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더는 그의 아내가 아닌 이현서
(25/92)
25. 더는 그의 아내가 아닌 이현서
(25/92)
#25. 더는 그의 아내가 아닌 이현서
2022.06.27.
느리게라도 따라오던 걸음이 멈추자 이상했는지 루카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 원장님, 뭐해? 빨리 와.”
루카스의 부드러운 미소에도 현서는 얼어붙은 표정을 어쩌질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돌아서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응.”
그러나 현서는 천근 같은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걸어갔다. 이 일이 GLP 한국지사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유 대표님.”
“응?”
돌아보는 루카스에게 현서가 잠시 머뭇대다 물었다.
“SH 코스메틱, 진성 그룹 계열사야?”
“어, 맞아. 왜?”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키지 않으려 현서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어서 들어가자.”
곧 공장장이 열어주는 문으로 루카스가 먼저 들어가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채 전무님, 안녕하세요.”
루카스의 등 뒤에서 한두 걸음 떨어진 채 현서는 그들의 만남을 지켜보았다. 루카스가 전남편 채도하에게 아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모습이 실로 생소하게 느껴졌다.
“다시 뵙네요, 유 대표님.”
이런 식의 조우를 예상하지 못했던 건 채도하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아직 그녀를 보지 못한 게 분명한 태도였으니.
“아, 채 전무님께 저희 송화궁 원장님 소개해 드려야죠.”
루카스가 제 뒤에 가려져 있는 현서를 소개하려 몸을 돌리며 비켰을 때, 온전히 트인 시야에 서로가 들어왔다.
도하는 루카스와 인사를 나눌 때 보이던 호의적인 표정 그대로 그의 뒤에 드러난 여자를 보았다.
이내 그의 점잖던 눈길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도하는 눈을 크게 치떴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신기루인가.
헤어지던 날의 마지막 모습이 신기루 같았던 여자가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현서가 아니라 이현서를 닮은 사람이라는 거짓말이 차라리 더 믿길 만큼, 절대 찾을 수 없었던 여자가.
그러나 지금 여자의 표정을 보면 그녀는 이현서일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곤두박질친 분위기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루카스가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송화궁을 너무나 잘 총괄해주고 있는 이현서 원장이죠.”
남의 소개를 통해 이현서라는 이름 세 글자를 듣고 나니 더욱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았다.
정말 이현서였다.
이제 더는 그의 아내가 아닌, 한때 아내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여자, 이현서였다.
그토록 찾아 헤맸는데.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한국에서 그녀를 찾는 동시에 대만에도 사람을 보내 샅샅이 찾던 세월이 지난했다.
이현서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던 건가.
미국과 대만 등에 기업이 있는 GLP. 그중 송화궁의 본점 격인 센터가 대만에 있다고 했다.
그럼 3년 전부터 GLP와 인연이 있었던 건가.
냉수를 끼얹은 듯 싸늘해진 공기 속에서 루카스의 호탕한 목소리가 소개를 이어갔다.
“이 원장, 이분이 SH 코스메틱 채도하 대표님이셔.”
현서는 도하를 올려다볼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범한 소개 시간치고 침묵이 길어지자 현서를 보는 루카스의 표정이 약간의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넋이 나가 있던 현서는 결국 도하와 한걸음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와 먼저 입을 열며 손을 내밀었다.
“이현서…… 입니다.”
멍한 표정의 도하는 그에게 악수를 청하는 현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철저한 타인이 되어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그의 전부인을.
아무래도 그녀는 전남편과 낯선 사이를 자처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중책을 맡고 있는 그녀의 새로운 사회생활에서의 역할이 전남편과의 과거 인연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껄끄러운 사이를 그들 앞에서 드러내 봐야 좋을 게 없겠지. 도하는 그녀가 타당하다 납득하려 애썼다.
그러나 자신 역시 그녀 앞에서 낯선 타인을 자처하여 말을 떼는 순간에 가슴 한편이 욱신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채도하입니다.”
현서는 그녀에게 맞추어 모른 척 받아주는 도하를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모른 척해주어 다행이라 해야 하나.
악수를 위해 내민 그녀의 손을 그가 잡았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에 파묻히듯 잡히자 그가 손을 꼭 잡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느껴지는 악력도 여전했다.
보통의 악수에 비해 손을 잡고 있는 시간이 좀 길어지도록 도하가 꾹 잡고 그대로 있자 현서는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표정 없이 손만 조금 비틀어 빼냈다.
그 뒤론 나머지 직원들과도 안부 인사를 나누느라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에게서 잠시 떨어졌다.
그리고 곧 공장 직원의 안내로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는 둘만의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마냥 밝은 얼굴이었다.
서로와 함께할 사업에 대한 기대치로 그들에겐 오로지 긍정적인 기운만이 흘러넘치고 있을 뿐이었다.
