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예전 모습 그대로
(24/92)
24. 예전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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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예전 모습 그대로
2022.06.23.
오늘따라 유난히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있던 혜미는 챙이 큰 모자를 쓰고 라탄 가방까지 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혁도 옷차림이 가벼웠다.
머뭇대는 혜미 대신 주혁이 대답했다.
“아아, 엄마, 주말이잖아!”
“주말인데 그게 왜?”
“왜긴! 엄마한테 아린이 보여주려고 왔지. 주말 동안 할머니랑 오붓하게 보내라고.”
“오붓하게? 너네 부부는 뭐하고?”
눈을 치켜뜬 영숙이 묻자 주혁이 입가를 싹 올리며 살살 웃었다.
“저 사람하고 일박이일 속초나 다녀오려고. 리조트 스위트 예약했어.”
“뭐라고? 야, 그럼 애를 데리고 가야지. 나한테 맡기면 안 되지.”
불퉁한 영숙의 말에 주혁은 주특기인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도 알다시피 아린이가 나가서 자면 잠을 못 자고 호텔이 떠나가라 울어. 근데 신기하게 여기 오면 잘 자잖아. 엄마가 좀 봐주라,”
“안 돼, 못 봐! 데리고 가.”
“에이, 엄마가 보는 것도 아니면서. 서산댁보고 보라고 할 거 내가 다 알거든.”
“그럼 너네 도우미한테 맡기면 되잖아.”
“엄마, 우리는 상주하시는 분이 없어, 토요일에는 다 출근 안 하신단 말이야.”
“어머니, 저희가 오다가 선물 사 올게요. 요번만 부탁드려요, 네?”
혜미가 살살 웃으며 영숙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아이씨, 안 봐주면 나 이제부터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나 어렸을 때도 엄마 나 다른 집에 맡겨 놓고 놀러 가서 내가 거기서 얼마나 구박받고 힘들었었는데.”
영숙은 주혁이 어릴 때 이야기를 하자 기가 죽었다. 몇 살 더 먹은 도하는 혼자 두고 어린 주혁은 친척에게 맡겨두고 나돌았던 건 사실이었다.
“알았어, 요번만 봐 줄 테니 올 때 선물 사 와.”
영숙이 협박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자 주혁과 혜미는 환한 얼굴로 기뻐했다.
“어머니, 감사해요!”
부부는 아린이를 끌어안고 양 볼에 뽀뽀를 해대더니 아이를 팽개치듯 내려놓고 사라졌다.
“현서네 부부는 한집에 같이 살면서도 서하를 맡기고 놀러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저것들은 뻑 하면 아이를 맡기려고 해.”
곰 같은 현서랑 비교될 때가 다 있을 줄이야.
.
.
.
엄마 아빠가 사라지자 멍하니 있던 아린이 엄마 아빠를 찾으며 정신없이 울기 시작했다.
“아아악, 아악!”
무슨 아이가 울어도 꼭 악을 써대며 울고 있다. 영숙은 머리가 지끈거려 곧장 서산댁을 불렀다.
“서산댁, 서산댁!”
서산댁이 영숙이 부르는 소리에 다급하게 뛰어왔다.
“예, 사모님.”
“아린이 좀 데리고 가. 울음 좀 그치게 해. 오늘내일 아린이 여기 있을 거니까 그런 줄 알고.”
곤란한 얼굴을 하던 서산댁은 빽빽 우는 아이를 데리고 어르고 얼렀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이는 목이 쉬도록 울고 있었다.
“아 시끄러워서, 정말. 아이 하나 못 달래고 뭐해. 돈 받고 잘하는 게 뭐야, 정말.”
“사모님, 아린이가 졸린가 봐요.”
“졸리면 재우면 되지. 어떻게든 재워봐.”
“열심히 재워 보고 있는데 안 자네요.”
“얜 대체 왜 이렇게 우는 거야? 우리 집안엔 이런 애가 없었던 거 같은데. 혜미 고걸 닮았나…….”
