두었지만,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엔 채도하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루카스는 현서가 대어를 놓칠 것 같아 안타깝다는 듯 얼굴을 가까이 기울이며 속삭였다.


“이 원장,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이럴 거면 특허를 왜 내.”

그때 현서에게 가까이 붙어 있는 루카스의 모습을 본 도하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움직거렸다.

다른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 붙이는 이현서의 모습이라니. 그 모습이 그에게는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저런 그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이 있었어도 워낙에 그녀가 철벽처럼 쳐내는 바람에 가까이 지내던 남자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야, 유 대표님. 꼭 돈 때문에 특허를 낸 것만도 아니야. 특별함을 부여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더 큰 이유야.”

현서가 루카스를 보며 조곤조곤 대꾸하자 도하는 눈썹을 설핏 올렸다.

또 하나의 거슬리는 광경이 신경을 긁었다.

현서가 루카스 유에게 반말을 한다?

저쯤 되면 현서 역시 루카스 유를 각별히 친한 사이로 여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묘하게 불길한 기분이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도하는 표정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유 대표님 말대로 조금 더 생각해보시고 결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에 다시 말씀하시죠.”

“그러세요, 원장님. 저희가 계약서 보내드리기 전까지 좀 더 생각해보세요.”

연구소장도 거들자 현서도 일단 이 대화는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어차피 계약서에 무료라고 기입하면 될 일이니.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 뒤 몇 가지 안건이 간단하게 오갔고 미팅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연구소장이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 운을 뗐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전무님,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모두의 시선이 도하에게 몰렸다. 현서 역시 그를 무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도하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생각했다.

3년 만인데…….

미친놈처럼 찾아 헤매다가 겨우 만나게 된 게 이 미팅 자리인데, 끝이 나버렸다.

그는 잠깐의 고민 끝에 손목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아직 조금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오늘 저녁, 시간들 되시면 함께 식사하러 가실까요?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제가 모시겠습니다.”

조금 더 그녀와의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당장에는 이것뿐이었다.

마침 업체 간에 만족스럽게 일도 성사되어서 자연스레 이런 제의를 하기에 긍정적인 분위기이기도 했다.

다행히 루카스도 거기에 호응했다.


“오, 저는 좋습니다. 가시죠!”

다른 직원들도 표정이 밝았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역시나 단번에 염려스러운 표정이 되던 현서는 루카스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힘들 것 같은데……. 오늘은 일찍 가 봐야 할 거 같아.”

“왜? 혹시 도혀…….”

“루카스!”

현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루카스의 입에서 아이의 이름이 나오려 하자 기겁을 해서 황급히 루카스의 말을 잘랐다.


“아,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 갈 수 있을 것도 같네. 나도 참석할게.”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현서는 도하를 흘끔 쳐다보았다. 역시나 그는 빤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래? 잘 됐다. 내 차로 가자, 현서.”

“응.”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바짝 세우고 있던 도하는 두 눈을 크게 치뜨고 있었다.

두 사람이 둘이서 대화할 때는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현서가 유 대표를 루카스라고 불렀고, 유 대표는 현서라고?

연속적인 불안함이 그를 덮쳤다. 스스로 제어하질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을 삭이기 위해 도하는 앞에 있던 생수를 따서 들이켰다.

생각해보면 두 사람이 친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송화궁의 원장이 될 정도면 GLP 오너가와 보통 사이가 아닌 게 당연했다.

그 사실을 납득하자 하염없이 초조해질 것만 같았다. 그 오너가와의 돈독한 친분이 저 남자와의 관계로 인한 것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라게 될 뿐이었다.

주차장으로 걸어 나가는 길에도 도하는 두 사람의 뒤에서 몇 걸음 떨어져 걸으며 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곤조곤 다정한 톤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루카스가 차 문을 열어주고, 현서가 타고, 문이 닫히기까지 도하는 그녀에게 가는 눈길을 막을 수가 없었다.

출발한 차가 그의 앞을 지나칠 때는 조수석 창문으로 현서와 언뜻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멀어지는 남의 차 뒤꽁무니나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한 건 알겠는데도 등신처럼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급기야 뒤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었다.


“전무님도 출발하실까요?”

“예, 그러죠.”

 

***

특별전형. 이게 학교 입학에만 있는 게 아니다.

영숙은 혜미까지 두 사람이 송화궁 죽센터 회원으로 가입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모집 기간도 아닌데 이건 횡재한 거지.’

부리나케 등록을 한 뒤 오늘 혜미를 데리고 송화궁으로, 그야말로 입궁을 하러 가는 중이었다.

영숙의 목이 깁스를 한 사람처럼 꼿꼿했다.


“거기 가면 정말 천국이 따로 없다. 너도 받아 보면 지금보다 나한테 더 고맙다고 할 거다.”

영숙은 송화궁을 가는 내내 자랑을 쉬지 않고 했다. 남들이 들으면 한 백번을 다녀온 사람처럼 아는 척을 했다.

