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어떤 아저찌
(23/92)
23. 어떤 아저찌
(23/92)
#23. 어떤 아저찌
2022.06.20.
남자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다른 두 사람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도현은 그저 순진한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씨익 웃었다.
“안녀하세여?”
도현은 요즘 한창 아무나 보고 친절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는 아이였다.
굵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아이의 인사에 화답했다.
“안녕.”
도하는 자신을 티 없이 무구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고개가 꺾일 듯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자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무릎을 굽혀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발아래 떨어진 종이비행기를 주웠다. 공중에 날리자 종이비행기는 포물선을 길게 그리며 시원스레 날아갔다.
“우아, 잘 날아간다! 꺄하하!”
도현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아이의 청아한 웃음소리에 도하의 입가가 더욱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런 미소는 그에게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요즘엔 웃고 살 일이 통 없는 것 같았는데.
도하가 아이와 가까이서 눈을 맞추자 까만 구슬 같은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토실하니 뽀얀 볼이 만지고 싶게 생겼다.
“아저찌, 잘 날린다! 또 해바! 응?”
아무런 경계 없이 시선을 맞춰오는 커다란 눈망울이 그의 걸음을 주저하게 했다. 거절 않고 한 번 더 비행기를 날려주려고 대답을 하려던 때였다.
“도현아. 아빠가 모르는 사람이랑은 얘기하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아이의 눈빛과 달리 경계심으로 타오르는 어른의 눈빛이 그에게 꽂혀 있었다.
“이 아저찌 비행기 진짜 잘 날려!”
그게 그렇게 신기했는지 해맑게 자랑하는 도현을 향해 루카스는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낯선 남자 곁에 서 있던 도현을 번쩍 안아 올렸다.
“우리 도현이 이분이랑 무슨 얘기 했어?”
보호하듯 아이를 품에 꼭 안고선 루카스가 물었다.
보안이 철저한 송화궁 안인 데다가 식수대가 몇 걸음 앞이라 시선 안에 있는 거리였는데도 잠깐 사이에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경계심이 들었다.
“도현이 비행기가 이 아저찌랑 부딪쳐쪄.”
“그랬어?”
그제야 루카스는 경계심을 약간 풀며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실례를 했네요.”
낯선 남자는 아이의 보호자가 경계 어린 언행을 보였음에도 딱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여유로운 태도로 잠잠한 미소까지 보였다.
“괜찮습니다. 아이가 참 귀엽네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빈말이 아니었는지 웃음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한 번 더 아이를 바라보곤 발걸음을 뗐다.
루카스에게 안긴 도현은 다시 갈 길을 걸어가는 키 큰 아저씨를 보며 아쉬운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아저찌가 비행기 또 날려주면 좋게쪄…….”
“아빠가 날려줄게.”
루카스는 도현을 팔에 안은 채 떨어진 비행기를 주우러 가며 방금 지나간 남자 일행을 다시 쳐다보았다.
고객들인가.
여성회원들이 많긴 했어도 남자 손님들도 있긴 했으니.
에스테틱 서비스를 제외하곤 요즘엔 남자 고객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이였다.
요즘엔 귀해진 각종 궁중 요리를 좋은 퀄리티로 맛볼 수 있는 한정식 음식점만 해도 빠르게 유명해졌기에 더욱 그러했다.
전각 뒤로 사라져버린 그 일행을 왜인지 의아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낭랑한 목소리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루카스. 뭘 그렇게 봐?”
돌아보니 현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엄마!”
“도현이, 삼촌이랑 잘 놀았어?”
현서는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도현을 건네받아 안으며 물었다.
“웅. 어떤 아저찌랑 비행기도 날렸져.”
“그랬어?”
어쩐지 신이 나 보이는 도현을 보며 현서는 웃으며 호응해주었다.
“고마워, 루카스. 난 이만 가볼게. 미팅 잘하고.”
서둘러 사라지려는 현서를 보며 루카스는 손을 들어 흔들었다. 미팅에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응. 연락할게, 현서.”
***
“어?”
송화궁 R&D 팀장과 함께 회의실에 들어서던 루카스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곁에 있던 팀장이 안에 와 있던 거래처 손님들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벌써 와 계셨네요. 반갑습니다. 이분이 저희 루카스 유 대표님이십니다.”
루카스는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 숙이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아까 도현과 함께 있던 남자와 그 일행이었다.
루카스는 개중에 도현과 비행기를 날렸다는 그 남자를 보며 반색을 표했다.
“안녕하십니까, 우린 구면이네요.”
“그러네요, 아까 그 아이 아빠가 유 대표님이셨군요.”
남자는 명함을 건네주며 정식으로 루카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SH 코스메틱 채도하입니다.”
“반갑습니다. 가장 젊으신 분이 SH 대표이사 채도하 전무님이셨네요.”
도하가 내민 손을 잡으며 루카스는 웃는 얼굴로 악수를 했다.
이어 함께 온 담당자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앉으시죠.”
테이블에 앉으면서 SH 코스메틱의 연구소장이 운을 뗐다.
“주신 제품을 분석하고 샘플링한 결과가 너무 좋았습니다. 덕분에 저희 전무님께서도 직접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셔서 이렇게 함께하시게 되었습니다.”
루카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도하를 보았다.