팔짱만 끼고 있던 영숙은 서산댁에게 안겨 있는 아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아악, 엄마, 엄마!”
“아린이가 안 자고 엄마만 찾네요. 아무리 달래도 울기만 해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서산댁. 얘 콧물 나오는 거 같은데 그 콧물약 좀 먹이자.”
“네? 콧물이요?”
서산댁이 문득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 왜. 먼저 먹다 남은 콧물약. 감기 걸렸을 때 그거 먹고 잘 잤잖아.”
“아린이 콧물 안 나오는데요?”
서산댁이 찜찜한 얼굴로 극구 말리고 들었다.
“내가 봤어, 콧물 나오는 거. 어디 있어? 내가 가져다 먹일게.”
“제, 제가 할게요, 사모님.”
서산댁은 아린을 안은 채 주방으로 걸어왔다. 거실에 있는 영숙을 흘끗 본 그녀는 장을 열었다 닫으며 콧물약을 먹이는 척만 했다.
그리고 대신 달콤한 주스를 먹이자 아린이 울음을 그쳤다. 쉽게 잘 것 같진 않았지만 우선 울음을 그쳤으니 햇빛을 쏘여준 뒤 다시 재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린이, 아줌마랑 정원에 나가서 조금만 놀다 자자.”
서산댁은 아린과 정원으로 나간 뒤 현관문을 닫았다.
‘후……. 심장 떨려라. 저 정신 나간 여편네 때문에 별걸 다 하네.’
거실 창을 한번 힐끔 살핀 그녀는 조심스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터치했다.
‘녹음이 제대로 되었으려나.’
***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진 인연이었다.
채도하 전무가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는 계열사 SH 코스메틱에서도 자체적인 천연 제품 라인을 개발 중에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GLP와 협업하여 송화궁 제품부터 출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송화궁 제품의 스펙이 워낙 더 좋기 때문에 판매가 원활하게만 이루어진다면 SH 브랜드 마케팅에도 좋은 상호작용을 할 터였다.
“전무님. GLP 측에서 용기 테스트 끝내고 검토해 본 결과 계약 진행하고 싶다고 합니다.”
지난 송화궁에서의 미팅 때도 함께 했던 담당자와 연구소장이 도하의 집무실을 찾았다. 다행히 긍정적인 소식을 가지고서.
“역시 송화궁 제품과도 기능이 잘 맞았던 모양이군요.”
“예. 다음 주에는 현장미팅도 잡혔습니다. 이제 양쪽 변호사 불러서 세부사항 살펴보고 계약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빠르게 진행되니 좋네요.”
“루카스 유도 저희를 만나서 행운이라고 했답니다. 참!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전무님!”
문득 연구소장이 표정에 더욱 화색을 담아 전했다.
“그 특허 출원인을 알 수 없던 원료 말입니다. 다행히 잘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어떻게 진행된 거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도하가 눈썹을 슬쩍 올리며 물었다.
“GLP 제품에서 워낙 다루는 천연 원료가 다양하다 보니 혹시나 해서 거기 R&D 팀장에게 문의를 해봤는데, 마침 거기서도 사용하는 원료라고 하더라고요.”
“아, 잘 됐군요. 우리 문제까지 이렇게 도움을 얻네요.”
답답했던 문제 하나가 해결되자 도하도 안도감에 젖어 들었다.
“그 원료는 다음에 만날 때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다음에?”
“예. 특허 출원인이 GLP 직원이랍니다.”
“직원이라고요? 멀리 있지 않았네요.”
도하는 돌아가는 상황이 순조롭다 못해 흥미롭다고 느껴졌다.
“예, 저희가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 현장 미팅 때 특허 출원인과 동행하겠다고 합니다.”
“출원인이 직접 말이죠? 원료에 대한 애정이 큰가 보군요.”
“예. 그전부터 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허인데 GLP에 권리를 양도한 것도 아니라고 하네요. 그리고 유 대표님도 방문하신답니다.”