송화궁에 도착한 혜미는 영숙이 남의 험담은 잘해도 다른 표현력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영숙의 설명은 이곳의 아름다움을 10분의 1도 표현하지 못했다.

각색의 아름다운 꽃과 고운 선의 전각들. 돌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란 없는 조화로움.

함부로 발걸음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고귀함이 이곳에 깔려 있었다.


“여기 들어오니까 제가 중전마마가 된 것 같아요.”

“니가 중전이면 나는 뭐냐?”

“어, 어머니는 대왕 대비마마시고요.”

“그래. 우리, 마마들처럼 대접받으러 가보자.”

두 사람은 곧 안내원을 따라 죽 센터로 들어갔다.

깍듯이 인사를 하며 아는 척을 하는 직원을 보니, 영숙과 혜미는 송화궁 회원이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오늘 처음 등록하셨죠?”

“얘는 오늘이 처음이고 나는 두 번짼데.”

영숙은 먼저 한 번 온 것을 직원이 기억하지 못하자 기분이 별로였다.


“고객님, 등록하신 게 처음이시라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아, 하하……. 회원등록은 오늘이 처음이지.”

영숙이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 사람을 쫄게 만든단 말이야. 이게 뭐라고.


“일단은 피부 타입에서부터 머릿결 타입을 테스트하시게 될 거고, 한의원에서는 체질과 건강 관련된 부분들을 검사하시게 될 겁니다.”

“확실히 다르네요. 체질까지 따져서 관리해주나 봐요.”

잔뜩 들뜬 혜미가 영숙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과연 다른 피부샵과는 차원이 다른 세심한 대접을 받으며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피부뿐만 아니라 안마, 물리치료, 침술, 운동 치료까지 정말 다시 태어나는 것만 같은 대접이었다.


“죽 회원 대접도 이런데, 매화는 얼마나 좋을까? 강 여사에게 계속 잘 보여야겠어.”

“저도 너무 감사하다고 꼭 전해주셔요.”

“그래. 그럼 생각난 김에 감사하다고 문자 한 번 더 보내야지.”

룸을 나가기 전 영숙은 강 여사에게 문자를 한 뒤 옷을 입었다.


“어머니, 말씀들은 대로 너무 좋아요. 내일 바로 또 오면 안 될까요?”

“주혁이 돈 없다고 앓는 소리 하던데, 괜찮겠어?”

아무리 죽 센터라도 매일 오기엔 만만치 않았다. 카드는 여전히 채 회장의 감시하에 쓰는 처지였기에.


“에이, 주혁 씨가 앓는 소리 안 할 때도 있어요? 저희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러니? 그럼 또 예약해보자. 저기 로비 들러서 차나 한잔하고 갈까?”

“네, 좋아요!”

영숙이 혜미와 막 죽 센터 로비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강 여사의 답장이 와 있었다.

문자를 읽은 영숙은 신바람이 나서 입이 귀에 걸렸다.


“어머어머! 세상에! 얘, 혜미야! 우리 오늘 매 센터 구경하게 생겼다!”

“우와, 정말요?”

두 사람은 그날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매 센터로 향했다.

***

예약한 룸에 들어가 앉자 GLP의 팀장이 가장 싱글거렸다.


“와……. SH 회식 스케일 크네요.”

“오늘은 전무님 덕분에 그렇죠.”

SH의 연구소장의 말에도 GLP 팀장은 넉살 좋게 받아쳤다.


“그래도 인원도 적지 않은데 이렇게 고급 일식집에서…….”

“생참치 해체 쇼도 있대요.”

다른 즐거운 사람들과는 달리 현서는 앉자마자 좌불안석이었다. 왼쪽에는 루카스, 건너편에는 채도하가 앉아 있었다.

현서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정면에 앉은 채도하가 아까부터 그녀의 얼굴과 루카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데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루카스가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망정이지, 정말 저런 수상한 눈빛으로 사람을 쏘아보면 어쩌자는 건지.

음식이 나오기 전 도하는 테이블 위 찻주전자를 들어 건너편 현서의 빈 찻잔에 따뜻한 녹차를 따라주었다.

현서는 눈을 힐끔 들어 도하를 쳐다보았고, 마침 녹차가 마시고 싶었던 루카스는 제 잔에도 따라주겠거니 하고 기다리며 도하 손에 들린 주전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하는 담담한 얼굴로 누구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단순한 루카스는 속으로 그저 생각했다.


‘아하, 레이디를 잘 챙기는군,’

오히려 거기에 더 곤란함을 느끼는 건 현서였다.


‘이 사람이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감사합니다…….”

그래서 현서는 불퉁한 인사와 함께 직접 찻주전자를 들어 루카스의 잔을 채워주었다.


“고마워, 이 원장.”

임원급 접대도 아니고, 애초에 이렇게 비싼 곳에서 식사를 베푸는 것도 좀 이상했다.

더구나 참치는 현서가 아주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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