“제품은 최고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말씀드렸듯 저희 제품을 시중에 출시하기까지 여러 가지 까다로운 문제들이 걸려 있어서 저희도 고민이 많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저희는 현재 회원들을 위한 제품은 전부 수작업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중화를 위해 공장을 가동하려면 필수적인 제반 시설 몇 가지가 갖춰져야 합니다. 그런 공장을 찾을 수가 없어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SH 연구소장이 준비한 회사 소개서를 내밀며 말했다.
“그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이게 저희가 가동하고 있는 생산 설비입니다. 조만간 현장에서도 한번 뵙는다면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루카스는 소개서를 넘겨보며 제법 마음에 들어 흡족한 얼굴을 했다.
“제가 찾던 생산 라인과 흡사하군요.”
듣고 있던 도하가 대화를 넘겨받았다.
“직접 보시면 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원료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질지가 더 걱정입니다.”
“그 부분은 저희가 공장의 스펙에 맞춰서 조달할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천연 제품의 짧은 유통기간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루카스는 제품이 변질되지 않게 오래 보관할 용기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던 차였다.
“그 부분 역시 해결책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마침 지금 연구하고 있는 천연 제품 라인이 있어서 저희 연구실에서 거기에 맞는 용기를 먼저 개발했습니다. 샘플이 있으니 보여드리겠습니다.”
도하의 말에 연구소장은 준비해온 샘플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소재가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네요.”
“아마 기능은 더 마음에 드실 겁니다.”
연구소장이 화장품 용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자 루카스는 과연 매우 만족해했다.
재질의 표면도 아름답고 기능 또한 혁신적이어서 실험 성분표 결과와 같다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이만하면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루카스는 용기를 살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빠르게 저희 송화궁 천연 화장품으로도 테스트해 보겠습니다.”
***
주말은 정말 심심하다.
가뜩이나 친하지도 않은 채 회장님은 인사들과의 친목 모임으로 골프다 뭐다 바깥으로 돈다.
자신과 같이 노는 여편네들은 주말에는 자식 손주들과 시간 보낸다며 안 모인다.
영숙은 리모컨을 손에 들고 TV 채널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아, 그래. 나는 강 여사님한테 전화나 한번 해 봐야지.”
그동안 문자나 전화로 안부를 몇 번 물으며 연락을 주고받아왔다. 얼마 전에는 선물도 보냈는데 강 여사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궁금해졌다.
-여보세요.
“여사님? 저 한영숙입니다. 기억하시죠?”
다행히 오늘도 강 여사가 전화를 받았다. 영숙은 괜히 가슴이 막 두근거려 전화기를 들고 꾸벅 인사를 올렸다.
-아아, 기억하지. 먼저는 무슨 그런 귀한 선물을 보냈어. 그런 물건은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마워.
“호호, 저희가 거래하는 심마니가 있는데 여사님이 복이 있으신지 요번에 딱 맞춰서 심 봤다고 해서 제가 이건 여사님 몫이구나 하고 가져다드린 겁니다.”
-그래, 잘 먹을게.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꽤 괜찮은 선물도 했으니 조금은 용기 내어 부탁해볼 만하지 않을까.
“다름이 아니라 저, 송화궁에 들어가게 추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송화궁? 티오가 있으려나 몰라.
“그래도 여사님이 말씀하시면 안 되는 일이 있나요?”
-흠, 그래. 이 원장이 내 부탁은 또 들어주긴 할 텐데. 좋아, 내가 자네 가입시켜주라고 말할게.
“어머어머, 감사합니다!”
영숙은 뛸 듯이 기뻐서 자리에서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이제 거기서 자주 보자고.
“어떡해! 너무 좋아요, 여사님! 참참, 그런데 저……. 혹시 하시는 길에 한 자리만 더 봐주실 수 있나요?”
-두 자리나?
“네네! 저기, 제 며느리가 같이 가고 싶어 해서.”
혜미에게 큰소리쳐놓은 게 있다 보니 회원 못 만들어주면 체면이 안 섰다.
-그래? 둘째 며느리를 참 잘 챙기네. 소문에 큰 며느리는 그렇게 구박했다면서…….
“네에? 아, 아니에요. 다 오해라니까요. 누가 그렇게 악의를 가지고 헛소문을 퍼뜨리는 걸까요? 오히려 저희가 가진 것도 없는 애 며느리로 받고도 얼마나 잘 챙겨줬는데요.”
-그랬나? 아무튼 알았네. 그럼 두 자리 부탁해볼게.
“어휴, 감사드려요. 제가 꼭 보답할게요!”
-그럼 난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들어가 보겠네.
“예에, 주말 평안히 보내셔요. 다음번엔 송화궁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영숙은 기분이 하늘을 나는 듯 기뻤다.
“내가 무려 강옥희 빽으로 송화궁에 입성하게 되었다고! 이제는 아무도 나한테 후처라고 함부로 못 할 거야.”
그런데 그때 별안간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서산댁이 나가 보았는데 곧 바깥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주혁 내외가 들이닥친 모양이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웬일로 혜미가 주혁이보다 먼저 나서서 싹싹하게 인사를 해 왔다.
“아린아, 할머니한테 인사해야지? 배꼽 소온.”
“너네가 웬일이니. 연락도 없이. 혜미 네 옷차림은 또 뭐고.”