둘을 뺀 나머지 사람들의 대화들이 오가는 동안 루카스의 옆에 앉아 있던 현서는 차분한 얼굴로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따가운 시선에 이따금씩 눈동자를 돌리면 어김없이 채도하의 시선이 그녀를 찌르고 있었다. 칼날보다 더 예리한 시선에 얼굴이 뚫어질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만큼 채도하는 그녀에게서 끈질기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들뜬 분위기에 묻혀 아무도 그런 걸 눈치채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때 GLP의 R&D 팀장이 SH의 연구소장에게 오늘 용건 중 하나를 언급했다.
“아, 그리고 소장님, 여기 계신 이현서 원장님이 그 말씀하신 원료의 권리를 가진 출원인입니다.”
순간 도하의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연구소장은 현서를 향해 진심 어린 반색을 띤 얼굴로 웃었다.
“여기 계셨네요! 어렵게 찾게 되니까 더 반갑습니다, 원장님!”
연구소장이 동조를 구하듯 도하를 슬쩍 바라보았지만 도하는 얼빠진 놈처럼 한동안 현서의 얼굴만 빤히 보고 있었다.
이제야 기시감이 풀렸다. 그러니까 그 원료는…….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소장님, 감사해요. 저도 반갑습니다. 예전엔 저만 알고 있던 저만의 좋은 원료였는데 GLP에 이어 SH에서까지 널리 활용해주시니 저도 뿌듯합니다.”
잔잔한 미소를 띤 현서가 연구소장에게 하는 말이 아득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오빠, 나 몇 가지 원료를 개발해봤어요. 나만의 재료로 특허도 내려고 해.’
그 원료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모르는 원료인 듯하면서도 어디서 들어본 듯도 했던 이유가 그래서였다. 기억의 근원지를 알 수 없어 가물가물했던 그 느낌이 이제야 또렷해졌다.
도하는 아무도 모르게 작게 탄식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아내가 스치듯 했던 그 말을 더 진지하게 들었더라면. 그랬다면 이렇게 헤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현서와 연구소장은 원료에 관한 이야기로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다. 비록 전남편과의 조우가 불편해 보였지만 그녀는 프로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특허까지 낼 정도로 탁월한 원료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너무나 노련해서 예전에 그가 알던 현서와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
그러나 도하는 그녀가 처음 이혼을 말하던 날 그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오빠가 아는 내 모습이 어떤데요?’
아마도 지금 현서의 모습에서 그녀가 원했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쩌면 이게 너의 본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그녀에게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다른 어느 때보다도 그녀는 더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일까. 내가 너무 늦어버린 걸까.
도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줄 화장품 사업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그녀는 이미 그녀의 꿈을 이룬 것이다.
송화궁의 퀄리티 높은 그 제품들이 다름 아닌 그녀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전부터 원하던 천연 화장품을 이미 개발한 것이었다.
현서야. 이 상황을 어쩌면 좋을까.
SH 코스메틱은 네게 주려고 만든 회사인데, 정작 너는 내 옆자리가 아닌 상대 회사 직원으로 앉아 있는 이 돌아버릴 것 같은 상황을 말이야.
현서에겐 다행인 건지 도하의 회사 사람들 중 그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많이 없었다. 늘 사려 깊었던 그녀는 일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또 직원들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방문도 자주 하지 않았었다.
본사에서도 비서들이나 오너가의 중요 행사에나 초대될 법한 임원들 몇 명만이 그녀의 얼굴을 알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새로 생긴 계열사 직원들이 그녀의 얼굴을 알 리는 만무했다.
전남편이라곤 말 못 해도 지인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을까.
그녀에게 채도하란 남자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그녀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하는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로열티로 원하시는 금액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그녀가 애써 개발했던 결과물이었다. 최대한으로 존중해주는 게 마땅하다.
현서는 그 말에 시선을 돌려 도하를 보았다. 도하가 그녀를 빤히 보며 정중하게 딜을 해왔다.
“얼마가 되었든 저희가 맞춰드리겠습니다. 이현서 원장님께.”
연구소장은 무조건 사용료를 맞춰준다고 하는 대표의 말이 우려가 되는지 도하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애초에 대표가 직접 이 안건을 꺼내는 것도 의아했을 터다.
그를 잠시 바라보던 현서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받지 않을게요, 로열티.”
도하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현서 곁에 있던 루카스도 급하게 그녀를 막아섰다.
“이 원장. 이건 이 원장 개인에게도 좋은 기회야.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 봐.”
뼛속부터 장사치였던 루카스가 아깝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현서는 단호했다.
“유 대표님. 제가 송화궁에서도 사용료를 받지 않고 있듯이 저는 SH 코스메틱에서도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루카스는 그 말에 오히려 더 놀랐다. GLP야 현서와 가족처럼 돈독한 사이였던 제 어머니 그레이스 박의 회사였기에 현서가 무상으로 허가해줬다지만, SH는 왜?
SH에서는 더 큰 규모로 활용될 수도 있으니 그만큼 팔기 좋은 업체가 어디 있다고.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도하 역시 조금은 염려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예.”
현서는 도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망설임 없이 답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진성과 돈으로 엮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