“유 대표도 오는군요. 그럼 윤 비서에게 현장 미팅 일정 공유하세요. 그리 멀지 않으니까 시간 맞으면 나도 갑니다.”
“예, 전무님.”
SH의 사업은 그의 생각 이상으로 잡음 없이 잘 흘러가고 있는 듯했다.
***
“어서 오십시오, 전무님.”
현장 직원이 마중 나와 채도하 전무를 맞이했다. 그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가며 도하가 물었다.
“루카스 유 대표도 함께 왔습니까?”
“예, 유 대표님도 방문하셔서 지금 공장장님과 연구소장이랑 함께 돌아보고 계십니다. 시간 거의 되었으니 곧 회의실로 오시겠네요.”
“알겠습니다. 기다릴게요.”
도하는 직원이 안내해주는 대로 자리에 앉으며 대꾸했다.
오늘은 그 베일에 싸인 까다로운 특허 출원인도 함께 왔다고 하니 미팅이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도하는 자신이 이 코스메틱 사업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을 수 있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러나 그만한 동기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이현서라는 큰 이유가.
도하는 언젠가 현서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 사업체를 선물하고 싶었다.
이렇게 SH가 고급 천연 제품 브랜드로 가치를 높이게 된다면……. 그게 현서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하면서 도하는 바쁜 와중에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이 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다.
두 업체의 지난 첫 미팅이 이루어지기 전 단계에서부터 도하는 느낌이 좋았다.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있는 송화궁의 명성에는 그곳에서 쓰이는 제품도 한몫하고 있다는 게 조사 결과였었다.
그렇지 않아도 SH의 천연 제품을 위해 송화궁 제품을 벤치마킹 시도할 만큼 그 퀄리티가 인상적이었는데 마침 GLP 한국지사에서 그 제품을 올해 안에 대량 생산해줄 업체를 물색 중이었기에 협업을 하게 되었다.
GLP에게 배합된 원재료를 넘겨받아 제조와 유통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아, 전무님. 저기 거래처분들이 오시네요.”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데 직원의 말에 도하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루카스와 R&D 팀장을 따라와 함께 공장을 탐방한 현서는 비록 바쁜 하루였지만 기분이 좋았다.
송화궁이 오픈하기 전부터 R&D 팀과 함께 천연 화장품 개발에 지극한 관심을 쏟아 넣었던 만큼 지금의 진행은 그녀에게도 유의미한 일이었다.
루카스의 말대로 과연 이곳의 설비들을 확인한 결과 송화궁 제품의 보급화를 위해 적절한 업체였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로도 기분이 들뜨고 있었다. 자신이 특허 출원한 원료를 이 업체가 사용하기 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신기한 기분이 들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혼자만의 원료였다가 송화궁 제품을 개발하게 되면서 넣게 된 원료였는데 그걸 원하는 곳이 또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공장 돌아보기를 마치고 회의실로 향하는 길 내내 그녀는 입매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앞장서는 공장장을 루카스와 팀장이 조곤조곤 대화하며 따라가고 있었고 현서는 그들과 몇 걸음 떨어진 채 여유로이 느린 걸음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벽 안으로 회의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한 사람의 얼굴이 먼저 보였고, 앞서 걷던 남자들에게 시야가 가려져 나머지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다가 시야가 걷히자 그 사람의 옆모습도 드러났다.
그리고 그때 현서는 두 다리를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몸은 반사적으로 굳었는데 심장만은 펄떡이며 발밑까지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저 사람이.
3년이 훌쩍 지나는 시간 동안에 그토록 부단히 달아나려 애썼던 인연이었다. 마치 시간이 돌고 돌아 결국 이 인연을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놓은 듯했다.
그곳에는 채도하가 앉아 있었다. 예전처럼 정갈했던 그의 모습 그대로.
익숙하지만 이제는 누구보다도 낯설어져 버린 전남편의 옆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